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이 문제일까요 제가 문제일까요
#1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을 때, 비로소 내 것이 됨을 느낀다. 매일이 특별하다면 그것을 일상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믿지 않았다. 별다를 것 없는 감정으로 마주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내 것이다. 나는 다리가 있기에 걷는 것이 두렵지 않고, 두 손이 있기에 만드는 것이 망설여지지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핸들을 쥐는 일은 어색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빈도 또한 특이를 만들기에.
나는 종종 내가 열망하는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새 전자제품도 앞으로 내가 소유할, 혹은 소유하기 원하는 모든 것들이 첫 순간의 감격을 생략하고 나의 삶에 조용히 편입되기를.
전입신고나 새로운 이웃에게 하는 인사도 없이 그저 원래 있던 것들처럼. 나는 능숙히 그들을 대하고 사용하고 함께하리. 그것이 내가 원하는 것들에 대한 나의 의전이자 성대한 환영식이 될 테다.
새 옷에는 새 택, 새 제품에는 새 패키지. 개시는 나의 몫이지만 나는 그것들이 이미 사용자화 되어 내가 알지도 못하게 떨어지기를 바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새 자리를 꾸리는 일이 약간은 고역이었다.
필요해서 구매한 물건들은 하루 간격으로 알림을 보냈다. 필요한 것을 취하고 내버리는 박스와 비닐에 환경이 어쩌니 하는 걱정을 묻혀 보낸 것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찾게 될 그 물건의 적재적소도, 사용법이나 어색한 이 것을 능숙히 대할 날까지의 가벼운 부담이 썩 유쾌하지는 않은 나였다. 나는 비로소 환영받는 새로움을 잊은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즐거이 하는 일을 좀 더 만들어 놓을걸 싶다가도 이내 모이던 생각을 흩어버린다. 내 삶은 외딴섬, 섬 안에 있는 물건들로 꾸려 살기로 많은 다짐을 했지 않은가.
#2
더는 나의 가치가 올라갈 것이라고 믿기 힘든 날이 있다. 그날이 하루라면 그저 낙담한 어느 날이겠지만 내일과 모레, 다음 달과 내년에 먼저 닿은 누군가가 속삭인다. 오늘이 너의 가장 멋진 날이다. 내일은 아니다.
내 삶에서 가장 떨쳐내고, 혹은 극복하고 싶은 마음은 불안인데 불안은 상상력이 뛰어난 사람들의 어깨에 지워져 있다. 만약 내 발이 향할 길이 눈에 보이는 하나뿐이라면 무엇을 고민하리.
상상력은 길을 내고 통행세를 불안으로 받아낸다. 나는 상상력에게 불안을 빚진다. 그들은 얼핏 보기엔 독촉도 없고 이자도 받지 않는 선량한 대금업자처럼 보이지만 나는 내가 융통한 감정의 크기를 알기에 그들을 늘 두려워한다.
불안을 지불하고 지나온 길들이 큰 나무에서 뻗어 나온 나뭇가지처럼 촘촘히 내 발걸음의 뒤에 놓인다. 가끔은 오랜 시간에 걸쳐 빌려온 것들에 대해 나 또한 잊기도 한다. 상상력은 나이고 불안은 스스로에게 진 빚이니.
발바닥이 뜨겁고 뱃속이 요동치는 것만 같이. 불안은 나를 다시 불 안에 있게 한다. 다 타버리면, 내가 뛰어든 불길이 어떤 화도냐에 따라서 남아있는 것에도 차이가 있을 테다. 나는 추한 모습으로 남지 않을 테다. 뼛가루도 모조리 타 주어라. 그런 뜨거움이 아니라면 나는 빚을 더 지고 더 많은 길을 내리.
#3
평양냉면이 좋은 이유는 내가 이렇게 정성과 품이 많이 들어간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만족감에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 맛이 자극적이지 않으나 부지불식간에 강하게 각인되어 일방적 주장을 한다는 것에 있다.
너 이거 좋잖아, 아니야? 맞잖아! 하며. 이제 오렌지에서 이 국수요리로 내 사랑의 해석이 옮겨와야 될지도 모르겠다.
상반된 이야기이지만 내가 좋아하는 간식엔 다 설탕이 발려있다. 혹은 이가 녹을 것처럼 달다. 약과, 오란다, 탕후루 그런 거 말이다.
마카롱을 처음 먹어본 날이 떠오른다. 수능응원이라며 누군가 보내준 간식 중 하나였는데 나는 세상에 이렇게 단 것이 있나 싶어 기뻤다. 누군가는 이런 달콤함을 맛보며 살아가는구나 싶어서. 내가 차차 알게 될 것이, 내가 알고서 기뻐할 것이 세상에 참 많다는 사실이.
