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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롱쌤 Jun 18. 2024

100전 100패

**가 등교를 안 했다.

평소 지각도 안 하던 아인데 웬일이지?

부모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더니 신호가 가다가 뚝 끊긴다.

늦잠 자서 지금 전화받았나?

1교시가 지나서도 오지 않는다.

반 아이들이 오지 않은 **이가 걱정되나 보다.

“선생님, 늦잠 잤다고 해도 지금은 와야 하는데요.”

다시 전화해보라고 채근이다.

“알았어. 알았어. 친구 엄청 잘 챙기네.”

이번에도 신호가 한참 가다가 또 뚝 끊겼다.

뭔 일이 생겼나?

3교시를 하고 있는데 문밖에서 **가 서성거린다.

얼른 나갔다.

“**~~~ 왔구나. 아이고. 잘 왔어.”

쑥스러워할까 봐 등교한 용기를 폭풍 칭찬한다.

마지막 남은 꿀 하나를 붙여준다.

아이들 눈이 휘둥그레진다.

“늦게라도 학교 온 건 큰 용기야. 분명 어떤 이유로 오기 싫었을 텐데.”

따로 **를 데리고 밖으로 나간다.

“무슨 일이야? 늦잠 잤어?”

쭈뼛쭈뼛 머뭇거린다.

“혹시 오늘 받아쓰기 때문에 스트레스받아서 학교 오기 싫었던 거야?”

“아니요. 그건 아니에요.”

“그럼? 얘기하기 싫어? 선생님이 기다려줄까?”

“엄마가 학교 가지 말래요.”

갑자기 서러운지 울먹거린다.

“제가 엄마한테 짜증 내고 화냈거든요.”

“알았어.  엄마가 엄청 속상하셨나 보다. 다음부터는 엄마가 그렇게 말씀하셔도 넌 가방 메고 그냥 학교 와야 해.”

**가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래도 학교에 이렇게 와줘서 고마워.”

아이를 안아줬다.

“들어가자. 눈물 닦고.”

“저 조금만 복도에 있다가 들어갈게요.”

“그래그래, 화장실 가서 시원한 물에 손도 씻고 와.”


수업 끝나자 ** 어머니께서 전화를 하셨다.

등굣길 옷이 마음에 안 든다고 문밖에서 심통 부리고 서있어서 기싸움을 했다고 죄송하다고.

안 봐도 충분히 눈앞에 그려지는 상황이다.


나도 딸들과 기싸움 참 많이 했다.

학교 가지 말라는 말 밥 먹듯이 했던 것 같다.

무난했던 큰딸과 달리 작은딸은 아기 때부터 기가 셌다.

네 살 때였던가.

어린이집 등원 거부를 일주일 넘게 했다.

출근길 바닥에 딱 붙어서 일어나지도 않는 아이를

달래고 협박하다 지쳐 그냥 문 닫고 나간 적도 있다.

(물론 현관 앞에서 기다렸다.)

얼마나 고집이 센지 10분이나 버티다 인기척이 없는 것 같으니

울음을 터트리며 현관문을 두드려댔다.

초등학교 입학 후부터는 어찌나 욕심이 많은지

사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이 끝도 없었다.

평범한 엄마에겐 참 버거운 아이였다.

그러다 5학년 때 크게 한번 터졌다.

영어학원에서 1등 하고 싶다며 다른 엄마들처럼 왜 쪽지시험 미리 안 봐주냐며

패악을 부리길래 작정하고 솔직하게 말했다.

엄마는 직장을 다녀서 시간도 에너지도 부족하다고.

그래서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줄 수는 없다고. 미안하다고.(지금 생각해보니 많이 부끄럽다.)

눈을 부릅뜨며 원망 어린 눈으로 눈물까지 흘리던 딸아이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사춘기 시절은 말 그대로 폭풍 속 같았다.

학원이 마음에 안 든다며 수시로 바꾸고 담임선생님 이상한 사람이라고 백지 시험지 내고.

집 근처 학교는 가기 싫다 해서 이사도 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땐 결국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자기에겐 의미 없는 시간이라며.

공교육을 거부하는 딸 앞에서 공부 못해도 좋으니 졸업만 하자고

당시의 나는 눈물로 호소했다.

학교는 대학을 위해서 다니는 곳이 아니라고, 친구들과 선생님과 함께 같이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곳이라고

교과서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그러자 아이는 입을 딱 다물고 더 이상 이야기를 거부했다.

결국 딸아이는 고등학교 2학년 2학기에 자퇴했다.

“학교라는 울타리를 뛰쳐나가니 막상 무서웠어.

시간이 많아서 공부도 내 계획대로 잘 될 줄 알았는데

생각만큼 안되니까 불안해지고, 그제야 엄마 아빠 말이 이해됐어.

온전히 인생이 내 것이라는 말이 실감도 나고. 자존심에 다시 학교로 갈 수는 없고

그러니 공부를 안 할 수가 없더라고.”

지금에서야 딸은 그 당시의 맘고생을 덤덤히 말한다.


그 시절 온 가족이 참 힘들었다. 하지만 그 어둡고 힘든 터널을 빠져나오자

아이도 부모도 더 단단해졌다.

20대인 두 딸은 아직도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 같다.

여전히 나와 밀당을 한다. 기싸움도 하고 있다.

하지만 어릴 때랑 달라진 점은 내 두 어깨가 조금은 가벼워진 것 같다.

엄마에 등에 업힌 아이라고 생각했던 꼬맹이들이 자기 걸음으로 뚜벅뚜벅 걷고 있다.

반듯하고 넓고 안정된 큰 길이 비록 아닐지라도

좁고 험난하고 위험한 길일지라도

그 길 위의 여행이 그 아이의 인생이라는 걸 받아들이려고 애써 노력하고 있다.


우리 반 벌집에 꿀이 또 가득 찼다.

‘요리’하고 싶다는 아이들.

며칠을 궁리하다 ‘카나페 만들기’를 했다.

딸기잼, 초코잼, 크림치즈를 크래커에 바르고 죠리퐁을 올렸다.

아주 간단한 거지만 손 씻고 책상 닦고

설명 듣고 순서대로 해보며 두 시간이나 걸렸다.

별것도 아닌 것에 재미있어하고 신나는 아이들.

락앤락 통에 지퍼백에 담아 보냈다.

“집에 가서 과일 올려서 먹을 거예요.”

“이건 엄마, 이건 형 줄 거예요.”

환하게 웃으며 하교하는 아이들.


부모님들께 이 말은 꼭 전하고 싶다.

씩씩하게 가방 메고 학교에 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효녀 효자라는 사실을.

그리고 되도록 기싸움은 하지 말라는 말도.

왜냐면 100프로 부모가 지게 돼 있다.

맨날 아이에게 끌려다니란 말이냐고?

그럼 난 교과서 같은 말을 해드리고 싶다.

“아이의 감정은 받아주되 원칙은 단호하게”

(물론 나도 내 아이들한테는 이게 잘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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