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학교가 끝나는 시간이었다. 교문 앞에서 기다렸다. 둘째는 자신의 반 만한 가방에 학교에서 쓰던 물건을 가득 담아 들고 나왔다. 걸어 나오는 발걸음이 손에 들린 가방만큼이나 무거워 보였다. 나를 보자마자 눈망울이 묽게 번졌다. 나 또한 슬픔을 삭히며 둘째를 품에 끌어안았다. 마음고생했던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녀석,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니.’
둘째는 코로나를 겪으며 몇 달씩 닫힌 유치원에 가지 못 했다. 한국인 가정에서 독일어를 쓰면 얼마나 썼겠는가. 독일어가 부족한 채로 학교에 입학했다. 학업을 따라갈 수 있도록 독일어 과외도 붙였다. 담임선생님이 추천해 준 언어치료실에도 꾸준히 보냈다.
집중력이 부족하고 산만하다는 이유로 혹시 ADHD가 아닐까 의심된다는 말에 IQ, EQ, 상담, 뇌파검사도 받게 했다. 검사 결과 모두 정상이었다. 우리의 노력에도 둘째는 여전히 제자리였다. 1학년에는 그럭저럭 따라갔다. 2학년이 되며 어려워졌다. 계속 수업을 따라가지 못한다면 독일에서는 유급해야한다.
담임은 우리에게 유급대신에 전학을 권유했다. 전학을 가더라도 유급은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익숙한 이 학교에 머물며 유급하는 게 나았다. 그런 우리의 의도와 상관없이 담임은 “독일어가 부족한 둘째를 위해 지금 학교에서는 도와줄 수 있는 시스템이 없어요. 전학을 추천한 학교는 독일어가 부족한 아이들을 위해 방과 후에 독일어 수업이 있어요. 담임선생님 외에도 보조선생님이 있어 이해가 어려운 아이들을 도와줄 거예요. “ 라며 우리가 충분히 생각하고 결정 하라며 일주일이란 시간을 줬다.
이미 답은 나온 상태다. 무슨 선택을 하라는 건지. 이 학교에 더 이상 머물 수 없었다. 남편과 의논 끝에 추천받은 학교에 대한 전학 신청서를 교육청으로 보냈다. 독일에서는 전학 건도 교육청에서 담당한다. 전학 신청서를 보내고 2주가 지나서야 편지를 받을 수 있었다. ‘당신의 아들은 전학을 가지 못합니다. 이유는 당신의 아들은 독일어가 부족하지만 도움을 받을 정도는 아닙니다. 충분히 지금의 학교에서 유급하고 다닐 수 있습니다.‘
전학도 마음대로 못 간다. 답답한 마음에 눈을 꾹 감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담임선생님도 같은 편지를 받았다며 연락이 왔다. 또 상담이었다. 그러면서 담임은
3가지를 우리에게 제한했다.
1. 교장선생님의 소견서로 전학을 다시 진행해 보기.
2. 새 학기가 시작되는 가을까지 이대로 가다가 근처에 아무 학교로 전학 가기. (주변학교에는 한 반에 22명이니 둘째가 보살핌을 받을 수 있을 거란다.)
3. 별로 권하고 싶지 않지만 유급하기.
이렇게 까지 전학을 보내려는 담임이 이해가지 않았
다. 첫째도 이 학교에서 유급을 했었고 지금은 중, 고등학교에서 상위권에 있다. 유급의 기회를 줘야 하는 게 맞았다. 독일어 과외 선생님, 언어치료 선생님도 둘째는 점점 좋아지고 있고 수업태도도 좋아졌다고 한다.
‘왜? 담임만 우리 아이에 대해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며 가능성을 보지 않으려 할까?’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전학을 신청했었고 교육청에서는 유급을 권했다. 우리의 태도가 중요했다. 이번에는 강경하게 우리의 의사를 전달했다. ”주위에서 우리 아이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데. 왜? 우리 아이를 포기하나요? 마음이 편치 않아요. 많이 힘들었고 이해할 수 없어요.“ 라는 말에 담임은 손사래를 치며 둘째를 포기한 적이 없단다.
우리의 위중을 이제야 받아들인 담임은 유급을 시켜줬다. 마음 졸이며 학교서 하라는 건 다 했던 우리. 속상함에 잠을 이루지 못했던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둘째가 가져온 짐을 풀며 1학년 입학하며 준비했던 가위, 크레파스, 물감, 붓. 2학년에 올라가며 새로 샀던 스케치북, 단어카드, 교과서를 하나하나 꺼냈다.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담임이 자신을 싫어한다는 걸 느꼈을 텐데. 그동안 둘째는 어떻게 견뎠을까? 그럼에도 학교 가기 싫다는 말 한마디 없었던 녀석이 대견하다.
다음 주부터 1학년을 다시 시작하는 둘째에게 마음 따뜻한 담임을 만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