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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nry Hong Apr 23. 2024

그녀의 그림자 4

결혼 

뉴욕 베이사이드 기차역 옆의 카페 키노. 영화 관련 소품으로 실내가 장식됐고, 무심한

여사장이 무심히 커피를 내려 주는 곳. 사장과는 그 어떤 사적 대화도 오가지 않을 것 같은

장소가, 그녀와 내가 자주 찾던 데이트 장소였다. 나는 항상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 있었다.

어느덧 지정석이 된, 창가 자리에 앉아 곧 나타 날 그녀와 눈이 마주치고, 미소 짓고, 

손을 흔들고, 힘차게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녀를 맞이하는 날들이었다. 

바로 옆 그녀가 금방이라도 그리워질 것 같아 그녀의 옆머리를 흘깃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소곤거리듯 말하는 그녀에게 귀 기울였고 덧니가 살짝 보이던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에서 리드미컬하게 나오는 단어들을 되새겼다. 사람을 알아가던 기쁨에 매번 

흥분했다.


"이제 우리가 만난 지도 삼 개월이 다 되어가네, 그때 중국 남자랑 결혼한 친구는 잘 살고 있대? 

이름이 뭐였더라? 자주 연락해? 일주일 만에 만난 그녀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질문을 쏟아냈다.


"잘 살고 있겠지 뭐.." 시큰둥한 그녀의 반응이 의외였다. 

그토록 옆에서 세심히 대하던 친구 아니었나.. 


"오빠 몰랐었나? 나 그 여자 몰라.. 그날 하객 대행 서비스 연락받고 나가서 처음 본 사람이야.." 

그녀는 허리를 뒤로 젖혀가며 크게 웃었다. 웃음을 못 참겠는지 내 허벅지를 때리기까지 했다. 

나는 그녀가 그럴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같이 웃을 수는 없었다.

너무도 현실 같은 꿈을 꾸다가 갑자기 깨, 정신이 혼미한 상태였다.


그녀와의 결혼 준비는 순조로웠다. 우리 둘은 그 방면에 나름 전문가였다. 가족이 모두

한국에 있던 그녀 쪽에서는 보스턴에 살던 사촌 언니네 식구들이 참석했고, 내 쪽에서는

어머니와 여동생네 식구 그리고 몇몇 지인들이 와 줬다. 나 보다 두 살 어린 동생은 괜히 삼 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 얘기를 꺼내며 기어이 눈물을 보였다. 그녀의 지인들로는 하객 대행

서비스에서 알게 된 사람들도 참석을 했는데 몇 사람은 낯익어 보이기도 했다. 일 년에 몇 번이나

결혼식 참여를 하냐고 묻고 싶은 충동을 애써 눌러야 했다. 말하기도 쉽고 치르기도 쉬웠던 말

그대로 작은 결혼식이었다. 내 일정 때문에 신혼여행을 미루었지만 그녀는 이해해 주었다. 


"결혼 시즌 끝나고 신혼여행 가면 사람도 없고 더 좋지"대수롭지 않은 듯 얘기하는 그녀가 고마웠다.

일조량 많은 남향집이라는 이유만으로 선택한 신혼집. 방 한 칸짜리 원 베드룸이었지만, 

그녀는 그녀의 색을 입히려 애썼다. 하늘색 벽과 연두색의 천장. 은색 메탈 재질의 액자들. 

표현주의 화가들의 그림들. 침대, 책꽂이, 책상, 화장대는 모두 하얀색이었다. 

그녀가 그녀의 취향을 발산할 때, 나와의 의견 충돌은 없었다. 

그저 바라보기만 하면 내가 편하다는 것을 나는 어머니와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못을 박건 빼건 페인트 색을 바꾸건 말건 그녀는 혼자 서 해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녀는 나에게 도움을 원했던 적이 없었다. 그녀는 한국에서 오더를 받아 물건을

보내주는 구매대행업을 시작했다. 얼굴 팔렸다며 하객 대행업은 그만두었다. 별 관심이 없어

그녀가 얼마를 버는지는 몰랐지만, 옷장 속 그녀의 옷은 늘지 않았고 명품 가방 따위도 보이지 않았다.

가끔 난데없이 이번주 목요일 여섯 시에 같이 갈 데 있어. 그러고는 나를 근사한 식당으로

데려가곤 했다. 큰 접시에 앙증맞은 먹을 것이 나올 때마다 웨이터가 다가와 접시 위 뭔가에 대해

설명을 하는 식당. 이 웨이터들은 직접 음식을 옮기지도 않았다. 입만 나불거리는

웨이터들에게 나는 적응하기 힘들었다. 이런 식당에 가게 되면 나는 술을 많이 마셨다. 그녀는

와인을 골라 주기만 했고 나는 마시기만 했다. 내가 술기운에 남들 행동이나 생긴 걸 갖고 놀려

대면 그녀는 그러지 말라고 하면서도 웃어 주었다. 그때는 몰랐다. 낯익은 그 웃음이 나를 닮아

있었다는 것을. 그녀는 나에게 기회를 주고 있었다. 

시간은 무심히 흘렀고 예정되어 있던 신혼여행은 그녀가 바빠지며, 

또 다른 다음을 기약하게 되었다.


그녀와의 공간에 익숙해질 무렵, 구매대행으로 보낼 짐들이 거실과 방을 채워 나갔다. 어느 때는

화장실 입구까지도 박스가 가로막고 있었다. 눅눅함이 묻어나는 골판지 박스의 냄새. 위태롭게

천장 높이까지 쌓이는 박스들. 나는 벽과 박스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했다.

그녀는 줄곧 벽 뒤에 혹은 박스 뒤에 숨은 듯했다. 나는 숨은 아이를 봐주는 술래가 됐다.  

그녀는 고마워하지 않았다. 우리는 너무 가까이 있었기에 서로를 볼 수 없게 되어갔다.

소중한 것, 필요한 것을 지나쳐 버리는 날들. 창가로 들어오는 빛이 그녀의 그림자를 짙게

만들었다. 어느덧 나는 그녀의 뒷모습에 익숙해져 갔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살갑게 굴던 그녀의 첫 모습이 밤마다 떠 올랐다.

그녀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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