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미 Apr 10. 2023

당신의 4월은 안녕하신가요?

반백년을 살았지만, 전치 6주 진단은 처음이라.

2023년 나의 4월은 '어깨 골절 전치 6주'로 시작되었다.


아무렇지 않을 때는 모른다.

우리 신체가 하는 모든 사소해 보이는 것들이 실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건강이 얼마큼 삶의 질을 좌우하는가를. 

건강하다는 것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를 말이다.


-


모처럼 대지를 흠뻑 적신 봄비가 산책로 곳곳에 작은 물웅덩이를 만들어놓았다

며칠 전부터 활짝 피기 시작한 벚꽃이 비바람에 다 떨어지면 어쩌나 내심 걱정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아직 봉오리인 채로, 또 활짝 핀 채로 탐스럽게 매달려 ‘나 괜찮아요’ 라며 웃고 있는 듯하다.


조금 거센 비바람한테는 어쩔 수 없었던지 떨어져 나온 벚꽃 잎이 작은 물웅덩이 테두리를 예쁘게 장식했다.

하트모양. 일그러진 동그라미모양. 긴 네모모양... 저마다 패인 모양대로 그 자체가 예술이다.


어느덧 4월은 문턱을 넘어섰다.

설레며 기다렸던 연초록 봄은 눈앞에 왔는데 지금 내게는 너무 멀어 보인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_T.S 엘리엇  <황무지> 중


시인은 4월을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했다.

시인의 마음을 따져보기 전에 공교롭게도 나의 4월에 잔인한 일이 들이닥쳤다.


지난해엔 아버지 장례식에 이은 엄마의 장례식으로 4월을 통째로 보냈다.

그리고 몇 해 전 4월에는 다리를 다쳐 목발과 씨름하고 있는 중에 4월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그리고 올해 4월은... 양팔을 꽁꽁 묶인 채로 집안에 갇혀버린 신세가 되었다.

전치 6주, 양쪽 어깨 동시 골절로 말이다.






4월 4일.

그날도 상큼하게 인사하는 4월의 아침햇살을 받으며 나도 감사인사로 답하고 유치원문을 들어섰다.

봄꽃처럼 초롱초롱한 아이들을 기다리며 교실 창문을 하나씩 열어 신선한 공기로 채운다.


교실, 도서관, 자료실, 그다음은... 체육실.

익숙하게 체육실 출입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니 창문 쪽으로 걸어가기 위해 한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교실 바닥이 올라오는가 싶더니 철썩! 내 몸을 사정없이 때려눕혔다. 아찔했다.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고 퍼뜩 스치는 생각에 다리 상태부터 살폈다. 다리 다쳤을 때의 끔찍한(?) 기억이 떠 올랐기 때문이다.


다행히 걷는 데는 지장이 없겠구나 싶어 한숨 돌리고 나니 그제야 여기저기 온몸이 아파왔다.

겨우 정신을 차려 주변을 둘러봤다.


출입문 입구에  <들어오지 마시오!>라는 표시처럼 기다란 나무의자가 가로막혀 있었는데 미처 보지 못하고 직진하다 의자에 부딪혀 그대로 날았던 것이다.

의자가 너무 낮아 눈높이에서 보이지도 않았을뿐더러 평소 자주 갔던 곳이라 의심 없이 냅다 문을 열고 성큼 들어섰던 부주의함이 낳은 결과다.


나이 들수록 매사에 눈 크게 뜨고 살피고 또 살펴야 한다는 교훈을 잠시 망각했었나 보다.

우선 몸 상태부터 체크했다.


‘얼굴은 괜찮고 다리도 일단은 걸을 수 있고. 그럼 척추뼈는 안전하다는 뜻이겠지.‘

팔. 다리. 등. 가슴... 몸 전체를 흠씬 두들겨 맞은 것 같은 통증에 불안감이 몰려왔다.


가장 아픈 곳이 어딘지 꼭 집어 말할 수도 없었지만 아무래도 팔이 문제인 것 같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봤다.

생각은 뻔한데 의지대로 팔이 올라가지 않는다.


도저히 이건 아니지 싶어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체육관이야. 넘어졌어. 좀 데리러 와."

