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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erimi Oct 08. 2021

엄마의 아픈 손가락


연년생으로 나와 한 살 터울의 오빠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존재했던 '빠른 년생' 인 덕분에 학년으로는 나와 두 학년 차이가 났다.


오빠가 고등학교 1학년 때였으니까 나는 중학교 2학년이었나 보다. 그때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오빠가 해준 이야기였다. 오빠네 학교 교내 백일장에서 장원을 받은 학생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 장원 글은 학생이 직접 쓴 것이 아니라 지금은 고인이 된 신해철의 노래 가사를 베껴 쓴 글이라는 게 밝혀져서 학교가 발칵 난리가 났다고.


킥킥대며 이야기를 전해주면서 오빠는 인터넷에서 그 노래를 찾아 틀어주었다. 故신해철의 밴드 넥스트의 <아버지와 나 part 1> 이었다. 우리 남매에겐 아버지가 없었는데도 우리는 '가사가 좋다' 며 함께 그 곡을 여러 번 돌려 들었다.


어릴 때의 우리는 흔한 남매들이 그렇듯이 항상 싸웠다. 매일 싸웠다. 별 일도 아니었다. 그 시절의 모든 남매들은 싸웠다.


중학생이 되어 사춘기가 심하게 왔던 나는 엄마와 오빠의 골칫거리였다. 나를 답이 없는 문제아 취급하는 엄마와 오빠가 미웠다. 그때는 그랬다. 변명하자면 나도 기댈 곳이 없어서 그랬다. 엄마는 늘 내게 화만 냈고, 오빠는 늘 나를 한심해하는 것 같았다.


격정의 사춘기를 보낸 나와 달리 오빠는 딱히 사춘기라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조용히 학교를 다니고 말없이 학원을 다녔다. 공부도 썩 잘해서 엄마의 희망이 되어주었다. 중학생 때 오빠와 같은 학원을 다녔을 때는 수학선생님이 1년 만에야 우리가 남매라는 것을 알고 놀라워하시던 게 기억이 난다. '뭐? 남매라고? 너희가?' 어쩐지 그 선생님의 눈빛에 이렇게 쓰여 있는 것 같았다. '오빠는 공부도 잘하고 성실한데 너는....'  


평소의 성적에 비해 낮게 나온 수능 점수에 모두들 안타까워했지만 그래도 오빠는 무난히 대학에 진학을 하고, 갖가지 아르바이트도 하고, 실습도 하고, 또 실습을 통해 돈도 벌었다. 오빠의 이십 대 초중반은 또 그렇게 흘러갔다.


그즈음 오빠는 자기가 번 돈으로 대학교 기숙사에서 지내고 있던 내게 노트북을 사주기도 했다. 학교에서 회사와 단체로 계약을 해서 재학생에 한해 저렴하게 살 수 있도록 해 준 기회라는 걸 알고 두 말 없이 그냥 사라고 했다. 그래도 우리에겐 큰돈이었는데, 고맙고 미안했다.


그 시절 오빠가 습관처럼 곧잘 하던 말은, '내가 빨리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데.' 였다. 내가 빨리 돈을 벌어서 엄마랑 니랑 먹여 살려야 되는데. 그러면 나는 진심으로 어이가 없어서, '나는 내가 알아서 먹고 살 거야, 그리고 엄마도 알아서 할 거야, 오빠는 오빠 인생이나 살아.' 라고 말했다. 그때의 나는 내가 여전히 한심한 짐짝 취급을 받는 게 싫었다. 그래도 오빠가 보기엔 여전히 답이 없고 철이 없는 동생이었던지, '내가 빨리 돈을 많이 벌어서 저 둘을 먹여 살려야 되는데.' 하는 생각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십 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우리 남매는 각자 취업을 하고 제 밥벌이를 하기 시작했다. 그즈음 엄마는 오랫동안 왕래하던 아저씨와 재혼을 하셨다. 내가 열아홉 살 때 처음 만나 인사했던 아저씨였다. 엄마는 우리 남매의 혼기가 차오르니까 더 이상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지내면 안 되겠다는, 나름의 결심을 하신 거였다. 그 결심 안에는 엄마가 빨리 재혼을 해서 자식에게 짐이 되지는 말아야겠다, 는 이유도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셋은 참으로 서로의 인생에서 서로가 짐이 되지 않기 위해 나름 각자 최선을 다하며 살았구나 싶기도 하다.


