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불안'이라는 단어를 가깝고도 깊숙하게 느낀 건 출산 후 아이의 기질을 파악하면서부터였다. 아이가 두세 살 영유아기 시절, 육아 콘텐츠 회사의 대표가 하는 인스타그램의 라이브 방송을 접하기 시작했다. 학창 시절, 독서실에서 자정 무렵 귀에 꽂아둔 이어폰에서 잔잔히 흘러나오던 라디오 방송과 같은 그때 그 시절의 친근함이었다. 육퇴 후 밤 11시, 엄마 계층의 사람들이 온라인에 모여 나누는 친밀하고도 사적인 수다였다. 육아 콘텐츠 대표는 나와 나이대가 비슷한 또래이자 같은 엄마이기도 했고, 어쩌면 내 얼굴을 모르는 익명성을 담보로 하고 있어 시시콜콜하고 사적인 이야기를 가감 없이 나누었던 자리가 아닌가 한다. 그 시절 육아의 고충들을 나누며 '기질'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하면서, 아이에게 나타나는 여러 양상이 불안의 모습임을 알게 되었다. 그 이후 몇 차례의 심리검사 결과 나도 매우 불안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참 의외였다. 불안이라는 단어를 접했을 때만 해도 한때의 일시적인 현상이라 생각했다. 결혼 후 합가로 인한 심리적 스트레스에 출산과 동시에 남편이 회사를 그만두고 자영업의 길로 들어서면서 내 존재 자체가 매우 불안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한때의 일시적인 현상이라 여겼다.
지난 30년의 삶을 돌아보면 내 삶에 불안이라는 단어는 너무 낯선 단어였다. 늘 당당했고, 새로운 것에 별다른 두려움이 없었다. 학창 생활을 하면서 선생님의 부당한 대우에는 곧잘 내 의견도 피력했다. 학창 시절 이해할 수 없었던 문학 시험과 문법 시험의 답안에 이의를 제기했고, 내가 내세웠던 논리로 답이 인정되기도 했다. 대학도 원했던 곳으로 진학하게 되면서 부모와 떨어져 살기 시작했고, 독립을 통한 완전한 자유를 느끼기도 했다. 학창생활에서도 새로운 것을 배우는데 주저하지 않았었고, 이어지는 회사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원하는 목표가 있으면 늘 쟁취했다. 지금 생각하면 직책이 높은 상사와의 비즈니스적인 의견 교환도 스스름이 없었다. 돌이켜보면 당돌했던 건 아닌가 싶지만, 그 때 그시절 누릴 수 있는 풋풋한 당당함이 아니였을까 한다. 이런 내게 불안이라는 게 웬 말인가 싶었다.
결혼하고 나서 처음으로 내 의지대로 할 수 없는 것들이 있고, 잘 하거나 노력해도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게 있다는 것을 시어머니를 통해 알게 되었다. 스무살때 부터 부모와 떨어져 살며 학업도 마쳤고, 직장 생활도 하며 그렇게 결혼 전까지 12년간 혼자 살림을 해왔던 나를 시어머니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아이쯤으로 치부하고 싶어하셨다.나는 사람들을 만나 관계를 맺는 바탕에는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친구로서도, 학업을 함께 함에 있어서, 일을 함께 할 때에도 모든 관계의 바탕에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시어머니는 나에 모든 것을 못 미더워 하셨다. 지나간 세월 뒤돌아 보면, 어쩌면 아무것도 못하는 아이쯤으로 여기셔야 어머님의 마음이 편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늘 모든 게 어머니 손을 거쳐가야 만족스러워하셨다. 하물며 내가 건조대에 널어놓은 빨래마저 어머니의 구미에 맞게 다시 고쳐 널어놓으셔야 했고, 다해둔 설거지마저 다시 쳐다보시는 일도 종종 있으셨다. 남편과 나의 옷장에 속옷도 우리가 회사 간 틈을 타 다시 정리 해놓으셨고, 우리 부부 사이의 모든 것을 어머니 손을 다 거쳐 해주고 싶어 하셨다. 내가 회사 다닐 때 옷차림도 어머님 스타일과 달라 못마땅해 하셨고, 어느 것 하나 어머니 마음에 드는 게 없어하셨지만 겉으로는 괜찮은 며느리를 얻었다며 이야기 하시고는, 속내는 티 내지 않으려 무척 노력하셨던 것 같다. 아이를 출산하고 6개월을 친정에서 몸조리했던 시누이를 잊으셨는지 내게는 출산 후 3주간의 친정행도 그 이상은 머물러서 안된다고 선 그으셨다. 불교계로 스님이 있는 우리 집안은 무시하고 목사님 주례를 세우시더니, 결혼 후에는 나에게 상의 한마디 없이 남편이 없을 틈에 목사님을 집으로 불러다 아이와 내가 기도를 받게 하신 일도 어머님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이라 여기셨다. 남편과의 부부관계에서 피임을 하고 있는지 서슴없이 대화의 주제로 꺼내는 일이 잦았고, 어머님의 젊은 시절 몇 차례 낙태 이야기도 나와 주고받는 농담거리 마냥 쉽게 꺼내셨다. 남편은 결혼 전부터 끊임없이 내게 시어머니와 친구처럼 지내길 요구했지만, 나는 고작 1년 남짓 나를 봐오셨던 분이 남편을 사이에 두고 나와 경쟁을 하는 것처럼, 때로는 무시하는 것처럼 여겨져 도저히 남편의 요구를 수용할 수 없었다. 자식인 남편도 못하는 일을, 남으로 지내다 어느 날 갑자기 결혼과 동시에 가족이라는 사회적 관계를 맺은 사이에서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아니라 생각했다. 나를 믿지 못하고, 내가 노력 한 것들을 인정받을 수 없고,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고, 말해도 이루어질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걸 결혼과 동시에 이루어졌던 합가를 통해 느꼈던 것 같다. 좌절의 감정을 수차례 느끼고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것이 불안을 지피는 불씨가 되었다. 그 이후 남편은 나의 육아휴직과 동시에 회사를 그만두고 장사를 배우기 시작했고, 덩달아 재정상황은 불안했고, 분가의 여부는 불투명해졌고, 우리의 모든 것이 불안했다.
