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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롱쌤 Apr 14. 2024

엄마도 없는 불쌍한 것들, 엄마 밥 한번 먹여줄게!

지난겨울 초등학교 동창들과 어릴 적 얘기를 하다 자연스럽게 부모님 근황을 나눴다. 그런데 넷 중 셋이 부모님과 이별을 했다. 한 친구는 불과 몇 달 전에 어머니마저 떠나보냈다. 아직 엄마가 고향땅을 지키고 있는 친구 홍이가 우릴 놀렸다.

“어이구 엄마도 없는 불쌍한 것들, 언제 엄마 밥 먹을 수 있는 기회 한번 줄게.”

“진짜?!!!!”

불쌍한 고아 셋은 봄이 오면 친구 홍이의 고향으로 엄마밥을 먹으러 가기로 약속했다.     

 

사실 친구의 고향 수한마을은 내게도 남다른 기억 속 동네다. 친정 엄마는 시골에서 화장품 외판원을 오랫동안 하셨다. 어린 나는 엄마 치맛자락을 붙잡고 늘 따라가고 싶어 떼를 썼다. 엄마가 대문 밖을 나설 때 부터 울기 시작해서 신작로에 이르면 나 좀 데리고 가라고 대성통곡했다. 아련히 사라지던 엄마가 혹시나  울음소리를 듣고 따라오라 손짓을 하지 않을까 악을 쓰며 울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유일하게 나를 데리고 갔던 동네가 바로 윗마을 수한이었다.  꼬불꼬불 오르막 산길을 오르며 신이 난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연신 엄마 팔을 잡아당겼다. 한참을 걸으면 그림처럼 산속 마을이 나타났다. 엄마는 마을 초입 첫 번째 집에 나를 맡기고는 화장품을 다 팔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산꼭대기 한티마을까지 다녀오면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깨 한 되 머리에 이고 쫄랑쫄랑 집으로 가는 길, 냥 기분이 좋아 폴짝폴짝 뛰었다. 어둠이 깔린 산속은 을씨년스러웠지만 엄마가 옆에 있으니 무섭지 않았다. 하지만 새 울음소리에 메아리가 울리면 나도 모르게 엄마 손을 잡았다. 철들고 알았다. 엄마가 왜 그 동네만 유일하게 나를 데리고 갔는지. 30대 초반의 젊은 여인에게 가로등 하나 없는 깜깜한 산길이 얼마나 무서웠을까.       


동창생 넷이 모여 수다 한바탕 떨다 보니 어느덧 고향땅이다. 이제 저 냇가만 건너고 산허리를 돌아 오르다 보면 홍이의 고향 수한마을이 나타날 것이다. 그런데 그 옛날 좁디좁던 길은 사라지고 훤한 포장길이 뻗어있다. 승용차가 쌩 하고 산길을 접어드니 드디어 산속에 파묻힌다. 집 한 채 없는 고요한 산속을 자꾸만 올라간다.

산등성이 위로 벚꽃 산수유 참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예쁜 것 하나씩 보여줄 것이지 요즘 계절이 미쳤다.  나를 제외한 두 친구는 이번 수한마을 방문이 초행길이다.

“와~~ 홍이 고향이 이렇게 두메산골이었어?”

10분을 달렸을까. 십여채의 집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이 보인다. 친구집 마당엔 벌써 어머니가 나와 계셨다. 맏딸과 그 친구들을 보시고는 활짝 웃어주신다.

“어머니, 요 산 아래 벌방에 살았어요.”

허연 머리의 어머니를 보는데 엄마 생각이 난다. 우리 엄마도 나이 들었더라면 꼭 저 모습이겠지? 가슴이 찡해지고 눈시울이 갑자기 뜨거워진다. 부모와 이별한 세상의 딸들은 모든 어머니가 엄마 같다. 엄마 얘기를 했더니 홍이 어머니도 기억이 나신다고 한다.         

“어머니, 절 받으세요.”

어머니는 절을 한사코 안 받으신다. 나이 든 것 같아 싫으시단다. 허리도 꼿꼿하시고 피부도 팽팽하시다. 홍이는 좋겠다. 저렇게 정정한 엄마가 옆에 계셔서.


딸들의 보따리가 풀어졌다. 호두과자, 잔기지떡, 절편, 스카프, 핫팩, 양말 등이 쏟아졌다. 왜 이런 거에 돈을 쓰냐며 걱정을 늘어놓으시는 어머니. 똑같다. 우리 엄마도 맨날 그랬다. 힘드니까 자주 내려오지 말라고, 힘들게 번 돈 길가에 돈 뿌리지 말라고. 그 말을  온전한 진심이라고 믿은 나는 바보다.      

“한티 마을 가서 부부나무 보고 나물도 뜯자. 걸어가면 힘드니까 차 타고 가자.”

