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에 등장한 대통령거부권

"쉬는 시간 지켜달라" 법률제정 나선 국회의원 아이들

by 포롱

-제3회 꿈나라 국무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주십시오.

국기에 경례!!

(참고로 우리 반 이름은 ‘꿈나라'다.

모든 학생은 직업이 있고 월급을 받는다)

사회를 맡은 남녀 회장 모습이 사뭇 진지하다.

열정 최고치 꿈나라 국민들

힘차게 애국가를 불러 젖힌다.

3월 첫날 눈치 보며 고요했던 시간이

신나고 재밌는 활동으로 바뀌었다.


-지난주 생활에 대해 간단한 반성을 해주십시오.

**이가 손을 번쩍 든다.

-지난 일주일간 꿈나라는 평화롭게 잘 지낸 것 같습니다.

각자 직업에 충실하였고 법 위반 친구도 거의 없었습니다.

-다른 분들은 하실 말씀이 없으십니까?

네, 그럼, 부서별로 지난주 계획했던 주생활 목표를

부서원들과 반성하시고 다음 주 새로운 목표도 토의해 주십시오.


재경부, 행안부, 환경부, 생활부로 나누어져 삼삼오오 회의를 시작한다.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를 주고받다 까르르 웃는다.

반성 학생으로 지목당한 **가 항변한다.

“선생님, 엑스표 4개라고 저보고 반성 학생을 하라는 건

너무 한 거 아닌가요?

안 그래도 신용등급 내려가서 속상한데 이걸 왜 또 반성하라는 건지

전 억울합니다.”

옆 부서원이 끼어든다.

“아니, 이건 다 너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 그러는 거야.

너를 비난하는 게 아니라고!!”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교사 말투를 그대로 배우는 아이들.

잔소리를 시작할 때면 나의 시작 멘트는 늘 이렇다.

“너희들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쓴소리를 좀 하겠다.”


부서별 부장들의 주별 반성과 다음 주 계획이 발표됐다.

회의가 서둘러 마무리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장관들의 국무회의가 끝나면 바로 국회의원 25인으로 변신해

꿈나라 법안들을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꿈나라’ 국회 본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복도 질서법’을 제안해 주신 **님 나와주십시오.

<**는 며칠 전부터 법률 제안서를 작성하고 친구들에게 찬성 서명까지 받았다. 상임위(교사+회장단 회의)를 통과한 법안은 드디어 본회의에 상정됐다>

-최근 꿈나라 국민들이 복도 이동 때 무질서한 모습을 보이며 다른 반 수업을 방해하기도 하고 본인도 다칠 위험이 있는 행동을 보이고 있습니다. ‘복도 질서법’을 만들어 벌금을 부과했으면 좋겠습니다.

-네, **님의 의견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의원님들 자유로운 토론을 해주십시오.

-복도 질서법을 반대합니다. 이 정도면 잘 지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괜히 또 법을 만들면 지켰니 안 지켰니 분란만 커질 것입니다.

-저도 반대합니다. 법 규칙 위반을 누가 판단하고 벌 줄 겁니까? 우리 반에는 지금 경찰직업도 없지 않습니까?

-저는 찬성합니다. 솔직히 선생님이 인솔할 때는 줄도 잘 서고 우측통행도 잘하지만, 선생님이 인솔을 안 할 땐 엉망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찰 직업을 만드는 대신 학급 회장이 그 역할을 하면 될 것입니다.

-복도 질서법을 반대합니다. 빨리 걷는 거도 뛰는 거로 생각할 수도 있고 과속 측정기도 없는데 무슨 기준으로 걷기와 뛰기를 판단할 수 있단 말입니까?

-**님은 이렇게 걷는 거와 이렇게 뛰는 거를 구분하는 게 어렵습니까?

바봅니까?

-**님, 인신공격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자리를 뛰쳐나와 시범까지 보이며 흥분한 의원에게 회장이 경고를 날린다.

-자, 이 정도면 충분한 토론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니 찬반투표를 하겠습니다.

찬성하시는 의원님들 손을 들어주십시오.

-하나, 둘, 셋, 넷...

재적의원의 과반수를 훌쩍 넘겼으니 복도 질서법은 통과되었습니다.

땅·땅·땅!


-두 번째 법안 제안하신 **님 나와주십시오.

-제가 제안한 ‘신용등급 알파 드림 법’은 1등급 국민에게 혜택을 더 주자는 법입니다. 솔직히 열심히 생활해서 꼭대기까지 올라갔지만, 예금금리 혜택 외엔 별 이점이 없습니다. 그래서 매주 1등급을 유지하면 대통령이 3드림 정도라도 격려금을 줬으면 좋겠습니다.

친구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여기저기서 의사 발언을 신청하는 아이들.

낮은 신용 등급자는 월급 많은 직업도 선택 못 하는데

혜택이 없다니 말이 되냐,

빈부 격차가 더 벌어져 갈등이 깊어질 것이다,

그리고 대통령이 주는 격려금도 결국 우리 세금인데

그 귀한 돈을 왜 막 쓰게 하냐는 둥 반론이 들끓었다.

그때 **가 손을 번쩍 든다.

-저는 ‘신용등급 알파 드림 법’ 찬성합니다.

솔직히 1등급 유지하는 것은 칭찬해줘야 합니다.

