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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완느 Oct 22. 2024

“엄마가 아이를 못 믿어서, 아이가 불안한 거예요.”

불안의 서문을 열다.

12월 어느 날, 아이와 함께 택시를 타고 한 아파트 앞에 내렸다. 아이가 네 살이 되면 어린이집을 꼭 보내겠다는 결의와 함께,

이제 더 이상 남편의 반대에 마음 흔들리지 않겠다고 견고한 다짐까지 하고선 발걸음을 옮겼다.


상담 시간 보다 이르게 도착해서 놀이터에서 놀며 어린이집 하원 시간을 지켜보게 되었다. 한 선생님이 아이들 하원을 담당하시는지, 연신 웃는 얼굴로 여러 명의 엄마들을 마주하고 계셨다. 원장 선생님이실까, 참 다정하게 인사를 해주시는구나 싶었다. 그 선생님은 원장선생님이 아니라 훗날 아이의 담임 선생님이 되었다.


약속된 상담 시간에 되어 어린이집으로 들어갔다. 추웠던 겨울의 햇살에 비해 한참 어두운 실내였다. 안내된 방은 원에서 가장 작고 어두웠다. 주위를 둘러보니 나무로 된 자연물 장난감과 천으로 만든 몇 가지의 장난감들이 있었다. 그리고 수화기 건너 목소리의 원장님을 처음 뵙게 되었다. 한 시간여를 원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시고 간간이 내게 질문도 곁들이셨다. 먼 거리에도 원을 찾아온 연유를 궁금해하셨던 모양이다. 아이가 학교 가기 전에, 부모 이외에 믿을 만한 어른을 만들어주고 싶어 이 원을 선택했다는 답을 건넸다. 졸업 때까지 담임 선생님과 친구들이 바뀌지 않고, 외동인 아이가 통합반으로 연령 차이가 나는 아이들과 함께 섞여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보내기로 마음먹었던 터였다. 무엇보다 아이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 줄 것 같았던, 발도르프를 지향하는 어린이집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이가 이 원에서 졸업까지 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나올 무렵, 원장님은 웃으며 답했다.


"제가 언제 문을 닫을지 저도 잘 몰라요."


이때 알아차렸어야 했다. 정말 언제든 갑작스럽게 문을 닫겠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을.


아이가 엄마와 떨어진다고 해서 불안을 느끼는 아이였다는 걸, 이 원을 보내면서 알게 되었다.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을 하고서야 돌이켜보면, 이 원이었기에 아이가 불안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인들 지나고 보면 후회가 남기 마련이지만, 그때는 원장님의 무례했던 태도를 그저 내가 부족한 사람이기 때문이라 여겼다.  내가 아이를 잘못 키우고 있는지, 끊임없이 자기 검열의 시간으로 스스로 틀 안에 가두기 시작했다.


원장님은 끊임없이 엄마들을 불러, 각각 아이들의 문제점을 나열하고선 엄마의 양육 문제로 돌렸다. 교직 생활을 오래 해오신 분이니, 엄마들을 학생들처럼 가르쳐야 할 대상으로 여기셨다. 늘 지적하고 조언이라는 이름으로 필요치 않은 순간 뜬금없이 호출을 하신다. 그리고 세세한 발달 이정표를 촘촘하게 나열하시곤 했다.


내 아이가 엄마의 곁에서 떨어져 불안을 느끼는 아이라는 걸, 이 어린이집 원장 선생님의 입으로 전해 들으며 나는 세뇌되어 갔다. 나의 아이는 불안이 높은 아이라고. 이전까지 꼬박 3년을 양육하며 내 아이에게 느껴보지 못했던 것을 타인의 입으로 끊임없이 전해 듣고 있었다. 남편과 시댁과의 관계로 죽을힘을 다해 키워 내고 있었던 나의 전부를 부정하며, 적응에 시간이 걸리는 아이를 내 잘못 마냥 비난의 화살을 마음속에 꽂기 시작했다.


한 달쯤은 적응에 기다려 줄 것처럼 이야기하더니, 일주일이 지나고 결국은 여느 어린이집처럼 아이를 강제로 떼어 놓고 나가라고 했다. 너무 울면 감당하기 힘드니 근처에서 대기하라는 말과 함께, 때로는 아이가 적응을 못한다며 엄마가 우울증인 것처럼 치부하며,


내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 집에서 뛰어놀며, 계절의 흐름대로 메주를 만들고 모내기를 돕고, 가을이면 옥수수를 따고 콩을 따며, 추수한 벼를 널어 말리던 그때 그 시절의 감성들을 아이에게도 느끼게 해주고 싶어 선택했던 발도르프 교육이었다. 자연스럽게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발도르프가 정해주는 아이의 발달 기준으로 아이를 틀에 끼워 맞추려고 했던 것이었다는 걸, 이곳에도 세상의 평균이라는 기준이 엄연하게 존재했다. 때로는 더 세세하고 엄격하게.


아이의 틱이 발현되고 나서도 내가 그만두지 못했던 이 어린이집. 밤 11시가 넘어서까지 문자를 보내며, 자기네를 믿어달라고 했던 어린이집, 심지어 자기와 친구가 되자던 원장님. 지금 생각해 보면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 이상한 내용을 내가 왜 그 순간마저도 의심하지 못하고 나를 탓했을까.


"엄마가 아이를 못 믿어서, 아이가 불안한 거예요."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들판에서 산책하며 잘 놀고 있는 아이를 보며 원장님은 나에게 말을 건넸다. 나에게 첫 포문을 열었던 불안함의 꼬리표. 아이가 어린이집 다니는 내내 꼬리표처럼 달고 다녔던 불안함. 그 불안함이라는 단어를 숱하게 나에게 반복하며 세뇌시킨 탓에, 나조차도 불안함으로 잠식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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