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회사 단톡방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문장은 '네, 알겠습니다'였다. 내가 속한 조직만 그런 것은 아니었을 거다. 어떤 지시가 내려지고 나 역시 그 지시를 알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 '네 알겠습니다'를 남기는 거다. 그래서 알아서 뭘 하겠다는 건지 그런 이야기는 단톡방에 등장하는 주제가 아닌 경우가 많다.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문장과 마찬가지로. 이해를 못 해도, 반감이 있어도, 다른 할 말이 있어도, 다 알겠다고 해야 한다. 거기서 혼자 잘 모르겠습니다나 아니 근데 그건 이런 말은 권력관계의 상부층에서만 나올 수 있는 말인데, 이 또한 이 조직사회의 역학 관계를 흔들고 싶지 않다면 개인톡으로 보낼 것이다.
그럼에도 세상에는 '네, 알겠습니다'가 필요해서 이 모두가 똑같이 '네, 알겠습니다'를 카톡으로 남기고 그 카톡이 계속 울린다. 너도 알아야지, 이제 그만 알아도 돼, 할 때쯤 잘 몰라도 '네, 알겠습니다'를 남기며 오늘도 하루를 넘기는 거다. 잘 몰라도 사는 게 인생이니까 라며.
'네, 알겠습니다'라는 이 기표 속에 얼마나 많은 기의가 담겨있는 걸까. 그러므로 개인적인 관계에서는 이런 말까지는 하고 싶지 않다. 가장 하고 싶지 않은 말이다. 이 정도면 끝이지,의 문장이 '네, 알겠습니다'인 셈이다. 너랑 나는 서로 원하는 바가 다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면이 있으니, 아니면 그냥 이런 채로 묻어둡시다 정도의 문장일 수도 있다. 알겠어, 그래서 뭐? 라고 물으면 다음이 이어지지만 그 문장까지 도달하지 않는 많은 관계들이 '네, 알겠습니다'의 관계다. 서로 얼마나 깊이 있게 서로를 이해하고 내밀한 맥락을 고려하며 배려해야 하는가도 피곤하므로 '네, 알겠습니다'로 퉁치는 시간들. 굳이 왜 이런 짓을 하지 싶을 때가 왔을 때는 쎄굿바의 시간인 셈이다. 그럼에도 질질 끌려가는 이유는 약속과 질서의 문제일 텐데, 그게 더는 내게 중요치 않을 때는 '네, 알겠습니다'는 어떤 인사인 셈일 수도 있을까? 하지만 이 인사의 뒤끝은 그래 너는 너대로 살아, 나는 나대로 살게, 더는 서로 신경쓰지 맙시다, 이기도 해서 씁쓸하다. 이런 말을 하게 될 때면.
오늘은 바닷가에 나가 책도 읽고 맥주도 마시다 왔다. 노동절이라 차가 막히는 날. 다들 노동을 잠시 쉬며 바닷가에 다른 평일보다 좀 더 사람이 많았다.
바다에 가만히 있다 보면 물결 소리가 좋다. 보이는 것보다 들리는 게 더 좋구나 싶게 좋다. 그러다 보면 낮달
이 보인다. 집에 있었다면 저편이 저렇게 넓게 트이지 않았다면 보이지도 않았을 낮달이 떠있다. 어릴 때 교장선생님이 말씀하시는데 그 말은 귀에 안 들어오고 그러다 하늘을 보니 학교 운동장에서 보던 달, 네 알겠습니다 하고 있는데 실은 하나도 모르겠어서 둘러보다 보이는 달, 낮달이다.
그러고 나면 물결이 보인다. 저 바다의 물결은 형용이 불가능하고 누구도 그림으로 그릴 수 없어서 영상을 찍는 정도가 이 시대 기술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저기이지만 실은 저 깊이와 순간과 시간과 바람과 이 모든 자연이라는 웅장한 혼합으로만 가능한 물결이 치고 있는 거다. 다들 똑같은 높이로, 어떻게 저렇게 리듬을 타는 걸까 편안하게 아무 일 없다는 듯 그러나 실은 전혀 그렇지 않게,
그러므로
네, 알겠습니다 보다는 잘 모르겠습니다의 세계를 살고 싶다.
