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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롱쌤 Oct 14. 2024

'우리집엔 책이라고 할 만한 게  없어요'

'그레구아르와 책방할아버지' 1


수레국화 양로원에 책방 할아버지가 산다. 책방 할아버지 피키에씨 방에는 책 3천 권이 있다. 파킨슨병이 악화한 그는 이제 시력마저 잃어가고 있어 더 이상 책을 읽을 수 없다. 이제 막 양로원에서 일하게 된 열여덟 청년 그레구아르. 그는 2만 7천 권의 책을 처분하며 고통스러웠다는 피키에씨를 이해할 수 없다. 그레구아르는 속으로 말한다. ‘왜냐고? 우리집엔 책이라고 할만한 게 한 권도 없어요.’    


  

나도 어릴 때 책이 한 권도 없었다.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던 시골에 그런 게 있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내 유년시절 최초의 책은 ‘주몽’이다. 불행하게도 그건 나의 소유가 아니었다. 아랫집 친구 수정이 책이었다. 수정이네는 늘 방학 때면 서울서 돈을 많이 벌어 성공했다는 작은아버지께서 선물을 보내주셨는데 그게 책이었다. 책이 박스째 배달됐는데 책꽂이에 도도하게 진열됐던 계몽사 ‘어린이 명작’ 시리즈가 아직도 기억속에 생생하다. 파랑 빨강 원색의 표지에 이국적인 그림이 박힌 명작동화, 흑백의 소묘가 어울렸던 한국전래집은 단숨에 어린 나를 사로잡았다.      


성격 좋고 선머슴 같던 소꿉친구 수정이는 늘 나와 붙어 다녔다. 그런데 털털했던 그 친구가 이상하게도 책 인심은 별났다. 책을 읽을 땐 꼭 자기 집에서 읽어야 했다. 자존심 센 내가 그 집 문지방이 닳도록 다니다 급기야 빌려달라고 애원까지 하기에 이른 책이 바로 ‘주몽’이었다. 고구려 동명성왕(주몽)의 건국 이야기를 컬러 그림과 함께 실린 한국전래동화, 아니 엄밀히 말하면 역사 동화책이었다. 무엇이 그렇게 나를 매료시켰던 걸까. 버드나무 밑에서 주몽의 어머니 유화가 해모수를 만나는 장면이 아니었나 싶다. 하늘하늘한 옷을 늘어뜨린 긴 머리의 아름다운 여인이 단박에 마음에 들어 방바닥에 배를 깔고 종이 위에 수도 없이 얼굴을 그려댔다.

그렇게 읽은 책은 내 입에서 다시 탄생했다. 10리나 되는 등하굣길에 이야기를 내 맘대로 바꿔 친구들에게 들려줬다. 여름 뙤약볕도 먼지 풀풀 날리는 신작로도 다 배경이 되었다. 울고 웃고 감탄하며 시골 꼬맹이들의 짤똥하던 그림자는 더 짙어지고 길어졌다.      


고향 땅을 떠나 읍내로 이사를 간 건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다. 오빠들과 언니가 일찌감치 타지로 공부를 하고 떠난 집은 허전하고 외로웠다. 고향 친구들은 비슷비슷한 모습으로 투박하지만 따뜻했었다. 하지만 도시의 아이들은 이층 양옥집에 살아서인지, 뽀얀 피부를 가져서인지 나랑은 다른 족속처럼 이질감이 느껴졌다. 혼자가 익숙해지면서 사춘기가 일찍 찾아왔다. 아빠가 제일 잘 생겼다며 무릎을 독차지하던 막내딸은 이상주이자 아버지의 무능함이 싫어졌고 엄마에게 늘 조잘거리던 수다쟁이도 입을 다물었다. 세상에 나 혼자인 것만 같은 야릇한 마음을 달래준 게 또 책이었다. 이솝우화, 안데르센 전집, 세계명작, 전래동화를 읽던 어린이는 어느새 세계고전에 빠져 사색하는 소녀가 되었다.      


당시 읍내 장터엔 5일마다 찾아오는 아저씨가 계셨다. “책 사세요!” 장터가 떠나가라 소리 지리던 그분은 앞치마를 두른 채 손뼉을 쳐가며 행인을 유혹해 댔다. 나는 부모님을 졸라 얻어낸 천 원짜리 한 장을 휘날리며 그곳으로 달려가곤 했는데 일요일 아침 그곳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휘황찬란한 책이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사람들은 읽고 싶은 책을 고르느라 시끌벅적, 보물 찾기가 따로 없었다. 해 질 녘 학교 가방을 메고 들리는 그곳엔 파장 분위기에 건질 게 없었다. “옜다! 오늘은 덤이다.!”라며 마음 좋은 아저씨가 천원에 두 권을 덥석 안기기도 했다. 그때 읽었던 책들이 톨스토이 ‘부활’, 앙드레 지드 ‘좁은 문’, 헤르만 헤세 ‘데미안’, 나다나엘 호돈 ‘주홍글씨’ 등 같은 세계고전들이다. 시대와 국경을 넘나든 대작가들이 설파해 주는 사랑, 존재, 인생이라는 것들이 열다섯 살 소녀를 마구 설레게 하고 꿈꾸게 했다.


막내딸이 새벽까지 잠도 안 자고 책을 읽자 아버지는 노발대발하셨다. 일찍 자야 일찍 일어난다며 늘 잔소리를 하셨다. 하루는 이불 뒤집어쓰고 전기스탠드 불빛으로 몰래 책을 보다 들켜버렸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아버지는 내가 읽고 있던 책을 갈기갈기 찢으셨다. 나는 밤새도록 테이프로 책장을 이어 붙이며 울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난 절대로 아빠 같은 부모는 되지 않을 거라고. 그 책이 아마 기 드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이었을 것이다. 허망하고 슬픈 한 여인의 삶을 들여다보며 ‘인생이란 그렇게 즐겁기만 한 것도, 그렇다고 그렇게 불행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라는 마지막을 구절을 가슴에 담았다. 책 이야기를 하면 끝도 없을 것 같아 여기까지만 해야겠다.      


집에 책이라고는 한 권도 없던 ‘그레구아르’가 책방 할아버지를 만난 건 운명일지 모른다. 조카들을 위해 방학마다 문고판 책들을 보내주셨던 수정이네 삼촌과 시골 장날 천 원에 두 권씩 안겨주던 좌판서 책 팔던 아저씨도 내겐 행운이라 할 정도로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아직도 책을 좋아하고 책을 끼고 사는 나를 보면 그건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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