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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꿈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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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p L Oct 22. 2024

평화로운 밤

목적지가 멀지 않았다. 지하철역에서 내려 걸어가는 중이었다. 시간은 저녁 여덟 시쯤? 나는 그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그때의 나일뿐이고 지금 생각해 보면 비슷한 곳조차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문 닫은 가게들 사이로 편의점만 한 개 불을 켜고 있었다. 그 길은 오르막이었는데, 오르막길 끝까지 도착하자 큰 건물이 막고 있는 삼거리가 나왔다. 그 큰 건물 앞으로 내가 올라온 언덕을 향해 신호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나는 거기서 왼쪽으로 가야 했기에 그 커다란 건물 앞으로 지나가는 차량 신호등이 직진 신호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커다란 건물 앞의 신호등으로 가로지르는 신호가 파란불이 되어야 나도 왼쪽으로 길을 건널 수 있기 때문이다. 오르막길 신호등이 좌회전인 동안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검은 옷을 위아래로 입은 여자와 세미 정장을 입은 남자가 서로 팔짱을 끼고 내 옆에 서 있었고 내 뒤에는 껄렁껄렁해 보이는 남자 둘이 서 있었다. 이상하게도 우리 중 휴대폰을 꺼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세상에 휴대폰이라는 게 있는지도 알지 못하는 상태였던 것 같다.
신호가 바뀌자 모두 동시에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남녀 커플은 둘이 무슨 이야기를 소곤소곤하더니 횡단보도를 건너자마자 멈춰 서서 다시 오른쪽 신호등을 기다렸다. 그럴 거면 진작 오르막길 신호가 좌회전일 때 건널 수 있었을 텐데 무슨 일인가, 뭔가 생각난 게 있는 건가 아니면 혹시 저쪽으로 돌아갈 일이 생겼는데 건너가고 나면 이후로는 길을 건널 일이 훨씬 줄어드니 그 편을 택한 건가 하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다리가 걸려 넘어졌다. 그리고 일어나는데 바닥에 있던 철사가 내 손에 들려 있었다. 일어나면서 손에 잡히니 그냥 들고일어난 것 같은데 왠지 필요할 것 같아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도록 소매에 넣고 계속 걸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 옆으로 살짝 피하면서 돌아보았는데, 껄렁껄렁하던 두 놈 중 하나였다. 하나는 아직 뒤에서 걸어오고 있었고 하나는 나에게 다가오며 허리띠를 내 얼굴을 향해 휘두르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게 참 악랄했던 것이, 허리띠의 금속 부분이 내 얼굴에 맞도록 각도를 계산한 것이 틀림없었다. 어리둥절한 상태였던 나는 순식간에 시간이 마치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온 감정이 꿈 전체를 가득 채운 느낌이 들면서 분노에 휩싸였고 철사를 손 밖으로 빼어 그놈 얼굴을 향해 둘렀다. 나는 그놈의 허리띠에 맞지 않았지만 철사는 그놈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두세 번 휘두르고 나서 가던 길을 뛰어 올라갔는데 잠깐 돌아보니 두 놈이 나를 쳐다보며 함께 걸어 올라오고 있었지만 뛰지는 않고 있었다. 그때 나는 한 가게 앞에 벽돌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잠시 앉아서 쉬면서 그 벽돌을 가방에 넣었다. 어느 정도 올라와서 내가 앉아 있는 것을 본 아까 그놈이 다시 뛰어오면서 허리띠를 휘둘렀고 이번에는 내가 관자놀이를 맞았다. 꿈 속이라서 그런지 아픈 것은 몰랐지만 뜨거워진 느낌과 함께 순식간에 시선이 돌아가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약이 오른 나는 아까와는 다른, 단순히 꿈속을 가득 채우는 느낌이 아니라 꿈속 전체의 색깔을 빨갛게 바꿀 정도로 분노로 가득 차서 그놈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 분노가 그놈에게는 보이지 않았는지 그놈은 내가 다가오는 모습에만 당황을 잠깐 했을 뿐 다시 허리띠를 바꿔 잡는 것이 보였다. 나는 할 테면 해보라면서 그놈에게 철사를 던졌고, 철사를 휘두를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 뒤집혀 버려서 깜짝 놀란 사이에 가방을 그놈 머리를 향해 휘둘렀다. 가방도 던지는 줄 알았는지 옆으로 살짝 피했지만 나는 가방을 던진 게 아니라 휘둘렀기에 벽돌의 무게에 의외의 충격으로 그놈의 허리가 반쯤 휘어졌다. 나는 가방을 그대로 아래로 내렸다가 뒤로 돌리고는 다시 머리를 향해 내리쳤는데 순식간에 노가 사그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는 나도 깜짝 놀랐던 것이 입꼬리가 올라간 것이 스스로도 느껴질 정도로 활짝 웃고 있는 상태로 가방을 그놈의 머리와 어깨를 정확히 내리꽂고 있는 것이었다. 그놈은 이제 가만히 누워 있었고 어느 순간 불긋한 게 가방에 묻기는 했지만 멈출 수 없었다. 하지만 다섯 번인가 반복했을까. 더 하고 싶지만 팔이 아파서 쉬어야 하는지 잠깐 고민을 하면서 숨을 헥헥거리며 웃고 있는데 그놈의 일행인 놈이 다가오다가 놀라서 뒷걸음질 치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나는 계속 웃으면서 그놈을 보고 잠시 고민을 했는데, 잡아 놓은 놈을 계속 때리는 게 더 통쾌할까, 말리지 않은 저 놈까지 잡을까 하는 것이었다. 내 눈이 그놈과 쓰러진 놈을 번갈아 보는 것을 눈치챈 놈이 친구를 구할 생각도 안 하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내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쓰러진 놈은 쓰러진 놈이고 이상하게도 차가 한 대도 지나가지 않는 밤이었다. 아까 그 커플은 내가 공격받을 것을 알고 일부러 피한 것일까, 아니면 그 놈들이 이상해 보여서 피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전자라면 찾아내야 하지 않을까? 아니면 전자가 아니라도 전자가 아니었다는 대답을 들어야 할 것만 같았다. 어차피 다친 놈의 친구 놈을 운 좋게 만날 수도 있으니 어쨌든 되돌아가는 것이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시 뒤돌아 아까 건넜던 횡단보도가 나올 때까지 터벅터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가고 있어야 하는데 왠지 밝아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알람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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