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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다다 Mar 05. 2022

자본주의 사회 속 지방에서 살아간다는 것

바람아 제발 멈춰라

사람은 어떤 당위와 만족 사이를 헤맨다. 지금 시대의 당위는 자본주의다. 만족은 온전히 내 감정이다. 지금 우리는 자본주의와 내 감정 사이를 헤맨다. 어떤 날은 자본주의 세계의 물건을 사는 것으로 만족이 찾아오기도 한다. 자본주의 세계의 식당에서 맛있는 한 끼를 먹는 것으로 만족이 찾아오기도 한다. 그 만족감은 그 식사의 가격보다는 어떤 분위기, 맛 같은 수치화할 수 없는 것들의 종합이다. 그날 기분이 더러웠는데 이 한끼를 먹고 기분이 좋아졌다면, 이 한 잔의 커피를 먹고 기분이 좋아졌다면, 되는 거다. 그 커피가 얼마였고, 그 식사가 얼마였고, 이런 계산이 더해지기도 하는데, 그게 가성비라는 이름으로 떠돈다. 내가 이 기분을 더 싼 가격에 샀으니 더 좋은 거다, 아마 가성비는 이런 의미일 거다.



자본주의 세계는 숫자의 세계, 지금은 지폐도 아닌 카드값으로 찍혀나온 숫자의 돈(가치)이라는 것을 어디선가 마련해 내가 쥐어보지도 않고 이체되며 생활을 영위한다. 가스비, 보험료, 관리비, 통신비는 매달 당연히 수치가 찍혀나오도록 되어 있고 나는 이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그 수치만큼의 어떤 가치를 마련해 내야 한다. 내가 그 수치를 어떻게 마련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법적으로 뭔가 이상한 일을 하거나 하면 그때부터 그 수치를 어떻게 마련했는가가 중요해진다. 며칠 전 오스템임플란트의 한 직원이 그 수치를 마련하기 위해 회사의 돈을 횡령한 사건이 한동안 떠들썩했다. 이 정도의 사건이 벌어지면 그 수치를 어떻게 마련했는가가 중요해진다.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타인이 벌어들인 수치를 내 것으로 만들 때, 그럴 때라고 하지만 어디까지가 정당한가는 각자 생각하는 게 다르다. 법이라는 게 어디까지 정당한가를 정해놓은 울타리라고 하지만 누군가는 그 울타리를 넘나들 정도의 돈으로 울타리를 자유자재로 넘나들기도 할 것이다.

  

상장하는 주식을 사서 다음 날 팔아 수익이 났을 때 그건 공돈일까 생각해보면 그걸 하는 동안 내가 들인 노력을 생각하면 그게 공돈은 아니지 싶기도 한데, 누군가는 하루 종일 붕어빵을 팔아도 못 벌 돈을 엘지에너지솔루션 주식을 100개 정도 사면, 그 정도의 자본력이 있으면 다음날 팔아서 100일 동안 붕어빵을 팔아야 마련할 수 있는 돈을 마련하는 것은 정당한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과연 이 시대의 자본주의는 정당한 걸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그러나 그 수치 이외의 어떤 계산이 없는 우리는 계속 그 시대를 꾸역꾸역 살고 있는 것이다.  

강릉에 와서 여전히 사회적인 어떤 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 가끔 이것저것 아르바이트 같은 것을 해서 돈을 조금씩 벌고 있지만 점점 내 통장의 수치는 줄어들고 있고, 이제 곧 바닥이 보인다. 내가 한 달에 쓰는 수치를 생각해보면 정말 곧이다. 매달 나가는 돈은 정해져 있고, 그만큼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뭔가 수치화된 가치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바다에 나가서 하루종일 앉아있는 것 말고 사회 속에서 무언가, 어떤 콘텐츠를 만들어 만족감을 선사하거나 작품을 통해 어떤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이 타인 속에서 메아리칠 정도가 되도록 해 심지어 그것을 수치화시킬 수 있도록 어떤 시스템 속으로 들어가거나 그도 아니면 누군가의 직원으로 고용돼 이 세계에 필요하다고 판단되었기에 자본화될 수 있는 어떤 노동을 해야 한다. 커피를 내려 팔거나 편의점에서 상품을 계산하거나 전문지식은 없지만 약국에서 약을 찾고 계산해주거나 어쨌든 누군가 필요할 때 필요한 사람이 되어 자본을 만들어내야 한다. 내 활동과 그 활동을 하는 시간을 통해. 사회 속에서 나 말고 다른 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으로 돈을 받는다.