꼬불꼬불한 길을 차가 오른다. 홍이는 능숙하게 운전대를 돌린다. 우리는 수학여행 온 여고생처럼 비명을 질러댔다. 어머니는 연신 우리를 보고 웃으신다.        

승용차가 드디어 해발 500미터 산 꼭대기에 도착했다. 감탄이 절로 터져 나왔다. 첩첩이 쌓인 산 저 아래로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마을도 보였다. 부부나무라 불리는 600년 된 소나무의 자태도 늠름했다. 한쪽에서 보면 분명 한 그루인데 실제로는 두 그루인 쌍간(뿌리에서 두 그루로 자람)인 이 나무를 동네사람들은 마을의 수호신처럼 모신다고 한다. 부부나무 옆 산꼭대기집은 동창 수호네 집이라고 한다. 있을 리 만무한 친구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수호야~~!! 안수호!!”

개 두 마리만 요란하게 짖을 뿐 인기척이 없다. 안수호는 매일 산 아래 학교를 어찌 다녔을까. 얼굴도 흐릿한 친구 얘기를 하며 우리는 또 깔깔 웃었다.  

어머니와 함께 양지바른 곳에서 옹기종기 앉아 봄나물을 뜯었다. 시골내기들은 본능적으로 먹거리를 알아본다. 손놀림이 점점 빨라진다. 무릎이 안 좋은 어머니는 다리를 쭉 펴고 앉으셨다. 우리 엄마도 늘 저 자세로 일했는데. 한 시간도 안돼 봉지 여러 개가 가득 찼다.     


마당에 쑥, 냉이, 머위나물을 펼쳐놓고 손질을 시작했다. 어머니께서는 어느새 텃밭에서 시금치, 쪽파, 유채나물을 한가득 뜯어오셨다. 똑같이 나눠 가져가란다.

“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거절 한마디 없다.

보따리 보따리 냉큼 차 트렁크로 싣는다.   

“어머니, 이 파김치 진짜 맛있어요.”

파김치도 얻어간다.  

“어머니, 이 물은 뭘로 끓였어요? 엄청 구수해요.”

말린 옥수수와 둥굴레와 무말랭이도 바리바리 싼다.

“엄마, 고만해. 얘들 이거 맛 들이면 자꾸 와서 엄마 꺼 다 가져가.”

홍이의 볼멘소리에 어머니가 웃으신다.

“뭐 이까짓 게 대단한 거라고.”

귀하디 귀하죠. 엄마 없는 우리가 어디 가서 이런 걸 얻나요?     

산골짜기엔 일찌감치 어둠이 내렸다. 반짝이는 별들이 유독 가깝게 느껴진다. 어머니께서 군불을 때신다. 이게 얼마만이냐며 한 친구가 아궁이를 꿰차고 앉았다. 바람구멍을 만들며 나무를 뚝 뚝 부러뜨려 넣으며 불 지피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나무 타는 냄새에 기분이 좋아졌다.  굴뚝 위로 하얗게 피어오르던 연기가 우리를 고요히 감쌌다.  

여자 넷이 모이니 시골집이 잔칫집 같다. 파전을 부치고 미나리를 뜯어 삼겹살을 구웠다. 어머니의 손두부와 장아찌, 명태무침이 상에 올랐다. 순식간에 음식들이 사라진다. 어머니는 채워주고 또 채워주신다. 분명 배곯고 살지는 않았는데 우리는 무엇에 굶주려 걸신들린 듯 먹고 또 먹었을까.

동창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밤늦도록 얘기꽃을 피웠다. 살아온 이야기,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함께 만들어갈 이야기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아랫방 어머니의 코 고는 소리가 유난히 정겨운 밤이었다.      


새벽에 일어나신 어머니는 순두부를 끓이셨다. 우리는 어젯밤 고기가 아직도 뱃속에서 요동친다며 안 먹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어머니는 차에서라도 먹으라며 통에 넣어주신다.

“어머니, 또 올게요. 건강하게 지내셔요.”

운전 조심하라며 손짓하시는 어머니를 보는데 눈물이 난다.

짧은 만남과 또 이별. 치악산 휴게소에서 순두부를 나눠 먹었다. 어머니의 따뜻한 손맛에 목이 잠겼다.

      

어릴 적 엄마 따라다니던 수한 마을을 다녀왔다. 여섯 살 꼬맹이의 기억 속 그때처럼 그곳은 여전히 예쁜 마을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을 보내다가도 문득 생각 날 것 같다. 가슴 한쪽 먹먹하고 허전해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나는 친구 홍이를 괴롭히겠지?

홍아, 엄마 순두부 먹고 싶어. 엄마 보러 또 가자.

어머니가 바리바리 싸주신 야채와 시골 반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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