나는 말 수를 점차 줄였다. 차라리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인 양 지내는 게 편했다.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피력하는 순간 시어머니는 자신의 방식을 옳고 내가 말한 것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시려 애쓰셨다.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이상하게도 남편 집안의 사람들은 나보다 모든 것을 잘 하려고 애쓰시는 듯했다. 세월이 지나 개인 상담을 하면서 상담사 선생님을 통해 시어머니와 남편은 자신들이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나를 무시하는 방법을 택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집안과 학력의 차이에서 느끼는 마음속 갈등을 그렇게 표현하신 것이다. 그들에게 나는 겉으로는 무시하지만 속으로는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존재라는 상담사 선생님의 말이 마음속에 와닿았다. (그 순간 그 말이 내게 위안이 되어 마음속 깊이 담았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쯤으로 여겨지면 시어미니와 남편은 만족하는 듯했다. 밥도 반찬도 빨래도 아이를 돌보는 일도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쯤처럼 보이면, 시어머니는 모든 걸 다 해 줄 수 있는 것에 굉장히 만족해하셨다. 남편도 내가 직업을 놓으면서 수입이 없어지고 본인의 수입에 의존해서 사는 내 모습에 만족스러운 눈치다. 내가 남편보다 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고 수입이 높고 살림도 잘 꾸려나가면 본인들의 역할이 소멸되는 것처럼 그렇게 여기셨나 보다.
말 수를 줄여가면서, 내 생각을 표현하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 내 생각을 말하는 순간 묵살되고 틀린 것이 돼버리는 일들에 노출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갈등에서 파생되는 상처로부터 스스로 살기 위해 택한 방식이었다. 그리고 내적으로 혼자 모든 것을 다 해내고 완벽해지려 애썼다. 도움이 필요해도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다 생각했다. 부모가 반대할 만한 요소들은 모두 숨겨두고 겉모습을 포장해가며 내가 선택한 결혼이었다. 가장 힘든 순간에도, 나의 선택이 틀린 것이 되지 않기 바라는 마음으로, 어느 누구에게도 내 선택이 틀렸다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혼자 고군 분투했다. 1년 6개월 목표로 했던 분가는 6개월 만에 이루어졌고, 이혼의 위기는 친정에 들키지 않게 넘겼고, 시어머니에게는 그간의 일들을 절제된 언어로 표현하고 난 뒤 나를 더 이상 나를 무시하는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몇몇의 일들은 체념했다. 그러고서는 내 명의로 언제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돈을 마련해두기 시작했다.
이러한 세월을 5년 남짓 보내오는 동안 나는 혼자서 가장 완벽하고도 불안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불안의 모습은 나의 현재 상태와 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내향적이고 말수를 줄이고, 타인에게 지적받기를 두려워하며, 부족한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혼자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내려 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이라 여겼다.
어느 날, 지인과 커피 한 잔을 시켜 두고 이야기를 나누다 지인의 입에서 '나는 불안이 굉장히 높은 사람이에요.'라는 말을 듣고 속으로 내심 놀랐다. 외향적이고 사교적이며, 스스럼없이 친밀해지고 가까워지려 늘 노력 하는 사람이었다. 끊임없이 말을 하며 자신의 생각에 동의를 구하는 것이, 그 사람의 내적 불안을 해소하는 방식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