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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nry Hong May 07. 2024

그녀의 그림자 9

나의 그림자

화목하지 못한 가족은 나름 규칙이 있다. 

몰랐다고 말하며 퍼붓는 무책임하기만 한 말들. 

가족이기에 잘 알고 있는 서로의 상처들. 그 상처를 기어코 후벼 판다. 


밝은 얼굴로 다가오는 가족에게 더 밝은 모습으로

"넌 가서 밥이나 먹고 있어.. 낄 때 껴야지"라며 다소곳이 위압적으로 말하는 어느 어머니. 

당사자가 옆에 있건 없건 "너희는 결혼 잘해라 인생 망치지 말고.."를 소 되새김질 하듯 

하고 또 하는 어느 인간.

그 당당함에 흠칫 놀라는 나. 

처음 보는 가족에게서 느끼는 익숙함. 그 기시감에 소름이 돋는다.


어머니에게 이혼 소식을 전했다. 넌 자식 없어 다행이라고 어머니는 한 마디를 하셨다. 

그러고는 고개 돌려 시선을 멀리하셨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볼 때와 같은 눈빛이었다. 

가까운 것도 멀리 보려는 의식적인 시선이었다. 시선의 끝은 언제나 원망이었다.

지긋지긋한 남 탓이었다.


몇 시간째 인지 모르겠다. 

컴퓨터 앞에 앉아 사진 작업을 하고 있었다. 눈이 건조해져 깔끄러움이 느껴져 창 밖을 내다봤다. 

언제부터 내리고 있었을까? 눈이 쌓여있다. 눈발도 굵다. 

가슴 가까이 있던 자판기를 밀어내며 앉은 채로 기지개를 켠다. 서서히 일어나 입고 있던

츄리닝에 바지를 하나 더 끼어 입고, 스웨터에 조끼에 재킷을 입으며 나갈 채비를 한다. 신발장에

있어야 할 부츠가 보이지 않는다. 눈에 띄는 건 색 바래고 구겨진 운동화. 운동화의 뒤축을 펴

신는다. 장갑을 어디에 뒀더라? 장갑을 찾느라 잠깐 어수선을 피운다.

장갑은 우산꽂이와 신발장 사이에 잘 접혀있었다. 

갈색의 내 장갑은 보이지 않고, 꽃이 수놓아진 그녀의 장갑이었다. 억지로 마디 굵은 손을 구겨 넣는다. 

밖으로 나오니 포근해 보였던 날씨는 눈이 만들어 낸 신기루였는지 바람은 살에 생채기를 낼 듯 날카롭다. 

걷다 서서 재킷의 지퍼를 목젖까지 올렸다. 머리에는 벌써 눈이 모여 쌓인다. 

모자를 안 쓰고 나온 걸 후회하며 걷는다. 기왕 나왔으니 다섯 블록 정도 떨어진 공원까지는 가 볼 작정이다. 눈 내린 텅 빈 공원이 보고 싶었다. 탐스럽던 눈은 이미 발목으로 스며들었고 근육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계속 가야 하나? 되돌아가야 하나? 를 고민하며 계속 걷는다. 

저만치 공원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고 바람은 더욱 야무지기만 하다. 뺨의 감각이 무뎌졌다.

바람에 날리는 눈은 시야를 가린다. 이제는 악다구니로 걷는다. 공원을 꼭 보고 가겠다고 되뇐다. 

공원 입구에 다다랐다. 아무도 없는 적막감.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상상했던 전경이었다. 

뻣뻣한 고개를 돌려 눈 쌓인 미끄럼틀을 보며 이제는 자취를 감춘 시소를 상상한다. 

양쪽 균형이 맞아야만 즐길 수 있는 기구. 하늘로 향하며 두려움 속에서도 순간 놓아 보았던 양손

위로 향한 친구를 위해 핸들을 꽉 붙잡고 있었던 양손.

떠나버린 아내의 장갑을 끼고 지금의 손. 균형이 떠오르다가 생각은 아내에게서 멈춰 버린다.