당연히 가족 모두에게 비상이 걸렸고, 놀란 토끼보다 더 큰 눈을 하고 남편과 딸이 허겁지겁 데리러 왔다

상상했던 것보다는 나았던지, 아니 엄청난 상황을 상상했던지 식구들은 되려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병원 open (팔을 사용하지 못해 음성 받아 적기 기능을 사용 중인데, 아이패드가 미국출신이라 그런지 콩글리쉬도 찰떡같이 알아듣곤 영어로 적어낸다.) 시간은 아직 멀었지만 병원부터 가는 게 상책이라 일단 가서 기다리기로 했다.

먼저 X-Ray부터 찍고 결과를 기다렸다.

단순한 타박상으로 근육이 좀 놀랬겠거니 생각하며, 아니 그랬기를 바라며 진료실로 들어갔다.


여기 보이시죠?  양쪽 어깨 똑같은 위치에 골절입니다.
1cm 이상 벌어지면 수술이 불가피한데 아직 수술할 정도는 아니지만, 움직임으로 조금만 더 벌어져도
상황이 달라지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깨를 감싸고 있는 근육인데...
초음파를 찍어봐야 정확하게 알겠지만 만약의 경우 근육이 파열되었다면 수술해야 합니다.


‘뭐! 수술이라고?’ 다른 말은 뒤로 하고 수술이란 말에 잔뜩 겁부터 났다.

초음파 화면을 따라 마우스를 움직이는 선생님의 손과 입만 바라보고 있자니 입안이 바싹 타는 느낌이다.

천당과 지옥을 판가름하는 심판대에 올라선 심정이 이럴까.


다행이네요. 파열은 아니지만 지금부터 정말 정말 조심하셔야 됩니다.

‘휴~~ 정말 감사합니다.’


어깨뼈가 벌어지면 안 되기에 양쪽 팔에 깁스를 했는데, 그럼에도 불안했던 남편은 양팔을 차렷자세로 유지하게 한 채 끈으로 가슴둘레를 잴 때처럼 묶어두자고 했다.

혹시라도 자다가 옆으로 누워 어깨가 눌려지거나, 몸에 익은 동작들을 무의식적으로 취하게 될 상황에 대비해 단속을 하고 또 한다.


-


이후로 지금껏 나는 왕비 아닌 왕비 노릇을 하고 있다

화장실 갈 때, 밥 먹을 때, 눕고 일어날 때, 세수며 양치질.... 진짜 왕비처럼 호사(?)를 누린다.


가만히 있는데도 가려운 곳은 어찌 그리 많은지. 머릿속이 가렵다가 이내 등이, 손이 닿지 않는 온갖 곳이 다 가렵다.

그럴 때마다 남의 손을 빌리는데, 야속하게도 가려운 곳만 잘도 피해 간다...ㅜㅜ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자신만큼 자기를 잘 아는 사람도 없다는 게 실감 난다.


신체 중 양쪽 팔만 자유스럽게 못 쓸 뿐인데 행동에 엄청난 제약이 따른다.

평소 팔이 하는 일이 이렇게도 많았다니.


지난번 다리 다쳤을 때 이런 생각을 한 적 있다.

'차라리 다리 말고 팔이 다쳤더라면 덜 불편하지 않았을까. 다리와 양팔 중 아픈 곳을 선택해야 한다면 뭐가 나을까.?' 뭐 이런 쓸데없는 고민 말이다.

이번에 정작 팔을 다치고 보니 사람의 마음이 참 간사하구나 싶다.





어제는 남편이 머리를 감겨줬는데 30분은 족히 걸린 듯하다.

“샴푸를 짜서 손으로 거품을 낸 다음,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지문으로 두피를 마사지하듯 문질러 씻으면 돼.”

“... 아니, 그렇게 말고... 이렇게 하라고~ 아유... 답답해~!”


실랑이 끝에 겨우 머리를 감긴 했는데 어째 시원하지가 않다.

하긴 태어나서 한 번이라도 머리카락을 길게 길러 본 적 없으니 어찌 알겠는가.


부부끼리 운전 배워주다 간혹 이혼하는 경우가 있다는 말 이해가 된다며 서로 웃고 말았다.

"유튜브로 보고 배워서 다음번엔 더 잘해보겠습니다! 왕비님!ㅋㅋㅋ"


자르지 말고 계속 일하게 해 달라는 남편의 간곡한(?) 청을 거절할 수 없어 한 번 더 기회를 주겠노라고 하며 또 한 번 웃었다.

