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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nry Hong Nov 19. 2024

힘쓸 일

경기 규칙을 바꿔보자

부부 생활을 하며 말없이 정해진 규칙들이 있다.

예를 들자면 음식 맛도 모르는 내가 음식을 할리는 없고,

대신 설거지를 한다. 

식사가 끝나면 나는 부리나케 일어나 설거지를 시작한다.

먹는 기쁨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고 산더미 같은 빈 그릇을 마주 하고 있자면,

이것저것 만드는 아내가 늘 반갑지만은 않다.

음식을 만드는 건 아내.

뒤처리는 나의 몫.


청소하는 일도 자연스럽게 분담이 되었다.

아내는 결혼 후 2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청소기를 써 본 적이 없다.

청소기를 이용한 청소는 내 몫이다.

대신 아내는 화장실 청소를 한다.


처음부터 내가 설거지를 한 건 아니다.

식사를 마치고 TV나 보며 앉아 있으려니 소화가 잘 안 됐다.

설거지를 운동삼아 시작했다. 소화 불량이 사라졌다.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설거지를 하다 보면

운동도 되고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는 힐링의 시간이 된다.

나 좋자고 시작한 일인데 아내가 아주 좋아한다.

나의 설거지가 아내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설거지 걱정을 덜어 놓으니 음식에 창의력이 생겼다.

본의 아니게 아내를 돕게 된 것은

청소일도 마찬가지다.

기계치인 아내에게 새 청소기를 맡길 수 없었다.

허구한 날 전깃줄을 엉키게 하거나

충전기를 헷갈려하는 아내다.

청소기 전깃줄은 길기도 하다. 청소기 바퀴로 빨려 들어갈 확률 매우 높다.

고심을 해가며 구입한 청소기를 기계치에게 내줄 순 없었다.

금세 고장낼 게 뻔하다.

별수 있나. 청소는 내가 할 수밖에..

비슷한 이유인지 아내는 욕실 청소를 나에게 맡기지 않는다.

욕실벽, 세면대, 욕조, 변기등에 모두 다른 세척제와 도구를 쓴다는데..

몇 번 무시했더니 화장실 청소에서 퇴출당했다.

도와준다고 해도 마다하시네.. 감사합니다!


생각해 보니 주로 힘쓰는 집안일은 내가 해왔다.

장 보러 갈 때도 마찬가지다.

쌀이나 물병 박스가 든 장바구니 무게 무시 못 한다.

치즈가 눌어붙은 냄비 설거지는 어떤가!

손가락에 근육이 생길 정도다.

바닥의 물건 치워가며 청소기를 돌리다 보면 전신 운동이 필요 없다.

은근히 힘쓰는 일이 실생활에 널려있다.


힘쓰는 집안일에 남자가 힘쓰는 것, 어쩌면 당연한 일인데.. 

그 당연한 일이 당연하지 않을 때를 상상해 봤다.

힘없는 남편을 어디다 쓸 것인가?

슬프게도,

별다른 효용 가치가 없다.

잔소리 많은 남편을 데리고 다니는 이유는 운전하고 짐이라도 들 수 있기 때문 아니었나.

힘도 못 쓰며 입만 나불거린다면? 데리고 다닐 이유 같은 건 없다.

집에 꼬박꼬박 들어오는 남편이 젖은 낙엽처럼 보일라나..

아내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날들이 될지도 모르겠다.


힘없는 남편을 어디다 쓸 것 인가?

존경할 부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액세서리로는 너무 크고 너무 늙었고..

아무래도 가스라이팅을 시작해야 할 거 같다.

경기의 규칙을 바꿔야겠다.

남편은 보호 대상이지..

구박의 대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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