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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펠 Jun 19. 2024

밤과 꿈

밤 열한 시가 되었다. 창밖은 너무 조용해서 창문을 열어도 간혹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조차 크게 들린다. 전기 자동차가 절대적으로 많아지면 그 소리조차 잘 들리지 않을 텐데,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어쨌든 지금은 머릿속을 수많은 생각들이 제멋대로 흘러 다니는 시간이라 신경 쓰지 않는다.
책을 펼쳐서 한 페이지를 읽고 다음 장으로 종이를 넘기면 '휘릭' 하는 소리가 난다. 나는 그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물리적으로 그 소리라도 나는 것이 전자책 페이지를 넘길 때 소리 없이 한 번에 화면이 바뀌는 것보다는 낫지만 내가 생각하는 책이란 책상 위에 올려놓고 읽어야 하는 커다랗고 그 자체로 권위를 가진 듯한 위엄을 가진 무거운 물건이지, 감히 한 손에 들고 다른 한 손으로 페이지를 넘길 수 있는 작은 액세서리가 아니다. 그래서 책장을 넘길 때도 가벼운 신문지 소리가 아니라 묵직한 '펄럭' 하는 소리를 기대하게 된다. '펄럭'하는 소리가 나는 책은 본 적이 없다고? 요즘은 물론 그럴 것이다. 하지만 굳이 그 소리를 듣고 싶다면 스케치북을 넘겨 보면 된다. 작은 크로키 북 말고 학창 시절에 사용하던 8절 스케치북. 종이의 크기와 두께가 그 정도 되면 그런 소리가 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책은 제작도 어렵고 판매도 되지 않을 테니 찾기 힘들더라도 이해할 수 있다. 어차피 그런 책이 있다고 해서 관심도 없는 내용의 책을 구입할 건 아니니까. 어쩌면 그런 겉모습에 집착하는 것도 좋지 않은 습관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꿈속에서 책을 읽게 되면 꿈속의 책은 언제나 그런 질감을 가지고 있다. 중세의 책처럼 나무로 만든 표지에 종이들은 한껏 두워서 뻣뻣하게 펴져 있지 않고 조금이라도 쭈글쭈글해지기 시작하면 금세 덮지도 못할 정도로 앞뒤 표지 사이가 벌어지기 때문에 펴 놓지 않을 때는 항상 꽉 눌러서 덮어 놓을 수 있도록 자물쇠가 달려 있는 책. 꿈속에서는 중세 때처럼 성경이나 기도서가 아니라 단순히 전공서적이나 법전인데도 반드시 그렇게 되어 있다. 아마도 내 꿈이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책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겠지만, 사실 그렇게 오감이 즐거운 책을 보았어도 깨어나서 별 생각이 없었기에 매번 꿈 내용을 되짚어보았을 때에야 꿈속에서 그런 책을 읽다는 사실을 깨닫게 다.
현실에 그런 책이 있다면, 설사 읽을 수 없는 문자로 되어 있다고 해도 구입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 고서를 구입하는 사람들, 특히 희귀본을 구입하는 사람들 그런 생각으로 매입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몇 년 전에 국립중앙박물관 기념품샵에서 구입한 정선화첩 책자가 넘길 때 그런 소리와 느낌이 난다는 것이 떠올랐다. 정확하게 그 소리인 것도 아니고 종이가 두꺼운 것도 아니지만 제법 넘길 때마다 만족스러웠었다. 그림도 멋지고 설명도 충분한데 책 자체가 주는 만족감도 있다 보니 두 시간을 앞뒤를 꼼꼼히 넘기고 읽어 보며 보낸 적도 있다.
저녁에 맥주를 두 캔을 마셔서인지 생각이 너무나 자유롭다. 자야 할 시간이지만 잠을 자고 싶지 않다. 잠을 자지 않고 꿈을 꿀 수 있다면 재미있는 여행이 될 것 같지만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 오늘 잠이 들고 나서 재미있는 꿈을 꾸고 그 꿈을 내일 아침에 기억하기를 바라는 것이 더 현실적일 것이다. 재미있는 꿈과 재미있는 상상이 있다면 언제나 재미있는 꿈이 이긴다. 내가 어떤 상상을 하든 꿈의 엉뚱함을 이길 수는 없다. 한 번은 곰이 쫓아오는 꿈을 꾸었는데, 그것도 무척 무서웠지만 깨어나서 보니 그렇게 엉뚱할 수가 없었다. 꿈속에서 나는 중학생이었고, 학교 운동장 밖으로는 커다란 숲이 있었다. 숲 속에서 갑자기  한 마리가 튀어나와서 운동장에 있던 학생들이 모두 건물 안으로 달려가 피신했다. 운동장에서 아수라장을 보고 흥분한 곰이 운동장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난동을 피우다가 마침내 마지막 한 명까지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운동장이 조용해지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아이들을 쫓아다닐 생각을 다시 떠올렸다. 운동장에서 뭐라고 말을 하면서 건물로 뛰어 들어왔는데, 꿈에서조차 나는 '곰이 말을 할 수는 없으니 우는 소리가 어디에 울려서 그렇게 들린 거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복도에서 비명소리가 들리면서 아이들도 동요하고 한두 명씩 복도로 나가서 계단 쪽을 가 보고 뛰어다니기 시작다. 선생님 한 분이 소리 지르다가 갑자기 소리가 끊기자 우리 반 아이들도 흥분해서 모두 교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나도 복도로 나갔는데 아래층에서부터 울려 올라오는 곰의 목소리가 들렸다. 곰은 "나는 ㅇㅇㅇ(내 이름)을 잡으러 온 것이 아니다!"라고 외치면서 아이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었다. 참 친절한 꿈이기도 하지. 하지만 꿈이라는 자각이 없었기에 나는 분명히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고 소리가 들리는 반대쪽으로 뛰어갔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 뛰면서 뒤를 살짝 보자 곰이 막 우리 층(3층이었다)에 올라와서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나는 옆 교실로 들어갔고, 다시 뛰어서 뒷문 쪽에 기다리고 있다가 내가 들어온 앞문이 부서지는 것과 동시에 뒷문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곰이 다시 뒷문으로 뛰어오는 사이에 뛰던 방향으로 계속 뛰는 대신 다시 앞문을 지나 그 옆반의 뒷문으로 들어갔다. 혹시 눈치챌 수도 있으니 문은 닫지 않고 문 뒤에 숨어 있었다. 곰은 분명히 나를 따라온 것인데도 불구하고 뻔뻔하게도 "나는 ㅇㅇㅇ을 잡으 온 것이 아니다!"라면서 돌아다녔다. 아마 현실이었다면 곧바로 잡혀서 제물로 바쳐졌겠지만 꿈이라서 깨어날 때까지 문 뒤에 잘 숨어 있었다.
그렇다고 쫓기는 꿈이라도 좋으니 아무거나 재미있는 꿈만 꾸면 그만이라는 뜻은 아니다. 더운 낮을 지내고 밤이 되었으니 낮과는 다른 밤이 되었으면 싶었을 뿐이다. 아름다운 밤을 보내기에는 황홀한 꿈만한 것이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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