하여튼 나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받아들였다. 새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른 적은 없었지만 워낙 오래 알고 지낸 사이여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매 학기 시작 전, 대학교 기숙사에 들어갈 때마다 내 짐들을 실어 날라주셨고, 학교 실습 때 기관에서 억지로 마시게 한 술 때문에 필름이 끊기면 나를 우리 집까지 업고 올라가시기도 하고 뭐 그랬으니까. 그 시기에 새아버지가 안 계셨으면 나는 또 여러모로 어려운 시간들을 보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시기의 오빠는 해외 실습 중이었다.)


합가를 하고 내가 먼저 결혼을 해서 집을 떠나기 전까지 2년 정도 같이 살았던 것 같다. 새아버지와 엄마, 오빠, 나, 이렇게 넷이었다. (새아버지의 세 자녀들은 모두 결혼과 취업으로 독립을 한 지 오래였다.)


나는 별다를 것 없이 살았다. 계속 일만 하다가 나중엔 연애도 하고 결혼도 했다. 예식장에는 신랑의 팔짱을 끼고 동시 입장을 했지만 그래도 엄마의 옆자리에는 새아버지가 앉아계셨다. 그때 오빠는 홀 앞에서 축의금을 받느라 정작 내 결혼식은 보지 못했다고 했다.


내가 결혼한 그 다음 해에 오빠도 결혼을 해서 집을 떠났다. 올케언니는 착하고 속이 깊었다. 엄마는 마음이 여리고 성격이 예민한 오빠가 착하고 좋은 사람과 결혼을 해서 정말 다행이라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다.  


엄마와 오빠와 나. 가난하고 서글펐던 시절을 견뎌온 우리 셋은 모두 각자의 결혼으로 각자의 가정을 꾸렸다. 마침내 힘겨웠던 시간들을 다 지나왔다.


그래, 이제는 다 지나왔다고, 그렇게 이야기가 전래동화처럼 잔잔한 과거형으로, 또는 앞으로 행복만 할 거라고 미래지향적으로 마무리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텐데.


올초 설 연휴가 다 지나고 얼마 뒤에 친정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그때 코로나19 확산세가 심해서 설 명절에도 친정에는 가지 않았던 참이었는데, 오빠네는 친정에 잠시 들른 모양이었다. 이런저런 안부를 주고받다가 엄마가 우울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ㅇㅇ이가 틱이 생겨서 치료를 다닌다는구나."


ㅇㅇ이는 올해로 일곱 살이 된 오빠의 첫아들이자 나의 첫 조카였다. 그럴 수도 있죠, 요즘 워낙 흔하고 많던데, 그 우리 큰 애랑 같은 어린이집 나온 친구 누구도 그렇대요, 크면서 대부분 없어지기도 한대요, 괜찮을 거예요. 나 역시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는 듯했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괜찮을 거라고 믿고... 또 괜찮을 거라고...


많은 일들을 겪으며 살아온 친정엄마는 좀처럼 쉽게 동요하는 성격은 아니셨다. 서른한 살에 남편이 말없이 혼자 집을 나가버려 남은 빚과 어린 두 아이와 시어머니까지 건사하며 살아내셨으니까.


결혼을 코앞에 앞두고 예비 시어머니의 과도한 간섭 때문에 괴로워하는 나를 보다 못한 엄마는 당장 시어머니를 만나 본인이 살아오신 이야기를 덤덤하게 모두 쏟아내신 적도 있다. 힘든 세월 버티면서 딸을 키웠다고, 나한테는 귀한 딸인데 그 딸이 결혼을 하겠다고 해서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만으로 시키는 결혼이니 부디 아이들이 자신들의 뜻대로만 살게 해 달라고. 그때 시어머니도 눈물을 글썽이며, '제가 잘못을 했습니다.' 하셨다. (물론 그래도 간섭은 크게 줄어들진 않았다.) 내 결혼식장에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는 친가의 큰집 식구들이 엄마 옆에 서 계시는 새아버지를 보곤 성을 내며 돌아가버렸다는 그 황당한 일에도 엄마는 신부인 내가 알지 못하도록 조용하고 침착하게 결혼식을 진행하셨다. 폐백실에서 우르르 대거 모여있는 시가 식구들 맞은편에 새아버지와 둘이 덩그러니 앉은 엄마 앞에서 절을 하다가 울음을 터뜨린 나를 보면서도 엄마는 그저 웃기만 하셨다. 좋은 날에 왜 울고 그러냐, 하실 뿐이었다.