주식을 사는 것도 실은 그런 걸 거다. 어떤 회사의 주식을 사면서 그 회사의 가능성에 투자하고 있는 일도 실은 그런 거니까. 물론 이는 초기자본이 있어야만 가능하긴 하다. 초기자본이 있어도 이런 투자를 안 하는 사람도 있으니 공부하고 생각하고 매일 아침 장 시작할 때마다 숫자를 들여다보고 설거지하며 유튜브 방송을 듣고 이런 것도 분명 사회화하고 있는 것이긴 하다. 사회 속에서 돈이 만들어진다. 사회 속에서, 교환 속에서, 나 혼자는 안 되고 타인과. 결국 작품도 나 혼자 쓰는 게 아니고 타인에게 가닿아야 한다.



여기서 가장 아이러니한 것은 이 시대 최고의 자본 가치로 매김된 예술가 반 고흐는 물감값을 고민하고 평생 돈에 대해 골몰하다 죽었으며 실제로 자기가 사는 동안 자기 그림으로 돈을 만들지 못했는데 희안하게도 그 그림이 100년이 지나자 예술 세계에서 최고의 자본으로 환원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본이란 뭘까, 생각해도 답이 없는. 예술과 자본 사이, 재미와 돈 사이.   


내가 강릉으로 올 수 있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있다. 나는 그를 아버님이라 부르는데, 실제 아버님은 아니지만 나는 그냥 아버님이라고 부른다. 이 동네로 이 동네 주민회 사람들을 모두 끌어모은 그는, 한동안 게스트하우스를 하다가 산림청 최전방에 서있는 산림청 특수진화대가 됐다. 산을 좋아하니까 그럴 만하지 했지만 실제로는 왠만한 체력으로는 안 되는 일이다. 게다가 산불이 난 현장을 안다면, 왠만한 담력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와 가까이 살다 보니 알게 되었다. 맨몸으로 산불과 맞서는 이들이 없다면 산불은 꺼지지 않는다. 맨몸으로 산불이 난 현장에 들어가 산불을 끄는 거다. 헬기로 산불을 끄지도 소방대원들이 끌 수도 없다. 산에 몸이 익은 공무직 특수진화대가 불을 끈다. 그들은 아마 최저임금에 가까운 돈을 받을 거다. 산불을 끄기 위해 몸을 만들고 산에 익숙해지고 진화 훈련을 하고 그리고 산불이 나면 언제라도 출동한다. 그리고 불 속으로 들어간다.  



드라마 지리산을 봤다면 국립공원관리공단의 레인저들이 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봤고 우리는 그걸 보며 그의 현장을 조금 이해했다. 훈련을 하며 익숙해진 산림청의 산불 특수진화대가 정말

맨몸으로 불이 난 산에 들어가 불을 끈다고 한다.

  


오늘 울진에 산불이 나고 영월에 산불이 났다. 그동안 건조주의보가 동해안에 발령됐는데 결국 산불이 났다. 주민회에 그가 산불을 끄러 갔다는 연락이 왔다. 그가 보내온 사진은 처참했다. 무서웠다. 저 불 앞에 그냥 서있다니. 그러나 그 산림청의 최전방에 있는 그가 받는 월급은 최저임금에 가까우며 물가상승률 적용도 받지 않는 매년 똑같은 액수다. 열이 받아서 그게 말이 되냐고 했었다. 그러니까 이들의 대우에 대해서 이들을 고용한 사람들은 관심이 없다. 그냥 그런 역할이 필요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사람이 필요하니 고용하고 유지할 뿐이다. 공무원의 월급은 호봉제이며 매년 물가상승률에 따라 조금씩 오른다. 많지는 않지만 그렇다. 공무원을 하다 나와서 이런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공무원은 아무것도 안 하냐 묻는다면, 나 역시 죽도록 고생했다. 나는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을 참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너무 많은 것을 참고 실제로 일도 죽도록 한다. 모르면 미친 듯이 공부했고 새벽 3시까지 책상에 앉아있었다. 다음날도 아침에 일어나 보고해야 하는 상황도 있었다. 12시간 이상 일한 날이 많았고, 일하지 않으면 술자리에 가야 하는데 그러지는 못했다. 그런 성격이 못됐다. 그 술자리에서 정보도 듣고 업무 얘기도 하고 사람도 만나고 업무를 하는 사람 얘기도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술자리도 업무의 일종이다. 나는 어공 최전방 공격수이니 어공들의 임무를 대변도 하고 일도 잘 하고 등등 할 게 많아서 일도 잘 하고 술도 잘 먹고 해야는데 나는 이런 삶을 살고 싶었나 생각하다가, 내 가족은 먹여 살릴 수 있고 그걸 하고 싶어 여기 왔는데 나는 어찌어찌 어공 임무도 대변하고 일도 잘해도 행복하지 않겠구나, 그래도 되는 걸까, 생각하다가 아니라는 답을 얻고 나왔다. 그래서 나는 뭘하고 싶었지가 요새 생각하는 바다.