#4
우울은 보편적인 감정 중의 하나이기에 특별할 것은 없다만, 우울을 아는 사람엔 두 부류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밤이 지나면 낮이 오고, 낮이 지나면 다시 밤이 오듯이. 그저 잠시 떠올랐다 사라지는 노을 따위로 그들을 대하는 사람들. 그들이 우울을 대하는 잠깐의 친절처럼 그들을 향한 질투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언젠가의 연인들에게 질투를 요구받았지만 내가 정작 극렬한 질투심을 갖는 것은 의연한 태도나 매끄럽고 유연한 삶의 움직임 같은 것이었다.
혹은 늘 함께하는 동료이자 숙적 비스무리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반갑다. 때때로 그들의 삶 전체와 관계 전체에 보내는 어리광이 질리지만, 누군가에겐 나도 어리광으로 그럴싸하게 발라놓은 전혀 어른 아닌 어떤 것으로 비쳤을 것을 생각하면 질린 마음에서 짜증이 솟다가도 이내 동질감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5
바람과 강박의 사이에서 피는 꽃
간절함은 누군가를 아프게 한다. 나를 아프게 하는 소망을 소망이라는 단어가 가진 소박하게 빛나는 뉘앙스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으리라. 그러나 고단한 하루, 눈 깜빡이는 것을 조금만 허둥댄다면 바로 잠에 들 것 같은 하루들의 지루함을 단도리 해놓아도 하나의 덩어리가 된 학기, 반절기, 일 년은 그저 단위로서 우리가 눈꺼풀을 잡아두려고 했던 노력들을 무심하게 지나친다.
간절함은 상상력에 의해 감염되기 쉽다. 순수했던 열망은 변질되어 찐득한 것으로 변한다. 마치 우화 속 길 한복판에서 일을 보는 사람처럼 내 손에 찐득한 그것을 남에게 보이거나 드러내면 보통의 일은 심하게 잘못되곤 했다.
아이와 같이 엉엉 울어버리면 누군가 와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수습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동기와 이유 따위는 묻지 않고 덮어놓고 해주는 그런 해결.
동생은 본인이 어디에 있건, 어디를 가건 늘 아버지에게 묻는다. 데려다줄 수 있어? 데리러 올 수 있어? 최초의 시간들에 나는 그런 뻔뻔한 부탁들이 세상에 또 있는지에 대한 생각에 빠졌다.
누군가를 케어한다는 일은 나로서는 거추장스럽고 성가신일인데. 빈 차를 몰고 가 누군가를 모셔온다는 일은 너무나도 앞선 표현에 부합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누군가는 늘 빈차를 몰았고 누군가는 큰 어려움 없이 집에 오곤 했다.
나는 각자가 감당해야 할 것들에 대해 정말 실재할 것만 같은 금을 그어 나누어두면서도 행복이 지나간 후에 남는 것들, 마치 햄버거를 다 먹고 나서 소스와 야채조각들이 남아있는 포장지처럼 쓸쓸한 그런 잔여의 마음들에는 과도한 공감을 표한다.
내가 싫은 것은 타인도 싫을 것이다라는 마음에 필요이상으로 깊게 관여하고 그 잘하지 못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공감을 엄한 곳에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부탁의 말에 인색한 내 모습에 입 안이 씁쓸했다. 나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말이 있다면 다름 아닌 품앗이일 것. 신세 지고 신세를 지우는 그것은 여전히 내가 오래전에 묶어둔 실낱같은 약속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져버린다.
#6
감염된 마음은 변이 되어 전이된다. 진심을 의심하고 의도를 불분명케 만든다. 전이를 막기 위해 내 신체를 절단하고 떼어내야 하는 순간이 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쁨이 숨은 삶을 지속할지, 혹은 온전하지 못한 몸과 마음에 주안점을 두고 중단할지 선택해야겠다.
기대한 만큼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함에도 내가 들이는 재화가 크다. 연비가 구리다고 말하는 것은 마냥 농담은 아니다. ~하지 않으면이라는 조건부가 많이 붙는 삶이 되어버린다. 우스갯소리로 어떤 브랜드의 차량이 도로에 보인다면 두 가지라고 했다. 출고되거나 서비스센터로 들어가거나.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길을 잃은 것이다. 갈 곳이 너무 많기에 길을 잃을 것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이 개활지를 헤매는 동안 마음과 기능은 함께 파멸할 것이다. 나는 결정해야 한다.
이제 잃을 것을 잃을 시간이 왔다. 택배 상자에 붙은 송장을 떼어 버릴 때가 왔다. 여기까지 데려다 주어 고마워, 역할이 끝난 것을 슬피 생각하지 않으리. 도리어 충실한 수행에 감사를!
#7
현재의 내가 살아가는 나날엔 꼭 LP처럼 낭만을 품었으면. 사장되어 버린 플랫폼의 거추장스러운 둥근 원판으로가 아니라 규격에 맞는 플레이어의 위에 놓여 검은 표면 사이 아름다움을 보이길.
그렇게 나는 여기에 있다. 과거와 미래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