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연휴 첫날, 남편과 관악산을 오르기로 했다. 이상하게 아침부터 짜증이 났다. 아무 생각 없이 옷을 집는 편인데 상·하의를 챙기는 데 시간이 걸렸다.
나는 컨디션이 안 좋으면 입을 다무는 편이다. 과묵한 아내가 이상한지 남편이 수다스러웠다. 2호선 사당역 지하 쇼핑센터에 옷 가게가 늘어서 있었다. 알록달록 등산복 앞을 지나는데 남편이 한마디 불쑥 던졌다.
“만원인데 하나 사지?!”
순간 열이 확 받았다. 뭐? 만원이니까 하나 사라고?! 나도 모르게 남편을 째려봤다. 남편이 움찔한다.
“만원이니까 사라고? 이만 원이면 사지 말라는 소리야?”
당황하는 남편이 어이가 없어 웃는다. 에이, 그런 의미 아닌 거 알면서 왜 그러냐는 표정이다. 순간 나도 괜한 시비를 걸었다 싶었다. 그런데 말을 곱씹을수록 화가 났다. 그의 진심을 알지만 꼭지가 확 돌 때가 있다. 말 때문에 상처받은 지난 세월, 소환하자면 수도 없지만 지금 생각나는 에피소드 한 가지는 이런 거다.
회사 일이 우선인 남편은 두 아이를 출산할 때마다 옆에 없었다. 첫아이 때도, 작은아이 때도 만삭인채로 혼자 택시 타고 병원 가서 긴 사투 끝에 출산했다. 남편은 늘 상황이 종료되면 나타났다. 10시간도 넘게 진통 후 둘째를 낳았을 때였다. 간호사가 산모가 너무 힘들게 아이를 낳았으니 영양제를 맞으라고 추천했다. 가격대를 10만 원, 7만 원, 5만 원 정도의 세 가지를 나열했는데 남편은 고민도 안하고 대답했다.
“중간 걸로 주세요!”
와~ 열 시간 넘게 진통하며 얼굴 실핏줄이 다 터져서 얼굴이 퉁퉁 부은 마누라를 두고 최고로 좋은 거를 주문해도 모자랄 판에, 중간 거라니!!! 꼭 마누라를 중간으로 취급하는 것 같아 눈물이 났다. 지금만 같았어도 스스로 “젤 좋은 걸로 주세요!” 소리칠텐데 그때는 왠지 치사하게 느껴져 말도 못 하고 끙끙 앓았다. 어려서 그랬겠지만, 감정표현에 서툴렀던 것 같다.
늘 말을 예쁘게 하자고 아이들에게 말한다. 사춘기 아이들은 부모님, 선생님, 친구들 관계에서 힘들어하는 경우를 수도 없이 본다. 그럴 때 습관처럼 그랬다. 자기의 마음도 제대로 들여보고 자기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문제와 갈등 해결의 시작점이라고. 그리고 표현을 세련되게, 즉 예쁘게 하라고 얘기했다.
‘청소하라는 잔소리 좀 그만해. 알아서 할게!’ 대신
‘내가 지금은 좀 피곤해. 1시간만 쉬었다가 치울게. 기다려줘.’
감정표현은 솔직하게 하면서 초점은 나에게 맞추라고 말이다.
‘왜 우리 반만 맨날 사회 수업 많이 해요?’ 말고
‘사회 시간 때 오늘 열심히 공부할 테니까 내일은 재밌는 거 해요.’
지적이나 비난하거나, 다른 누군가와 비교하지 말고 상대의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만들자.
‘넌 맨날 그런 식이야. 그래서 너랑 놀기 싫어.’ 보단
‘네가 갑자기 화를 내고 짜증을 내니까 당황스러워. 그래서 자꾸 피하게 돼.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했으면 좋은지 알려줘.’가 낫다.
사람들은 전지전능하지 않아서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상대가 이해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안내해 주자, 상처 많고 예민한 사람일수록 조심스럽게 대하자.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 좋은 사람들이라는 전제를 깔고 생활하면 진짜로 그들과 긍정적인 관계가 형성됨을 강조해왔다.
“그런 뜻 아닌 거 알면서 우리 마나님 오늘따라 왜 예민하실까.”
산길을 걸으며 남편이 자꾸 옆꾸리를 찌른다. 곰곰이 생각해 본다. 처음엔 불편한 감정의 실체가 ‘예쁘게 말하지 않은 남편’인 줄 알았다. 그런데 더 깊이 들여다보니 결국 나의 문제였다. 소박하고 검소한 남편을 평소 좋아한다. 자신에게 더 엄격한 모습을 존경하기까지 했다. 그랬던 내가 오늘 돌변했다. 무엇이 바뀌었나. 바로 나다. 어제 늦게 잠들었고 뚜렷한 이유 없이 잠을 설쳤다. 그래서인지 유난히 발걸음이 무거웠다. 장롱 속 우중충하고 낡아빠진 옷들이 꼭 나처럼 느껴져 언짢았다. 시어머니 상을 치르느라 올겨울 혼자만의 장기 여행도 틀어진 것도 아쉽다. 개학날이 곧 다가오는데 방학 동안 푹 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열심히 무언가를 한 것도 아니다. 긴 명절 연휴 마땅히 갈 곳도 기다리는 이도 없다. 내가 뾰족하니 그 어떤 것도 왜곡됐다. 말을 예쁘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쁘게 듣는 것도 중요하지 싶다.
백번 양보했다. 그런데도 오늘 남편의 ‘만원’ 자꾸 거슬린다. 만 원짜리 마누라 취급받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