언젠가 같은 직급의 셋이 세종시 멀리 불빛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던 때가 있었다. 그러니까, 이 인생은 왜 이런 걸까 그런 느낌으로, 그들과 내가 아주 친한 건 아니었는데, 다 같이 야근하려고 남아서 저녁에 회사식당에서 밥 먹고 옥상에서 멀리 세종시에 반짝이는 불빛과 아파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다 여기 와서 이렇게 사는 우리들이 바라보는 저 바깥 세상, 바깥 세상을 행정적으로 처리해보려 모였으나  세상이 왜 이런지 모르지만 뭐라도 하는 중인데 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주어진 대로 매일 야근하는 생활 속에서.  


그렇게 공무원 세계를 아는 내가 보기에, 그들은 저런 역할이 필요했고 저런 역할이 있으면 그만 더는 신경쓰지 않고 있다. 산림청 특수진화대는 산림청 최전방에 서있지만 그들은 발언권이 없다. 조직의 외곽에 있고 절대 승진이 없으며 조직 중심으로 들어갈 수도 없다. 그러므로 그들에 대한 대우는 신경쓰지 않는다. 필요해서 만들었고 그뿐이다. 과연 이것은 올바른 세계인가.


강릉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자영업을 하거나 공무원 비슷한 일을 하거나 아니면 서울에서 일을 받아서 하거나.  그가 게스트하우스를 하다가 산림청 특수진화대를 하듯.  


나는 이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 동네에서 사회 속에서 살기 위해 어떤 가치를 마련하기 위해 뭐라도 해볼까 해서 요새 돌아다니고 있다. 내가 즐거운 방식은 뭘까 고민하다 그 방식을 찾다 창업지원서를 내고 있는데 자영업을 해볼까 한다니 친구가 책 팔거나 커피 팔거나 하겠구나, 해서 맞다고 했다. 자본금이 없으므로 지원사업을 받아볼까 월세 싼 좋은 자리를 알아볼까 하는데, 그러다 오늘 바닷가를 걷다 보니 바닷가의 좋은 자리들에는 카페가 가득하다. 지원사업을 받겠다고 12장짜리 단편소설 분량의 기획서를 쓰느라 아둥바둥하는 이유는 실은 돈이 없어서구나, 돈이 있으면 내가 가진 아이템으로 가게 사서 인테리어 하고 알아서 운영하면 되는데 나는 돈이 없어서 이렇게 아둥바둥하는구나 싶었다.  



그래서 로또라도 사볼까 해 나가는 길에 현금 2천원을 들고 나갔는데 그것마저 1천원을 잃어버렸다. 자주 잃어버려서 그러려니 싶었다. 그럼 그렇지, 약간 그런 느낌이었다.  


이 세계의 돈은 뭘까, 자본주의, 뭐든 돈으로 다 연결되는, 뭐든 숫자화되는 세계, 누구든 그 세계 안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세계, 당근을 하든 이케아를 가든 주식을 하든 메밀라떼를 사먹든 드립커피를 사먹든 노브랜드 음료수를 사먹든 결국 자본주의 속 세계, 예쁜 카페의 자본주의, 맛있는 원두의 자본주의, 책을 파는 서점의 자본주의, 산림청 특수진화대와 행정가들과 자본주의, 이 사이에서. 오랜만에 들고 나간 현금이 어색한. 그 잃어버린 돈이 1백만원이거나 1천만원이었다면 이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지 싶다가도 누구에게는 또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나 싶은 숫자들, 사이를 헤맨다. 누군가에게 1천원이 어마어마하지만 그 잃어버린 돈을 찾기 위해 다시 온 길을 다 되짚느니 그냥 누군가의 행운으로 치기로 한 1천원, 그래도 속이 쓰리지는 않은 1천원, 누군가에게는 속이 쓰리기도 할 숫자, 숫자들, 0이 몇 개인가에 따라서 가치가 속수무책인.  