‘웃으니 좋네~ 이런 와중에도.’


불과 며칠 지났을 뿐인데도 집안 곳곳에 주부의 손길이 안 닿은 티가 난다.

식구들 나름대로 거실이며, 부엌이며, 화장실... 청소하느라 애쓰고 있건만 주부의 눈에 찰리가 있나. 

아무래도 지방에 사는 언니 찬스를 써야 할까 보다.


-


처음 며칠은 밤이 되면 통증이 더 심해 얼음찜질에 진통제로 견뎌야 했다.

꼼짝 않고 있으려니 온몸의 근육이 경직되고 쥐가 나서 자다가 식구들에게 비상을 걸었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고, 이대로 안 고쳐지면 어쩌나 덜컥 겁이 났다.

 

가만히 집안에만 있으면 안 되고 근육 운동을 해야 할 것 같다는 남편의 우려에 동의해, 깁스를 단단히 메고 집 근처로 나왔다.

산책로를 걷는데 사람이 아주 소심해진다.. 엎친 데 덮칠까 봐 작은 턱 하나에도 몸이 움찔하고 반응한다.


언젠가 시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기억이 난다. 나이를 먹으니 걷는 것도 무서울 때가 있다고. 그 마음을 비로소 알 것도 같다.

연로하신 어르신께 무조건 운동하라고 종용하면 안 되겠다는 깨달음을 이런 상황이 되어서야 비로소 얻었다.

좋은 의도가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닷새가 지난 지금은 이렇게 음성으로 글을 쓸 수 있을 정도로 많이 호전되었다.

팔꿈치를 갈비뼈에 붙이고 차렷자세로만 있자니 겨드랑이에 땀이 차 가려운 것 빼고는 그래도 견딜만하다.

여전히 왕비 노릇은 해야 하지만 말이다.


-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했던 시인은, 또 사람들은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을 테지만 적어도 나는 이 말에 동의하고 싶지 않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인 사건 사고 중에 하필 4월에 일이 많았던 건 사실이다.

그렇게 따지자면 3월, 5월 6월... 11, 12월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니 억지로 끼워 맞출 필요는 없지 싶다.


물론 내 인생에서 기억에 남을 굵직한 슬픈 일들이 하필 4월에 일어났지만,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언제나 나쁜 일은 생길 수 있다.

단지 만물이 소생하는 4월을, 연초록 봄을 그대로 지나 보내야 한다는 아쉬움에 조금 더 기억에 남게 안타까울 뿐이다.


까르페 디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뜻의 라틴어다.

호라티우스의 시 <오데즈(Odes)>에 나오는 구절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하는데,

영화〈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1990)에서 존 키팅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들려준 경구로 더 유명하다.


우리 옛말에도 비슷한 의미로 쓰이는 '밤새 안녕'이라는 말이 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어 하루아침에 어제와 다른 삶을 맞이해야 하는 순간이 운명처럼 찾아오기도 하는 게 인간의 삶이다.

그러니 현재에 충실하며 즐길 수 있을 때 즐겨야 한다.


-


"50대부터는 넘어져도 뼈가 다치기 쉬운 나이라 젊을 때 보다 더 조심해야 합니다."

의사 선생님의 당부가 아니더라도 너무 잘 알고 있다. 

잘 알면서도 마음만 앞서고 몸이 마음 따라가기 버겁다.


내 몸의 작은 변화를 잘 관찰하고 섣부른 자가 진단은 하지 말 것이며, 

매사에 더 주의 깊게 행동해야 하는 나이가 바로 50대 란다.

나이 들어 자식을 위하는 길은 스스로의 건강을 잘 보살펴 아프지 않고 사는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100세 인생이라 친다면 50대는 이제 겨우 절반 지났을 뿐이다

인생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은 나이라 마음의 여유도 덩달아 생기는 나이.

삶을 즐겨야 할 시기에 나처럼 예기치 않은 사고로 시간을 붙들어 두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아울러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가시라는 교훈을 꼭 상기하면 좋겠다 싶은 마음에 나의 골절 경험을 공유한다.

아파보니 알겠더라. 평범한 일상이 곧 기적이었다는 것을.

 

기적은 멀리 있지 않고 항상 우리 가까이에 있다.
기적이라고 해서 대단히 거창한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이 곧 기적이므로.



작가의 이전글 남쪽에서 날아온 진짜 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