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시골살이를 시작한 이유
사람들은 묻는다. 서울에 사는 직장인이 무슨 이유로 갑자기 시골 폐가를 사서 고쳤는지, 어째서 주말마다 시골로 향하는지. 매번 답이 달라지긴 했지만 답은 보통 다음 중 하나였다. 꾸준히 시골집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을 보고 결심하게 되었다, 회사생활에 지쳤고 번아웃이 온 상태라 도피처가 필요했다. 모두 맞는 이야기인데 굉장히 정제된 버전이다. 부끄럽지만 솔직한 버전은 이렇다.
첫 명함이 생겼던 날이 생각난다. 내 이름 앞에 ‘MD’라고 쓰여 있었다. MD 김미리. 명함이 생긴 후론 모든 만남에서 명함을 꺼낼 타이밍을 재느라 바빴다. 명함을 받아 든 사람이 ‘MD가 뭔가요? 무슨 일을 해요?’라고 물을 때면 있어 보이고 그럴 싸한 답변을 하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모른다.
이커머스 MD는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소비자와 상품 그리고 판매자를 연결하는 직업이다. 입점할 브랜드와 상품을 결정하고, 특가와 프로모션을 협의하는 일을 한다. 플랫폼의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해, 새로운 상품이나 브랜드를 기획하기도 한다. 예전에는 하는 일을 기준으로 MD를 세부적으로(기획 MD, 바잉 MD, PB MD, 영업 MD) 나누거나 일하는 채널을 기준으로 (홈쇼핑 MD, 백화점 MD, 온라인 MD) 나누기도 했다. 요즘에는 그 경계가 점차 모호해지는 것 같다.
나 역시 온라인 MD이자, 패션 MD(지금은 이직해서 다른 상품을 담당한다)이자, 영업 MD이자, 기획 MD로서- 모호한 경계의 일들을 해 왔다. 모든 상품이 그렇지만 특히나 패션은 트렌드에 민감한 상품군이라, 매 시즌 새로운 상품을 기획해야 한다. 자연스럽게 여름에는 패딩을, 겨울에는 반팔을 들여다보며 지냈다. 계절을 바꾸어 사는 그 감각이 좋았다. 보라색 티셔츠의 채도가 좀 더 높으면 좋을지 아니면 반대가 좋을지, 기장을 1인치 늘리면 좋을지 그대로가 좋을지- 어쩌면 알아줄 이가 별로 없는 고민들을 하는 순간들도 찐하게 좋았다.
학창 시절, 내가 입고 신었던 것들을 단순히 유행 지난 패션 아이템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리바이스 엔진 바지, 나이키 맥스 시리즈, 이스트팩 가방, 컨버스 신발. 이런 브랜드와 상품의 이름들을 읊다 보면- 잊고 살던 뿌연 학창 시절의 에피소드도 선명해지고, 그때 즐겨 들었던 노래, 자주 가던 길, 질풍노도 내 마음도 다 생각난다. 그래서 옷을 만들고 파는 일이 좋았다. 내가 고민하며 만드는 이 옷들도 누군가의 추억으로 간직될 테니까.
플랫폼 규모에 따라 다르지만, MD는 하루에 수 억에서 수십, 수백 억의 매출(거래액)을 취급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매출이 곧 내가 되어버리고 만다. 상품이 잘 팔릴 때는 온 세상이 나의 편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회사도 나의 편, 브랜드도 나의 편, 고객도 나의 편. 반대로 잘 팔리지 않을 때는 완벽하게 혼자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물론 매출이 쭉쭉 오르고 완판행진을 거듭할 때도 고충은 있다. 출근보다 먼저 전화가 울리고, 카톡 아이콘에 새 메시지를 알리는 숫자가 올라간다. 읽는 속도보다 빠르게 메일이 쌓이고 메신저에 새 메시지를 알리는 불이 번쩍인다. 특히 아침 일찍 오는 연락은 대부분 사건사고를 알리는 연락이다. 판매 중인 상품에 품질문제가 발생했다거나 대량 배송지연이 발생한다는 연락. 고객에게 약속한 사은품이 배송되지 못한다거나 CS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종류의 연락이다. 언제부턴가 전화 벨소리와 메시지 알림음이 울리면 심장이 마구 쿵쾅거렸다. 그렇지만 벨소리와 알림음은 요일과 시간을 가리지 않고 울린다. 온라인 스토어는 연중무휴, 24시간 오픈이니까. 머리를 감다 말고 물을 뚝뚝 흘리며 컴퓨터 앞으로 뛰어가거나, 늦은 밤 음식점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펼쳐놓는 게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되었다.
그럼에도 괜찮았다. 힘든 날이 있으면 그렇지 않은 날도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일로 얻는 크고 작은 성취와 인정들이, 나를 계속 일의 세계로 떠 밀어주었다. 일하는 나. 조직 속의 나. MD 김미리가 어떤 나보다 멋지고 중요했다. 여태까지 누군가 나에게, 내가 나에게 기대한 역할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이었다. 그 무렵 불안과 힘겨움은 책임감으로 갈음했다.
직장인으로서의 삶은 잘 굴러갔다. 급하게 추가되거나 변경되는 일이 있어도 마감을 놓치는 법이 없었다. 몸이 아파서 가는 병원 일정을 미루거나, 옷장 속이 엉망이 되거나, 가까운 이들의 대소사를 잊는 일이 흔해졌지만- 그럭저럭 나쁘지 않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새 10년 차 MD가 되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무슨 일 하세요?'라는 질문에 MD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 ‘그냥 직장인이에요’라고 대답하던 즈음이었을까. 심상치 않은 마음의 신호들이 나타났다. 불현듯 무기력해지거나 느닷없이 화가 났다. 직장 생활하는 사람들이 다들 그렇지, 하면서 스스로를 얼르기도 하고 냉정하게 나무라기도 했다. 그렇지만 무기력과 분노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조금 더 하고 덜한 날들이 계속되었을 뿐.
그러던 어느 날, 마음속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줄이 날카로운 무언가에 의해 건드려져 툭 끊어져버렸다. 출근길, 지하철 계단이었다. 내 앞엔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하고 느리게 걷는 이가 있었다. 마음이 바빴던 나는, 답답해하며 그 뒤를 쫓고 있었다. 몇 계단 지났을까. 순간 나는, 그 사람의 뒤통수를 퍽 내려치고 빨리 앞으로 가고 싶단 충동을 느꼈다. ‘빨리빨리 가라고. 안 바빠? 너만 안 바빠. 난 바쁘니까 비켜! 길 막지 말라고!’ 앞선 이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생각했다. 물론 몇 초 후, '내가 왜 이러지' 하며 다시 정신을 부여잡았지만, 가슴속 뜨거운 무언가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아무래도 마음이 고장 난 것 같았다. 더 이상 괜찮지 않았다.
그날 밤, 집에 돌아와서 분노조절장애, 정신과 상담, 심리 상담 뭐 그런 단어를 검색해보았다. 한 달 살기, 휴직, 퇴사 같은 단어들도. 검색어의 마지막이 시골집 매매였다. 그게 시작점이었다. 그렇게 주말 시골살이를 결심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