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포롱쌤 Sep 29. 2024

"당신과 함께 걷습니다"

'그레구아르와 책방 할아버지'와 나의 피키에

새벽부터 사람들은 참 열심히 걷습니다. 누군가는 산책하듯, 누군가는 빠른 걸음으로, 또 다른 이는 뜁니다. 그들의 모습을 한참 쳐다봅니다. ‘그레구아르와 책방 할아버지’(마르크 로제 지음, 문학동네)속 당신을 떠올립니다.     

어제도 당신을 만나고 왔습니다. 요양원에 누워 계신 나의 피키에는 어머니입니다. 어느 날 뇌출혈로 쓰러지신 당신의 이야기가 피키에씨와 닮았습니다. 하지만 너무도 다른 모습에 자꾸만 슬퍼집니다. ‘나의 피키에는 지금 외로운 골짜기 저 아래로 한없이 한없이 가라앉고 있습니다. 세상 그 누구와도 소통도 교감도 못한 채 많은 시간이 흐르고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 그녀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이별을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피키에씨 당신이 책과 함께 평생을 살았다면 나의 어머니는 고단한 노동으로 삶을 채우셨습니다. 70여 년을 쉼 없이 밭을 일구던 당신께서는 어느 날 수줍은 목소리로 제게 말하셨습니다.

막내야, 다음 추석 땐 서현이 1학년 국어책 좀 갖다 주겠니?”

어머니는 글자를 모르셨던 분이셨습니다. 며느리 셋 중 왜 제게 그런 부탁을 하셨는지는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두 딸의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와 열 칸 공책 몇 권을 가져다주면서 제가 그랬지요.

다음 설날에 와서 받아쓰기할 거예요.”

“아이고, 선생님 무서워 열심히 공부해야겠다~”

늘 자존심 세서 어렵기만 했던 어머니를, 나만의 피키에를 좋아하게 된 순간입니다.     


그리고 2년이 흘렀을까요. 어머니는 추운 겨울 김장 수백 포기를 하시다가 쓰러지셨습니다. 그녀의 글씨가 유난히 예뻐지던 때였습니다. 당신 소유의 유일했던 책은 아마 손녀딸의 국어책이었을 것입니다. 얼마나 읽고 썼던지 1학년 1학기 국어책이 너덜너덜했습니다. 깜깜했던 세상에서 밝은 눈을 가지게 됐다며 좋아하셨던 어머니의 선한 웃음이 기억납니다.      


어머니가 건강하셨더라면 어땠을까요. 어쩌면 그레구아르처럼 책을 좋아하게 됐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럼 저는 딸들의 동화책을 수시로 갖다 날랐을 겁니다. 그레구아르가 피키에씨에게 그러했듯 저도 당신의 삶을 더 많이 이해하고 사랑하게 됐겠지요.     


자신의 의지와 바람대로 인생의 끝맺음을 맺는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비록 휠체어 신세였지만  피키에씨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피키에씨의 마지막은 결코 초라하지도 슬프지도 않습니다. 해 지는 저녁, 서쪽 하늘을 온통 붉게 만든 노을처럼 그 여운은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이별을 준비하는 피키에씨가 그레구아르에게 특별한 부탁을 합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주문. 그 대목에서 저는 죽음을 경계로 떠나는 자와 남겨진 자의 보이지 않는 믿음과 연대를 발견합니다. 피키에씨를 만나 책과 낭독의 세계를 알게 된 된 그레구아르, 아니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 법을 깨달은 그레구아르. 아마도 이 젊은 낭독가의 하루하루엔 피키에씨의 숨결도 함께 할 겁니다. 그들은 영원히 함께 존재하는 거지요.     

 

피키에씨가 그레구아르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던 말을 해봅니다.  

“사랑하는 그레구아르, 네 인생을 계속 걸어. 그 발걸음에 나도 함께 하마.”      



지금도 병상에서 삶의 마지막 소임을 다하고 계신 나의 피키에, 숨 쉬는 것 마저 힘들어하시는 어머니 당신과 ‘함께’ 오늘도 걷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먼 훗날, 그거 내가 할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