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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공사 중인 집에 시부모님 오다.

by 베존더스

계약상 집 짓기는 4월에 끝난다고 되어있었다. 한국이라면 딱 맞게 끝났을 집 짓기지만 독일에서는 두 달이 연장되어도 끝내지 못했다. 시부모님은 이미 작년서부터 7월 비행기 표를 끊은 상황이었다. 6월 말이되어도 벽지 작업, 몰딩, 계단, 잘못 제작된 대문 갈이 등등 갈 길이 멀었다. 7월 2일 독일에 오시는 시부모님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 막막함 그리고 부담감이 큰 바위가 되어 나를 짓눌렀다. 급한 대로 시부모님이 머물 수 있는 방만이라도 벽지 작업이 끝나길 일꾼에게

부탁했다. 일꾼은 아침 8시부터 부지런히 벽지 작업을 했다. 3층에 방 5개인 집의 벽지 붙이기 작업은 한날 끝나지 않았다.


끝나지 않은 벽지 붙이기 작업으로 바닥 전체는 비닐로 덮였다. 급하게 옮긴 이삿짐은 방마다 가득했다.

겨우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공간만 터놓았다. 그 공간만이라도 쓸고 닦으며 최대한 정리해 보지만 해결책은 아니었다. 37도를 웃도는 날씨에 짐으로 가득 차 창문을 제대로 열지 못하니 마음속의 뜨거운 용함이 분출될 것 같았다. 시부모님 방문 날은 빠르게 다가왔다. 비행기 타고 오시는 내내 제대로 된 식사를 못 하셨을 것 같았다. 결혼하고 시어머니에게 배운 비법으로 만드는 김치찌개를 맛나게 끓였다. 제대로 쉰 적 없는 몸은

밤 10시가 되니 녹아내릴 것 같았다. 밤 11시가 되어서야 시부모님이 오셨다.


‘집 상태가 심각해요.’라고만 했지 구체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었다. 시부모님은 큰 캐리어를 끌고 들어오시며 집을 둘러보셨다. 두 분의 표정은 반가움보다는 깜깜한 밤만큼이나 어두웠다. “이렇게 까지 안되어 있을 줄이야.” 라며 깊은 한숨을 내쉬셨다. 3년 만에 뵙는 시부모님 앞에 나는 가시방석에 앉아 두 분의 표정을 살피기 바빴다. 내가 이렇게 까지 눈치를 보는 데는 집 짓는데 시부모님의 도움이 컸기 때문이다. 공사 마무리가 안된 건 내 잘못이 아니었지만 내 잘못 같은 죄스러움으로 가득했다.


어머님은 한 방에 옹기종기 잠든 아이들 얼굴을 보시고는 몇 달 전부터 아들 손자, 며느리 생각하며 싸 오신 짐을 푸셨다. 건어물, 고추장, 무장아찌, 더덕장아찌, 아이들 과자 등등 꼼꼼히 싸 오셨다. 정리하고 방으로 올라오니 밤 12가 넘었다. 빨리 자야 내일을 견딜 수 있는데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삼 남매 체온이 가득한 방안은 찜질방 같았다. 살짝 창문을 열고서야 잠에 들 수 있었다. 잠든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1층 거실에서 부스럭 소리가 들려왔다. 새벽 4시였다. 띵띵 부은 눈을 겨우 뜨며 아래로 내려갔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불편하셨죠?” “아냐 괜찮아 잘 잤어.”라며 침묵이 이어졌다. 거실에 가구라면 소파뿐이었다. 소파에 겨우 몸을 기댄 아버님 표정이 어두웠다. 아버님의 침묵은 심장을 옥죄는 것 같았다. 때마침 내려온 둘째 테디베어 덕분에 거실 공기가 가벼워질 수 있었다.


애써 웃으며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어젯밤 끓여둔 김치찌개에 밑반찬으로 한 상 차려드렸다. 식사하는 아버님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케아에 가서 필요한 가구 몇 가지 사다가 짐 박스라도 풀자.” 남편은 어머님과 이케아에서 살 가구를 의논했다. 그사이 난 정신없이 삼 남매 등원 준비를 끝냈다. 아버님은 삼 남매 등굣길도 함께 하셨다. 차에서 내린 둘째 테디베어 손을 잡고 정문까지 데려다주셨다. 셋째 공주님도 마찬가지였다. 등원을 마치고 어머님이 필요한 몇 가지를 사기 위해 큰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어머님 하고는 도란도란 대화가 되는데 난 여전히 아버님이 어려웠다. 언제나 한결같은 무표정인 아버님의 기분을 읽어내기란 쉽지 않았다. 눈치 빠르고 애교가 철철 넘치는 며느리가 아니다 보니 아버님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시부모님 방문으로 남편은 직장에 휴가를 냈다. 남편까지 일 나간 상황이라면 숨조차 편히 쉬지 못했을 것 같은데 그나마 다행이었다.

슈퍼마켓에 다녀오고 집에서 가까운 산책로로 향했다. 여름의 우거진 숲 사이로 뻗은 길을 따라 걸었다. 전날 천둥 번개 치고 비가 쏟아져 내린 탓에 호숫가에 물이 가득했다. 솔솔 불어오는 아침 공기가 시원했다. 집 짓는 동안 매일 같이 들리곤 했던 호숫가에 아버님과 어머님도 함께였다.


다음 날 거실에 벽지 작업 때문에 집에 있을 수 없었다. 삼 남매가 돌아오는 시간에 차를 태워서 이케아로 갔다. 아버님과 어머님은 시차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아이들 책상을 둘러보셨다. 독일에서 자유롭게 자란 삼 남매는 진중하지 못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이것저것 고르는데 한국에 유교 사상이 강한 아버님 눈에는 아이들이 버릇없어 보였다. 남편은 어머님과 이것저것 찾느라 바빴고 난 삼 남매 잡도리하느라 바빴다. 사춘기 첫째 듬직이는 강압적인 할아버지가 어려웠고, 마음 약한 둘째 테디베어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깨발랄 다운천사는 분위기 파악 못하고 뛰어다녔다. 고작 이케아에 왔을 뿐인데 이주 후 떠나는 여행에서는 어떨지. 눈을 꾹 감고 크게 심호흡했다. 모두가 평안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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