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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종찬 Nov 15. 2023

촉도난, 잔도의 역사

잔도

#Jam있는중국이야기-950 “촉도난,잔도의 역사중국,중국인


아~후~. (噫吁戱)

험하고도 높구나! (危乎高哉)

촉 가는 길은 하늘을 오르기보다 어렵구나. (蜀道之難難于上靑天)


잠총과 어양 같은 촉왕이 (蠶叢及魚鳧)

나라를 연 것은 어찌 아득한지, (開國何茫然)

개국 이래 4만8천년에 (爾來四萬八千歲)

결국 진나라 변방과 인적이 통했네. (始與秦塞通人煙)


서쪽에 타이바이산으로 조도가 있어, (西當太白有鳥道)

어메이산 꼭대기를 가로 지르네. (可以橫絶峨眉巓)

땅이 붕괴되고 산이 무너져 장사가 죽으니, (地崩山摧壯士死)


비로소 구름다리와 돌길이 놓였네. (然后天梯石棧方鉤連)

위로는 육룡이 해를 둘러싼 꼭대기 표시가 있고, (上有六龍回日之高標)

아래는 부딪치며 거슬러 흐르는 하천이 있네. (下有沖波逆折之回川)


황학이 날라도 이르지 못하고, (黃鶴之飛尙不得)

원숭이가 건너도 나무 잡을 걸 걱정하네. (猿猱欲度愁攀援)

칭니고개는 어찌 그리 돌아가나, (靑泥何盤盤)

백 걸음에 아홉 꺾어 바위 봉우리를 감싸네. (百步九折縈岩巒)


 

쓰촨성 장요시 칭롄진 이백고리에 조성해 놓은 ‘촉도난’ 시벽.


이 시는 당대 이백이 지은 ‘촉도난(蜀道難)’ 앞부분이다. ‘촉도난’은 기본 형식을 파괴한 채 풍부한 상상력과 과감한 표현이 어우러진 낭만주의 시로 유명하다.


​실제로 시 첫 구절은 세 마디의 감탄사로 시작한다. 오언, 칠언 등 율시 형식을 완전히 해체했다. 내용도 정통 당시와는 전혀 다르다. 잠총과 어양은 4세기에 쓰인 중국 서남지역의 종합지리서 <화양국지>에 등장하는 고촉의 군주들이다. 정통 역사학계에서는 이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땅이 붕괴되고 산이 무너져 장사가 죽으니’라는 구절도 <화양국지>에 나온다. 진혜왕이 촉왕을 홀리기 위해 다섯 미녀를 바치는 이야기가 모티브다.


당대 화가 이소도가 그린 ‘명황행촉도(明皇幸蜀圖)’. 안사의 난을 피해서 쓰촨으로 가는 당 현종의 모습을 그렸다.


촉왕은 미녀들을 맞아하기 위해 다섯 명의 장사를 파견한다. 그들은 촉으로 돌아오는 도중 험한 산 속에서 거대한 뱀을 만난다. 다섯 장사가 용감히 맞서 싸웠으나 뱀이 요동치는 바람에 땅이 무너지고 산이 붕괴되어 모두 압사하고 말았다.


‘위로는 육룡이 해를 둘러싼 꼭대기 표시가 있고’라는 구절은 쓰촨성 출신 유안이 쓴 철학서인 <회남자(淮南子)>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렇듯 ‘촉도난’은 쓰촨의 지역적 배경과 현지 스토리가 풍부하게 담겨져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백의 고향이 쓰촨이기 때문이다. 이백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지금의 장요(江油)시 칭롄(青蓮)진으로 이주해서 성장했다.


그렇기에 이백은 고향인 쓰촨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촉도난’은 단순한 낭만 시가 아닌 고향의 역사와 전설, 지리지세를 한 편에 담은 서사시라고 할 수 있다. 730년 서른살의 이백이 장안(長安)에서 지은 걸작이다.



‘비로소 구름다리와 돌길이 놓였네’라는 구절은 또 다른 역사를 담고 있다. 여기서 돌길은 잔도(棧道)를 가리킨다. 잔도는 기원전 상주시대부터 쓰촨과 산시(陝西)를 잇기 위해 조금씩 뚫었다.


기세가 가파른 절벽과 험난한 협곡에 건설한 길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 길이가 사마천이 <사기>에서 ‘잔도는 천리로 촉한으로 통한다(棧道千里通於蜀漢)’라고 묘사할 정도로 길었다.


그렇다면 잔도는 어떻게 건설했을까?

첫 번째는 절벽을 일일이 뚫고 깎아서 돌길을 내는 방식이다. 이 과정에서 망치, 정 등 원시적인 공구만 사용해서 공사 난도가 컸다. 게다가 공사 중 끊임없이 절벽을 두드려야 했기에, 산사태가 일어나서 인부들이 비명횡사하는 사고가 많이 일어났다.


두 번째는 나무로 잔도를 만드는 방식이다. 먼저 벼랑에 일정한 간격으로 구멍을 뚫는다. 그 뒤 준비한 나무봉으로 박고 엮어서 튼튼한 지지대를 세운다. 그 위에 널빤지로 길을 만든다.


보통 공사는 이런 작업이 동시에 이뤄지면서 서서히 전진했다. 이 두 번째 방식으로 잔도를 건설했던 대표적인 이가 제갈량이다.


무후사에 전시 중인 한대 청동 기마용. 제갈량의 잔도를 군마가 다닐 수 있을 만큼 튼튼했다.


227년 제갈량은 북벌을 구상한 뒤 후주인 유선에게 ‘출사표(出師表)’를 바쳤다. 그 뒤 처음 진행했던 작업이 잔도의 건설이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위나라를 치기 위해서는 대규모 병력과 군마, 수레 등을 이동시켜야 하는데, 기존의 돌길로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채용한 것이 나무잔도였다. 사실 나무잔도는 이전부터 있었다.



하지만 제갈량은 이를 진일보시켰다. 군마, 수레 등이 다닐 수 있도록 지지대의 간격을 더욱 좁게 했고, 잔도의 폭을 넓게 했다. 그 덕분에 촉나라의 20만 대군은 나무잔도를 이용해서 무사히 산시성으로 진입했다. 위나라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허를 찔린 셈이었다.


제갈량이 고안했던 나무잔도는 쓰촨성 광위안(廣元)시 외곽에 있는 밍유에샤(明月峽)에 옛 흔적이 남아있다. 밍유에샤는 자링강(嘉陵江)을 끼고 있는 협곡이다. 또한 옛날부터 쓰촨과 산시를 잇는 중요한 요지였다.


따라서 ‘잔도의 박물관’이라고 불릴 정도로 다양한 잔도가 남아있다. 나무잔도는 제갈량 때 뚫은 지지대를 바탕으로 후대에 꾸준히 보수한 것이다.


문화는 아는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끼며

느끼는 만큼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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