나는 그에게 불 앞에서 나서지 말고 뒤로 물러나라고 단톡방에 쓸까 하다가 말았다. 그의 무사와 웃음을  위해 쓸까 했는데 그럼 누군가는 또 맨 앞에서 그 불과 맞설 수밖에 없는 거다. 그건 맞는 걸까. 내가 아는 그가 아니면 괜찮은 걸까. 내 마음을 위해, 혹시라도 다치면 안 되니까, 그런 말을 하지만 어떤 순간 그가 아닌 누구는 다쳐도 되는 걸까.


우리는 최전방 공격수가 되지 말고 적당히 정치도 하고 생존하며 적당히 이것저것 해야 할까. 최전방 공격수는 위험한 데다 가난하니까. 오래 버티기 힘드니까. 적당히 살아야 할까. 그러니까 맨 앞에 나서지 말라는 그 말처럼, 적당히 중간에 끼어서. 그러면 산불은 누가 끌까? 그러면 독립운동은 누가 하고 독립은 어떻게 할까?


오늘 바다는 아무리 봐도 봄 바다라, 내가 안 봐도 이 봄 바다는 봄 바다일 텐데, 지금 이 봄 바다를 볼 수 있게 됐는데, 누구나 이 봄 바다를 보고 싶지만 못 보고 무언가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루종일 컴퓨터를 바라보고 일하는데 그게 자기 만족과 아무 상관 없이 당위 속을 하루종일 사는 사람들이 있다. 잠시 걸으며 내 만족 같은 것을 생각해볼 여유라도 있다면 다행인 그런. 그 시간 속을 지나 여기 왔다.  



그리고, 그래서, 이 봄 바다를 바라보게 됐으나 뭘하지 싶은 이 순간, 이 정도 아름다움이면 충분히 등가가 성립하지 싶다가도 어쨌든 공과금, 가스비, 통신비, 보험료는 해결해야 하고, 그걸 위해 뭘 하면 행복할까 생각해본다. 아마 나는 영리할 수 있는 사람인데 영리하지 않은 사람이고, 정당함에 대해 때로 질문하는 사람이고 누구나 조금은 그럴 테고 그러므로 이 세계는 과연 정당한가도 생각해본다. 나는 적어도 이것저것 여기저기 바라볼 수 있어서 무언가를 해도 열심히 최선을 다해 하려고 할 테니, 누구는 왜 아무것도 안 하고 저래 이런 말을 안 할 수 있게 됐다. 어떤 방식으로든 노력하고 있을 거다. 내가 생각하기에 정당하지 않은 방식일 수도 있으나 세상이 그걸 용납해줄 수도 있고 내가 생각하기에 정당한 방식인데 세상이 그걸 용납해주지 않을 수도 있다. 아니면 먼훗날 그걸 용납해줄 수도 있다. 반 고흐처럼. 그걸 다 알 수가 없어 어떤 날은 괴롭고 어떤 날은 괜찮다.


지금 세계 또한  정당하지 않은 부분도 있고 정당한 부분도 있겠지만, 가장 최전방에 선 그들이, 정치를 할 수 없도록 짜여진 채 가장 최전방에서 이 바람 속에서 불길 속에서 이 세계의 끄트머리에서 오늘 산불을 끄며 산이 타 없어지지 않도록, 불길이 번져 누군가를 헤치지 않도록 지키고 있는 그들이, 아마 이 바람 부는 밤에도 산불 바로 앞에서 불을 끄고 있는 그들이, 영리하기보다는 온몸으로 나서는 그들이 조금 더 나은 대우를 받아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물론 이 또한 정말 자본주의적인 당위 속에서의 자본주의적인 생각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최고 바람은 당장 이 똥바람이 멈추는 거다.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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