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뜨거운 피’가 끓기엔 늙어버린 장르
소설가 천명관 작가의 영화 입봉작 ‘뜨거운 피’가 개봉 소식을 알렸다. 동료 소설가 김언수 작가가 집필한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기존 건달 영화와는 다른 색다른 면모를 표방하며 관객 앞에 나섰다.
영화 '뜨거운 피' 스틸. 사진 (주)스튜디오 디에이치엘 , (주)키다리스튜디오
허나 기대와는 달리 ‘뜨거운 피’(감독 천명관) 역시 지난 한국형 누아르 영화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새다. 진실로 이제는 새로운 모습의 한국 누아르 영화를 바랐던 입장에서 안타깝기도 하다. 영화의 깊이가 얕거나 캐릭터가 어설프다는 등의 문제가 아니다. 살아남기 위해, 정상으로 올라가 왕이 되기 위해 치열하게 사투를 벌이고 암계를 펼치는 밑바닥 인생들의 이야기가 너무 익숙해져 버린 탓이다.
한국 건달 영화라 하면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몇 작품들이 있다. 기업형 조폭들의 화려함을 그린 ‘신세계’(2012)를 비롯해 조인성이 주연을 맡아 삼류 건달의 인생에 녹아 들었던 ‘비열한 거리’(2006)도 있다. 당연히 ‘고마 해라, 마이 묵었다 아이가’를 유행시키며 우정이 파국으로 치닫는 이야기를 그린 ‘친구’(2001)도 빼놓을 수 없다.
영화 ‘뜨거운 피’는 이 중 한국형 건달 영화의 원형인 ‘친구’와 건달의 비루한 삶을 더욱 세밀하게 파고든 ‘비열한 거리’의 방식, 이야기에 가깝다. 부산을 배경으로, 진한 우정과 의리를 지키고 있던 건달들이 결국 비참한 결말을 맞이한다. 큰 사업도 벌리고, 얼핏 부산 지역을 장악할 것이라는 투로 이야기 하지만 살림살이는 도통 나아지질 않고, 법도 윤리도 지켜줄 수 없는 냉혹한 세계에서 목숨을 하루하루가 위태롭다.
영화 '뜨거운 피' 스틸. 사진 (주)스튜디오 디에이치엘 , (주)키다리스튜디오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과 정상을 차지하기 위한 욕망 분출의 기로에서 고민하는 면면이 나름 새롭긴 하다. 주인공을 비롯해 기업으로 탈바꿈했거나 사채 받아내기보단 실제로 생업에 종사하는 듯 보이는 건달들의 일상도 그렇다. 허나 앞서 언급한 사안들만 봐도 너무나 익숙한 구성이다. 출중한 연기력의 배우들이 아무리 캐릭터에 생기를 불어넣더라도 이미 수없이 만났던 얼개에 재미는 한없이 반감된다.
당장 지난해 11월 개봉했던 ‘강릉’도 마찬가지였다. 감정을 억지로 고양시키는 신파도 여전하다. 다행히 익숙한 만큼 편안하고, 만듦새는 좋아 킬링타임을 위해 즐기기엔 적당한 편이다. 다만 강한 부산 사투리를 사용함에도 음향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못했는지 몇몇 대사들이 들리지 않는다. 종종 자막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든다. 나름 삶에 대한 고찰을 풀어내는 대사가 중요한데도 웅얼거리는 말들에 답답함이 가중된다.
요컨대 이야기의 내용이나 캐릭터 설정, 연출의 완성도보단 장르 자체가 갖는 고루함과 피로함이 영화를 향한 재미와 기대를 앗아간다. 지난 영화들에서 반복됐던 클리셰 역시 여전하고, 신파도 마찬가지다. 캐릭터 내면의 감정선만 차별화한 것으로는 부족했다. 원작 소설의 깊이 덕분에 이야기가 산으로 가거나 허술하진 않지만 지루함에 답답한 것은 어찌할 수 없다.
영화 '뜨거운 피' 스틸. 사진 (주)스튜디오 디에이치엘 , (주)키다리스튜디오
#영화 기본정보
부산 변두리 작은 포구 '구암'의 절대적인 주인 '손영감’(김갑수), 그의 밑에서 수년간 수족으로 일해온 '희수'(정우)는 무엇 하나 이뤄낸 것 없이, 큰돈 한번 만져보지 못한 채 반복되는 건달 짓이 지긋지긋하다. 1993년, 범죄와의 전쟁 이후 새로운 구역을 집어삼키기 위해 물색중인 영도파 건달들은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구암’에 눈독을 들이고, 영도파 에이스이자 ‘희수’의 오랜 친구 '철진'(지승현)이 '희수'에게 은밀히 접근한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희수’는 갈등하고, 조용하던 ‘구암’을 차지하려는 밑바닥 건달들의 치열한 생존 싸움이 시작된다.
개봉: 3월 23일/ 관람등급: 15세 이상 관람가/감독: 천명관/출연: 정우, 김갑수, 최무성, 지승현, 이홍내/제작: ㈜고래픽처스/배급: ㈜스튜디오 디에이치엘/러닝타임: 120분/별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