꼼꼼했던 그녀가 일부러 장갑을 놓고 간 건 아닐까 의심해 본다.

그때 미끄럼틀 옆의 땅이 움직인다. 눈 쌓인 땅이 부서지듯 움직였다. 헛것을 보고 있나? 

두려운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그쪽으로 걷고 있다. 멈추지 못한다. 발목을 파고든 눈에 피부가 아려왔다.

바지 밑단의 뭉친 눈이 발을 무겁게 만든다. 눈에 뭉친 발을 힘겹게 빼가며,

움직이는 땅을 주시하며 거리를 좁혀 나간다. 기이한 모습이었다. 눈을 뒤집어쓴 기러기 떼. 

눈을 뒤집어써 희고 둥근 몸통에 검은 물갈퀴가 징그럽게 커 보였다.

기러기 떼가 왜 이곳에 있을까? 기러기는 철새 아니었나? 낙오한 걸까? 이곳이 철새의 목적지였나? 

나의 호기심은 아랑곳없는 듯, 규칙적으로 몸을 뒤뚱거리며 기러기 떼는 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했다. 기러기들이 내 앞을 지나칠 때까지 기다렸다.

마지막 몇 마리가 내 앞을 지날 즈음, 한 놈이 크기는 다른 것들과 별 차이 없는데 눈 틈으로

보이는 깃 털 색깔이 달라 보였다. 짙지 않은 갈색. 보스라기 같은 깃털. 그 옆의 한 마리가

보스라기 옆에 바짝 달라붙어 내 앞을 지나간다. 목 근처의 짧은 깃털을 곧추 세운 모습으로 나를

위협적으로 쳐다본다. 기러기의 눈을 외면하며 머리 위 눈을 털어냈다. 

기러기 떼를 피해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걷던 걸음을 멈추고 감각 무뎌진 발을 내려다봤다. 

운동화 끈이 풀려 있었다. 꽉 끼던 장갑을 힘겹게 벗으며 나도 모르게 손의 냄새를 맡는다. 

혹시 있을지 모를 그녀의 향을 찾으려 했다. 기억을 부르는 냄새가 나는 듯했다. 

진짜 그녀의 향이었을까? 알 수 없는 내음은 곧 흩어진다. 

고부라지는 손에 입김을 불어 보지만 금방 서늘해진다. 

펴지지 않는 무뚝뚝한 손으로 눈에 젖은 운동화 끈을 잡아맨다. 

시간 들여 익숙한 매듭을 고치는데 떠 오르는 기억이 있다.

허리를 잔뜩 숙여 그녀의 운동화 끈을 매어 준 적이 있다.

낯설기만 한 경험이었다. 그때까지 남의 운동화 끈을 매어 준 적은 없었다.

운동화 끈을 고쳐주고 올려다본 그녀의 얼굴은 울고 있었다.

다시 걷는다. 

걷고자 하는 건 마음뿐. 흰 눈의 블랙홀에 빠져 제자리걸음을 한다. 

발목 넘어까지 빠지는 눈이 힘겹기만 하다.

굽혀져 가는 허리를 세워 텅 빈 공원을 둘러본다. 보일락 말락 희미한 그림자가 거추장스럽다.

맞은편, 호수에서 건너온 바람이 얼굴을 거세게 때린다. 

눈물이 흐른다. 손등으로 눈을 문지르며 바람 때문이라 핑계 삼는다.

하지만 한 번 터진 울음은 멈추지 않는다.

소리까지 더 한다. 힘 빠진 다리가 무너지며 고꾸라진다. 

연수 야! 그녀의 이름을 외친다. 눈 속으로 파묻힐 이름을 다시 목놓아 부른다. 

연수 야!..

그녀의 이름이 감각 없는 귀에 꽂힌다. 후회가 온몸을 감싼다.

그녀에게서 보이던 그림자는, 그녀가 아닌 나의 것이었다.


부족한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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