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를 위한 샌드박스

by 우물안고래

나는 AI의 음성 기능을 좋아한다.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받아써주는 기능이다.
내가 이 기능을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잘 말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앞뒤가 맞지 않아도,
중간에 생각이 바뀌어도,
문장이 끝나지 않아도
말이 중간에서 끊기지 않는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배워왔다.
말은 잘해야 하고, 조심해야 하며,
되도록 정제된 상태로 내놓아야 한다고.
틀린 말, 어설픈 말,
정리되지 않은 말은
되도록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게 좋다고.


오죽하면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속담으로 남아 있을까.


문제는 그 과정에서
‘말’이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생각이 없어서 침묵하는 게 아니라,
말이 아직 정제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생각 자체를
머릿속에 가둬두는 경우가 많아졌다.


나는 최근
AI의 음성 기능을 사용하며
전혀 다른 말의 세계를 경험하고 있다.
정제되지 않은 말이라도 일단 하면 된다.


AI는

“그래서 요점이 뭔가요?”

라고 묻지 않는다.

말을 예쁘게 포장해서 가져오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저
일단 다 꺼내놓게 한다.


말을 하다 보면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자연스레 알게 된다.

머릿속에서 웅얼거리던 감정들이

'나는 사실 이게 서운했구나'
'나는 이 일을 정말 잘하고 싶었구나' 같은

문장이 되어 돌아온다


그러고 나서야,

빈틈이 보이고,
과한 부분이 드러나고,
무엇보다
내 목소리가
스스로에게 들린다.


이 경험은

방 청소와 닮아 있다.
서랍 안에 쑤셔 넣어둔 물건들은
그 안에 있을 때는
정리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바닥에 한 번 다 꺼내 놓으면
버릴 것과 남길 것이 보인다.
그제야
정리가 시작된다.


생각도 그렇다.
머릿속에만 있을 때는
그저 덩어리다.


정돈된 것 같지만
실은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나조차 모른다.


일단 말로 다 쏟아놓고 나서야
비로소
분류가 가능해진다.


내 생각을 날것 그대로 펼쳐놓고
하나씩 만져볼 수 있는 자리.


그래서 AI의 음성 기능은

사고를 위한 샌드박스에 가깝다.

아직 판단하지 않아도 되고,
아직 결론을 내리지 않아도 되는 공간.
엉킨 채로 두어도 괜찮고,
틀린 방향으로 흘러가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자리.


말이 결과가 되기 전에,
말이 말로 존재할 수 있는 구간.


생각은 머릿속에 있을 때보다
밖으로 나올 때 선명해진다.
그리고 그 선명함은
잘 말하는 데서 오지 않는다.


말이 시작되는 순간,
정리는 이미 시작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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