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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다다 Dec 29. 2021

눈은 괜찮다며 내리고

강릉살이2_강릉에 눈이 내리면

강릉은 2월에 눈이 1미터 넘게 온다는 이야기를 지인으로부터 들었습니다. 따뜻한 바다와 차가운 북동풍이 만나 만들어진 눈구름의 영향을 받는다고요. 그러나 기후변화의 영향 때문인지 요근래 눈이 잘 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작년 8월에 강릉으로 이사를 온 뒤 가장 많은 눈을 봤던 것은 올해 3월 7일이었습니다. 그때 약 10cm 정도 눈이 내렸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강릉에 올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부터 폭설이 내렸습니다. 제설과 추위로 고생하는 분들을 보면 그런 말을 하기 어렵기도 하지만, 산타의 선물 같기도 하게 밤새 눈이 내렸습니다.    

 


크리스마스 이전까지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던 일이 있었습니다. 최선을 다했다 할 수는 없지만 기대를 품고 있었습니다. 마침 며칠 전에는 창을 여니 매화가 피어있는 꿈까지 꾸며 기대에 두근 반 새근 반 하던 중이었는데, 아무 연락 없이 마지노선인 평일 금요일 저녁 12월 24일이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밤 9시부터 눈이 온다더니 오후 무렵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해 밤이 되자 눈으로 바뀌었습니다.      



눈과 관련돼 가장 좋아하는 시는 서정주 시인의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입니다.      



괜, 찬, 타, ……

괜, 찬, 타, ……

괜, 찬, 타, ……

괜, 찬, 타, ……

수부룩이 내려오는 눈발속에서는

까투리 매추래기 새끼들도 깃들이어 오는 소리, ……

괜찬타, ……괜찬타, ……괜찬타, ……괜찬타, ……

폭으은히 내려오는 눈발속에서는

낯이 붉은 처녀아이들도 깃들이어 오는 소리, ……     


(중략)     


괜찬타, ……

괜찬타, ……

괜찬타, ……

괜찬타, ……     

끊임없이 내리는 눈발속에서는

산도 산도 청산도 안끼어 드는 소리, ……          




문학 전공자인 친구들과 그런 말을 주고받곤 합니다. 자식이 문학한다고 하면 절대 안 시킨다고요. 아주 특출난 재능이 있지 않는 한 밥 벌어먹기 힘들 수 있으니까요. 실제로 문학 전공을 마친 뒤 실용적인 다른 대학을 다시 들어간 친구들도 몇 있습니다. 예술대생의 비애 같은 것이지요. 그래도 문학을 전공해서 눈이 오면 서정주의 시를 떠올릴 수 있으니 좋은 게 아닐까 하지만, 그보다는 내가 받았던 수업을 우리나라 학생들에게 교양으로 잘 가르치면 사람들 사는 데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대학생들보다는 고등학생 때 책을 읽고 생각하고 말하고 글 쓰는 수업을 계속 해서 이해도와 표현력을 높인 다음 자기 학문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교육 체계가 성숙해지면 좋겠다는 게 우리나라 교육에 대한 바람입니다. 하지만 정말 나를 교육부 장관을 시켜준다고 해도 이런 교육체계를 도입할 수는 없겠지요. 지금까지 쌓인 많은 시스템과 그 사이사이의 교육 관련 이해세력들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세상은 바뀌기 어렵구나, 피비린내 없는 혁명은 더 어렵구나 알만큼 나이를 먹게 된 것도 같습니다.  

괜찮다고 내리는 눈을 보며 크리스마스날 밤새 앉아 있다가 또 하나 듣게 된 소리가 있습니다. 쌓인 눈에 나뭇가지가 툭, 툭, 부러지는 소리입니다. 장석남 시인의 시를 보다 그런 소리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실제로 이번 생에 처음 들어본 소리입니다. 지금까지는 이렇게 많은 눈이 오는 날 나무가 많은 데서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요.      


폭설

-山居     


밤사이 폭설이 내려서 소나무 가지가 찢어지는 소리

폭설이 끊임없이 아무 소리 없이 피가 새듯 내려서 오래 묵은 소나무 가지가 찢어져 꺾이는 소리, 비명을 치며

꺾이는 소리, 한도 없이 부드러웁게 어둠 한 켠을 갉으며 눈은 내려서 시내도 집도 인정도 가리지 않고 비닐하우스도 폭도도 바다도 길도 가리지 않고 아주

부드러움이 저렇게 무겁게 쌓여서

부드러움이 저렇게 천근 만근이 되어

소나무 가지를 으깨듯 찢는 소리를

무엇이든 한번쯤 견디어본 사람이라면 미간에 골이 질,

창자를 휘돌아치는

저 소리를

내 생애의 골짜기마디에는 두어야겠다     


사랑이 저렇듯 깊어서, 깊고 깊어서

우리를 찢어놓는 것을

부드럽고 아름다운 사랑이 소리도 없이 깊어서

나와 이웃과 나라가 모두, 인류가

사랑 아래 덮인다

하나씩 하나씩

한 켜씩 한 켜씩 한 켜씩

한 자씩 두 자씩 쌓여서

더 이상 휠 수 없고 더 이상 내려놓을 수 없고 버틸 수 없어서 꺾어질 때, 찢어질 때, 부러지고 으깨어질 때 그 비명을 우리는 사랑의 속삭임이라고 부르자     


