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도 안 가고 쉬는 날에도 안 가고 명절엔 더더욱 안 간다
우리 집도 여느 집과 똑같이 명절에 차례를 지내고 제사 때마다 아빠의 본가를 방문했었다. 내 주변 기독교인 친구들은 제사 같은 거 안 지낸다 그랬는데 이상하게 우리 집은 가톨릭인데도 불구하고 제사를 지냈다. 그냥 일반적인 유교식 제사가 아니라 제사상에서 성경 구절을 읽고 찬송가를 부른다. 나는 이걸 '짬뽕 제사'라고 불렀다. 제기 세트도 마련해 두지 않는, 어찌 보면 프리한 집인데 제사는 꼬박꼬박 챙겼다. 심지어 할아버지의 형제들이 전국구로 흩어져서 지내 모이기가 그렇게 힘든데도 명절이면 명절이라고, 제사면 제사라고 가족들을 불러젖혔다. 난 할아버지의 형제들이 다 모인 모습을 할아버지의 장례식 이외에 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명절에, 제사에 참석하는 집은 우리 집뿐이었다. 모인 집은 우리 집뿐인데 음식은 뭐 그리 많이 하는지... 일은 일대로 하고 음식은 항상 남아서 1년을 냉동실에 묵혀뒀다가 버리는 게 다반사였다.
명절에 일은 많은데 일할 사람은 부족하니 대부분의 일은 엄마가 했다. 손 씨 집안 제사지만 김 씨가 준비하는 제사상. 심지어 김 씨는 제사 과정에서 배제된다. 김 씨가 준비했지만 손 씨의 제사이기 때문이다. 제사상에 술을 올리는 과정에선 나 역시 제외되어야 했지만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조상 덕 좀 보려는 손 씨 남자들이 꼴 보기 싫어서라도 난 제외된 그 술자리를 떠나지 않고 기어코 술을 올렸다. 제사가 끝나고 다 같이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도 엄마는 같이 밥을 먹지 못했다. 상을 치우는 것도 밥상을 차리는 것도 후식을 준비하는 것도 모두 엄마의 몫이었다. 할아버지, 아빠, 내 남동생들의 손은 있지만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밥상에 수저 하나 놓는 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차려진 음식을 먹고 틀어진 티브이를 보고 서로 감흥도 없는 대화를 나누는 게 전부였다. 노는 손 없이 모두가 일을 한다면 더 빨리, 더 효율적으로 제사를 치르고 노동으로 인한 피로도도 덜할 텐데. 실로 비효율적인 노동 분배가 아닌가 싶다.
혼자 동동거리며 그 좁은 부엌에서 뱁새 마냥 발버둥 치는 엄마가 안쓰러워서 난 자진해서 일을 떠맡았다. 물론 내가 자진해서 일을 맡는다고 해서 그 누구도 나한테 고맙다거나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거나 하다못해 차려진 음식이 맛있다는 소리는 하지 않는다. 나의 노동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티브이 보는 것이 지겨워진 큰 동생이 부엌으로 슬금슬금 들어와 떡 반죽이라도 몇 번 치대는 날에는 온갖 어른들로부터 대단한 위인 마냥 떠받들어졌다. 물론 내 동생은 10분 이상 부엌에 있지 않았다. 나의 노동이 평가절하되는 순간이다.
설날과 추석. 1년에 두 번이다. 며칠씩 장기 휴가를 낼 수 있는 때가. 아무 때나 오지 않는 기회인 만큼 엄마는 명절에라도 본가에 가고 싶어 했다. 엄마의 본가는 해남이다. 그 유명한 땅끝마을. 차로 쉬지 않고 달려도 5시간이 걸리는 곳이다. 그래서 긴 휴가 때가 아니면 가지 못하는 곳이다. 엄마는 매해 명절 때마다 해남 집에 가고 싶다고 얘기했지만 해남 집에 내려갔다 온 명절은 손에 꼽는다. 그렇다. 우리 집은 명절에 엄마의 본가에 가 본적이 거의 없다. 무려 근 20여 년 동안. 비교적 가까이 사는 아빠네는 갈려면 주말 마다도 갈 수 있었고 운전을 하는 할머니가 우리 집으로 오는 방법도 있었다.
'명절엔 엄마네나 가지... 몇 년 동안 간 적이 없는데.'