지금 9등급까지 떨어지는 국민들도 있는데

혜택을 더 줘야 올라올 마음이 생길 것 같습니다.

격려금까지는 아니지만 다른 방법이라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찬반투표 결과 ‘신용등급 알파 드림 법’은 부결됐다.

하지만 법 제안자의 논리와 근거가 일리 있다는 말과 함께

조만간 은행 대출제도를 만들어

고신용 등급자에게 혜택을 주는 방안을 고민하겠다고 말했다.


오늘의 핫이슈 ‘쉬는 시간 인권법’ 제안자 **가 등장했다.

나도 덩달아 긴장이 됐다.

-3월부터 사실 대통령께서는 쉬는 시간을 제대로 지켜주지 않고 있습니다.

3월 말 한 달 평가하실 때 노력하시겠다고 해놓고선

여전히 쉬는 시간까지 수업하실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쉬는 시간 보장을 요구하는 법을 제안합니다.

선생님께서 1분 더 수업하시면 두 배로 2분 쉬는 시간을 주셔야 하는

‘쉬는 시간 인권법’을 제안합니다.

-옳소! 옳소!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건 토론할 필요도 없어요. 그냥 찬반 투표 부쳐요!!

-맞아요. 이 법안 반대하시는 분 있나요? 없죠? 없죠?

그때 **가 손을 가만히 든다.

쟤가 무슨 말을 하려나?

평소 너무 조용한 **이라서 아이들도 나도 놀란다.

-쉬는 시간까지 공부하시는 선생님은 유현미 선생님 말고도

다른 교과 선생님들도 많이 그러십니다.

다른 선생님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담임선생님께만 이런 법을 요구하는 건 말이 안 됩니다.

분위기 쏴~해진다.

앗싸, 그래 이런 녀석도 한 명쯤은 있어야지.

바로 반격에 들어오는 아이들.

-아니, 다른 선생님께 말 못 한다고

우리가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맞아요. 맞아요.

더 이상 토론이 필요 없다는 듯 찬반투표에 들어간다.

찬성 24표, 반대 1표로 ‘쉬는 시간 보장 인권법’은 일사천리로 통과됐다.

그때 거짓말처럼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제3회 국무회의와 국회 법안처리를 끝내겠습니다.


아이들은 보란 듯 나를 쳐다본다.

어라, 요놈들 제법이네?

“알겠습니다. 국민의 뜻은 알겠습니다. 충분히 고민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대통령거부권이 있다는 것은 배워서 아시죠?”

헐, 황당해하는 표정들.

“거부권을 행사하시겠다고요?”

똘똘한 한 놈이 큰 소리로 외친다.

“선생님? 거부권 행사해도 소용없어요.

표결 결과 24대 1인데 2/3 찬성 훌쩍 넘어요.”

“그럼 그럼.”

의기양양한 표정의 아이들.

만장일치로 법안 통과 기준 바꾸면 쿠데타라도 일으킬 분위기다.

아무것도 모르는 저학년이 좋았다.

그런데 이 뿌듯함은 무엇인가?

선생님과 부모님이 정답인 줄 알던 꼬맹이들이

어른을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것,

괘씸한 기분이지만 축하할 일이다.

한 달간의 사회 수업이 헛되지 않았다.

민주사회 시민의 비판의식을 제대로 적용하고 있다.

학급 자치활동을 통해 아이들은 스스로

사회 질서를 만들어 가고

자기 권리를 당당히 요구하는

성숙한 모습으로 성장하고 발전하고 있다.

내가 바라던 바다.


공격받는 선생님이 안쓰러운지 **이가 가만히 다가왔다.

“선생님, 대통령은 그래도 자기 당 국회의원이 있잖아요.

우리도 당을 만들면 선생님 편이 생기지 않을까요?”

풋, 귀여운 녀석.

“아냐, 그렇긴 한데 너무 복잡해.

그래도 고마워. 내 입장 생각해 줘서.”

음~

상황이 재밌어졌다.

하지만 배움은 계속되어야 하므로

나의 다음 스텝은!!

바로 이거다!


“꿈나라 국민 여러분!

민심은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동안 쉬는 시간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한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변명해 보자면 3월 말 ‘내 마음보고서’에서 지적받고 쉬는 시간을 철저히 지키려고 노력했지만, 일부 교과목의 경우 수업 시간이 학습량에 비해 터무니없이 부족하고 또 더 많이 가르치려는 욕심을 부렸습니다. 활동 중심 수업을 설계한 경우 이런 일이 특히 많았습니다. 수업을 더 재밌게 하려는 저의 과욕이 지금의 참사를 불렀습니다. 앞으로 연구를 더 많이 해서 40분 수업에 딱 맞는 설계를 해보겠습니다. 간곡히 부탁하는 바 4월 한 달은 더 지켜보시고 판단해 주십시오. 여러분의 쉴 권리를 최대한 존중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쉬는 시간 인권법’ 대통령거부권을 행사합니다. 부디 의원님들께서 재의결할 땐 반대표를 던져서 이 법이 통과하지 않도록 부탁드립니다. 법을 만들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성숙한 민주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서로 양보와 타협의 과정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방적인 한쪽만의 독주는 또 다른 독재사회라고 생각합니다. 부족한 제가 노력하겠습니다. 부디 의원님들께서는 현명한 판단을 내려 투표해 주십시오. 국민 여러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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