(후략)     



장석남 시인의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시집에 있는 시를 보고 나무가지가 쌓인 눈에 찢기는 소리는 어떤 걸까 했는데, 밤새 나뭇가지가 툭, 툭, 툭, 부러졌습니다. 이웃들도 다 같이 SNS에 그 소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크리스마스, 사랑을 전하러 예수가 왔다는 밤이었습니다. 교회를 다니지도 않고 신을 믿는다고 말하기도 어렵지만, 왠지 어쩔 수 없이 경건해지던 크리스마스 밤이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눈 구경을 나오니 세상은 온통 하얗더군요. 멀리서 마실 나온 동네 개를 보며 아니, 저 녀석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아저씨가 얘기하시기도 하고 부러진 나무 몇 그루도 보였습니다. 파도는 세차고 세상은 하얗게 얼어붙은 채 미끄러웠습니다. 미끄럽다는 형용사와 함께 현실로 돌아온 것이죠. 마침 크리스마스라 바다로 눈 구경하러 온 차들이 차도에 그냥 주차를 하는 바람에 이웃친구가 면사무소에 전화해 그 차들이 정리되기도 하는 풍경을 보는 현실이요. 인도와 차도가 구분되지 않는 데다 제설차가 쓸어놓은 눈이 길옆에 쌓여 더는 바닷가를 걷기도 어려워졌습니다.     


순포습지는 그런 날 가기 좋은 눈 왕국입니다. 순포습지는 원래 경포호와 같은 석호인데, 농경지화되었던 곳을 2016년 습지 복원 사업을 통해 복원하고 데크를 깔아둔 사천면 산대월리의 습지입니다. 대부분 사람이 없어 한적해 순긋해변에 놀러갔다가 종종 걷곤 하는데요. 이번에도 순긋해변에 있는 친구네 게스트하우스에 갔다가 인근 순포습지나 한 바퀴 걸을까 하고 갔다가 눈밭 트레킹을 제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순포습지는 바로 해안도로 옆에 위치해 있어 일반적인 경우에는 인도나 자전거도로로 걸어가면 되지만 눈이 다 쌓여버려 차도를 걸을 수밖에 없어 고난이도이긴 했지만, 어렵게 도착한 순포습지는 겨울왕국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도착하자마자 소리를 질러대며 동네 강아지마냥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원래 한 바퀴 습지를 돌아나오도록 되어있는 코스는 눈 쌓인 나무가 휘어져 길을 막아 더는 걸을 수 없어 돌아나오고 말았지만, 눈이 온 강릉에서 눈밭 트레킹을 하고 싶을 때 가면 좋은 곳입니다.      

아흔아홉칸 집 선교장도 눈이 온 강릉에 가기 좋은 곳입니다. 고드름을 하염없이 드리운 옛날 가옥들이 늘어서 있지요. 기와지붕에도 초가에도 고드름이 맺혀 있습니다. 선교장의 활래정이나 허난설헌 생가를 보면 이런 데 있으면 절로 글이 나올 수밖에 없겠다며 배가 아파하곤 하는데요. 선교장은 배롱나무에 꽃 폈을 때 가면 가장 좋을 곳이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눈이 온 날 가서 고즈넉하게 즐기는 것도 좋습니다.      


눈이 오고 4일이 지났지만 여전히 눈앞의 세상은 하얗습니다. 선자령 부근이 희끄무레한 것을 보니 대관령 쪽으로는 또 눈이 오고 있는 듯 합니다. 오늘 오전에는 창밖을 보다가 눈을 덮고 누웠던 대나무가 바람에 눈을 털고 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눈이 많이 와 집앞 대나무가 다 누워 갑자기 보이지 않던 길이 보여 눈이 온 풍경이란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도 해주는구나 싶었는데, 오늘 바람에 흔들리는 게 뭔가 하고 보니 대나무가 눈을 털고 일어서고 있었습니다.      



눈 내리는 새벽에는 아파트 놀이터에서 누군가 새벽에 썰매를 타더니 또 오늘 보니 누군가 눈사람 하나를 만들어놓았고 고양이 한 마리가 그 근처를 서성입니다.      



세상의 누군가들에게 괜찮다며 눈이 내리고 누군가 제설을 하고 누군가의 일들 속에서 한 해가 가고 있습니다. 배 아픈 가수 이승윤 씨가 세상에 떠오른 데는 많은 사람들이 그와 비슷한 마음인데 그것을 세상에 꺼내어 솔직하게 보여준 때문인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나도 비슷하게 배 아픈 사람이었나, 돈을 벌어야 한다는 핑계인지 책임인지 모를 것과 하고 싶은 일들 사이를 방황하는 사이 많은 시간이 흐르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못하게 내 시간을 뺐는 그런 일들이 싫을 때가 많았는데 그래도 뭐라도 해야할 때 할 수 있다는 것도 감사한 게 아닌가, 실제로는 시간이 없어서뿐 아니라 의지나 그런 게 부족할 때도 많았고, 두려웠고 그런 게 아닐까 하면서요.     



다음 해에는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살아야지 다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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