엄마도 원가족이 있고 결혼해서 우리와 산 시간보다 부모님과 형제들과 산 시간이 더 많을 텐데. 명절에 집에 가고 싶은 건 엄마도 마찬가지일 텐데. 나의 할머니, 엄마의 엄마가 돌아가시던 날 이제 자기는 고아라며 꺼이꺼이 울던 엄마가 잊히지 않는다.
그리고 어느 명절. 엄마가 시가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아빠는 노발대발하며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소리를 질러댔다. 그래도 엄마는 확고했다.
"너네 집엔 너나 가."
그게 우리 엄마의 의견이었다. 결국 아빠는 우리만 데리고 자신의 본가로 갔다. 엄마가 없는 명절. 엄마가 하던 일의 대부분은 할머니가 맡게 되었고 난 전보다도 더 열악한 노동현장에 투입되어야 했다. 그때까지도 손 씨 남자들은 일을 하지 않았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냥 명절에 시가에 오지 않은 엄마를 욕하면서 자기들끼리 쑥덕대기 바빴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나도 파업을 선언했다.
"나도 안가."
아빠는 엄마한테 화를 내던 것과 같이 나에게도 화를 냈다. 누가 뭐래도 넌 손 씨라면서. 아니, 언제는 날 손 씨 취급해 준 적이 있었나? 자기들끼리 떠들며 놀던 손 씨 남자들 틈에 내가 낄 자리는 없었다. 첫 애가 딸이라고 대놓고 싫어하던 사람들이, 날 먼저 버렸던 사람들이 이제 내가 그들을 버리겠다 말하자 역정을 낸다. 내 결심이 더 확고해졌다. 다시는 이딴 인간들을 위해 내 소중한 노동력과 정신력을 바치지 않는다.
정말 웃긴 건 그렇게 제사에 목매던 인간들은 더 이상 일할 여자들이 명절에 오지 않자 아예 제사를 없애버렸다. 결국 그들에게 제사는 전통이자 조상에 대한 예가 아니라 그냥 자신들이 우위를 점하는 순간이었을 뿐이었다. 그 코딱지 만한 집안에서 자신의 권력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알량한 마음. 그래서 난 더 이상 손 씨 집안에 나를 갈아 넣지 않는다.
아빠의 본가에 가지 않은지 5년 정도 됐다. 아빠의 본가에 가는 대신 나와 엄마는 명절에 엄마의 본가에 간다. 우리는 명절 휴가 동안 여행을 가고 먹고 싶은 것을 먹고 보고 싶은 가족을 본다. 우리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대신 살아있는 가족들에게 더 마음을 쏟는다. 전보다 훨씬 더 건강해진 느낌이다. 엄마는 5년 전보다 훨씬 더 젊어졌다.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라더니, 삶의 커다란 스트레스가 사라지자 엄마는 한결 편안해 보였다. 엄마의 본가에 내려가면 역시나 이혼하고 팔자 핀 이모를 만날 수 있다. 결혼 생활 내리 이모를 옥죄었던 이모부도 손 씨인 건 놀랄 노자다...(이 데이터 때문에 한동안 손 씨 남자는 믿고 걸렀다) 우리는 다 같이 음식을 차려먹고 서로의 수고에 대해 고맙다고 꼭 말한다. 제사는 지내지 않지만 할머니의 산소에 들려 인사 정도는 드린다. 그걸로 충분하다. 가족끼리 어떤 활동을 할 땐 꼭 의사를 물어보고 원치 않으면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 참여하지 않는다고 해서 가족이 아닌 건 아니니까. 개인의 시간과 공간을 존중해 줄 때 가족으로서 화목해질 수 있는 것이다.
코로나가 한창일 때 시가에 가지 않는 며느리들의 숨통이 트였다는 내용의 뉴스도 있었고 매해 명절만 되면 명절증후군에 대한 얘기로 떠들썩한 게 이 나라다. 21세기에도 편파적인 명절 노동 분배에 대해 말이 많다니... 조상에 대한 예는 그 직계 후손들이 손수 지켜야 하는 것이고(본래 유학에서 모든 제사 과정은 남성이 책임진다. 음식 장만부터 퍼포먼스까지. 현재 종묘 제사 역시도 그렇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니 원래 전통이 그렇다는 핑계는 대지 말자) 누군가의 노동에 대해 평가절하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고맙다는 한마디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