거리에서 걷고 있는 두 사람의 표정이 그 둘이 어떤 관계이든 할머니와 손주이든 연인이든 누구든 가장 행복해보일 때는 이 관계가 행복해서 웃고 있을 때다. 사람은 아무 생각 없이 웃고 있을 때 가장 예뻐서, 사랑은 나를 향해 웃어줄 단 한 명을 찾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게 왜 단 한 명이어야 하냐면, 나도 하나라서 정도로 답을 할 수 있는데, 결국 누구도 웃어주지 않을 때 누군가 나를 향해 웃어주는 단 한 명, 그 웃음 속에서 살아가는 일, 그게 사랑이 아닐까.
저 사람을 잘 모르지만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때 그때, 사랑이 시작되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래서 누군가를 꼬시고 싶다면 웃어주면 된다는 말이 있나 보다. 그 웃음의 이유를 혼자서 찾다가, 그만 사랑이 시작되고 말기 때문에. 그러다 결혼도 하고 애도 낳지만 더는 그 사람이 나를 향해 웃어주지 않는 순간들이 많아질 때, 그 파탄이 삶이기도 해서 문제지만, 그래도 노력하고 있다면 좋다. 고집 부리지 말고 노력을 하기를. 그 절단면을 알기는 어렵지만, 이게 고집인지 노력인지도 모르면 바보다. 그게 자기를 넘어트리니까, 그 순간을 캐치할 수 없는 유한한 인간이지만, 지금 내가 부리는 게 고집인지 노력인지 계속 물어보자. 잘 모르겠다고 하지 말고 네 알겠다고 하지 말고,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를 향해 웃어주고 있는가, 나를 사랑하고 있는가, 그래야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으므로,
아니면 종교처럼 네 알겠습니다 하는데 이율배반하는 그런 각자의 종교들이 있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모양새이고 겨우 2가 되고 3이 되는 시간들일까…
계속, 물결, 파도, 바람이 되자. 가끔 낮달, 보름달, 쉬고 싶을 때는 달처럼 숨기도 하고, 그렇게,
내일은 아직 내일의 태양이 뜨고 있으므로.
우리는 누구나 님이고 싶지 놈이고 싶지 않은데 어느 순간 네, 알겠습니다는 님에게 놈이 하는 말이 되어 버렸다.
네 알겠습니다는 님에게 님의 뜻이라면 늘 좋아요인데 어느새 우리는
이 자본주의의 권력 앞에 너무 아무렇지 않게 너무 많은 님을 만들어
그들이 내 님이 아닌데 내 님일 수밖에 없는 이 상황에서 좌절해 있는 게 아닐까
그들이 내 종교는 아닌데 종교에 가까운 태도를 취해야 하는
놈 취급 받아도 어쩔 수 없이 넘기는 이유는?
그런면에서는
포기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잘 버리는 방법을 궁구하는 시대이므로.
쓰레기 버리기, 분리수거 하기가 하나의 화두가 된 시대
쓰레기가 돌아오는 시대
마트에 가득 찬 쓰레기들, 창고에 가득 찬, 유통기한이 지나면, 다른 말로 하면 100년 후 모두 쓰레기가 될 것들이 가득 한, 있는 것들이 쓰레기가 되는 세계
그래서 미니멀리즘을 꿈꾸다가 허기질 때면 물건을 채운다
배를 채우는 것으로 모자라, 여전히
쇼핑앱을 들여다보고
느리고 모질라서
모질이는 모자른 사람이란 말인데 아마 우리 모두를 위한 말일 거다. 눈빛을 받고 싶어서, 사랑하는 눈빛에 취하는 우리들이 이제는 그 눈빛을 우월감이라는 형태로라도 받아내고 거기서 위안을 받기에 무언가를 사들이는, 어쩔 수 없이 1밖에 안 되는
그러면서
1에서 2를 갈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100을 꿈꾼다 (자본주의의 물질세계 속에서)
참외나 수박이 아무렇지 않게 하는 그런 것도 못하면서 (속에 씨앗 100 이상을 품는)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
1도 잘 못하면서 물건으로 1000을 간다
그 모든 게 쓰레기가 되어 되돌아 오는 세계
히틀러 같은 이상한 권력이 만들어놓은
자본주의라는 틀 거기 취해
이제부터는 2를 갈 준비를 하자
포기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잘 버리는 일
숨을 잘 내뱉는 일
잘 쓰는 일
사랑하는 방법은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것도 같고
매일 모두 얘기하는 것도 같다
달은 잘 못하겠으면
하루쯤 숨으라고 한다
잘 들으면 된다
오감이나 육감은 받아들이라고 있는 것인데 우리는 그동안의 정보나 경험을 취합하고 그 안에서 어떤 결과값을 내고자 하지만 절대 삶이란 결과값이 아니다. 살아가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이다.
잘 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