그랬던 엄마가 가슴 아파하며 눈물을 흘리셨다. 손주의 아픔은 아들의 아픔이었고 그건 엄마의 아픔이기도 했다. 그 뒤로 엄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빠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 나는 그제야 그동안 내가 내 인생이나 엄마의 인생을 불쌍히 여기며 아파해왔으면서 왜 오빠의 인생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까 싶었다.


울고 소리치며 온몸으로 발악하는 사춘기를 보낸 나와 달리 오빠는 아마도 묵묵히 참아내기만 했던 모양이라고, 이제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는 우리 가족의 유일한 남자면서 또 맏이였다. 아마 그는 일찍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부터 스스로 마음에 짐을 지고 그 무게를 버텨내 왔을 것이었다. '내가 빨리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데.' 하면서 말이다.


엄마는 자신의 아들이 아버지 없이 자란 것을 가슴 아파하셨다. 딸에게는 엄마가 있었으나 아들에게는 아버지가 없었다. 그 차이는 너무나 컸을 텐데 어린 나는 그런 생각을 못했다. 나만 제일 힘들다고 생각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배울 수 있는 많은 것들을 그는 배우지 못했을 것이었다. 의지할 곳도, 기댈 곳도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빨리 돈을 많이 벌어서 저 둘을 먹여 살려야 되는데.' 하면서.


지난봄에 오빠네 식구와 함께 가벼운 나들이를 했었다. 가까운 공원에 돗자리를 펴고 김밥을 먹었다. 네 명의 아이들은 몹시 즐거워했다. 킥보드를 타고 달려 나간 아이들을 따라 남편과 올케언니가 모두 자리를 비워 우리 남매만 남았을 때였다. 지나가는 말인 것처럼 오빠가 그러는 거다.


가끔씩 ㅇㅇ이한테 화가 나면 참다 참다 결국 참지 못하고 폭발할 때가 있는데, 그럼 지나치게 화를 내면서 혼을 심하게 낸다고. 참아야 한다는 걸 아는데도 그게 잘 안된다고.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별로 없었다. 그냥, 엄마가 우리한테 그랬었으니까, 결국 우리가 엄마를 닮은 거 아니겠냐고.


ㅇㅇ이가 틱 증세로 치료를 다니는 센터에서 아빠가 몸으로 놀아주는 게 아주 중요하다고 했단다. 그런데 또 오빠가 그런다. 노력은 하는데, 사실은 그게 어떻게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고. 또 내가 그랬다. 우리가 자랄 때 그런 사랑을 못 받아봤으니까,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냐고.


오빠는 올해 나이 마흔에 접어들었다. 먹을 만큼 먹었다고 할 수 있는 나이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그런 그를 보면서 나는 이제야 궁금해진다. 우리 어릴 때 오빠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자랐느냐고. 그때 아무 말이 없어서 나는 몰랐다고. 어릴 때 엄마가 우리 때문에 힘들다고 하면 나는 똑같이 엄마한테 대들면서, 누가 낳아달라 그랬냐고, 왜 마음대로 낳아놓고 나 때문에 힘들다 그러냐고 소리를 쳤는데. 그때 아무 말이 없던 오빠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냐고.


어릴 때 외가의 같은 동네 골목에 하필이면 친가의 큰집이 있었다. 친아버지의 큰아버지 뭐 그런 큰집이었다. 정말 하필이면 같은 동네에 있다 보니 명절에 외가에 가면 엄마는 굳이 우리 남매를 큰집에 보내셨다. 그래도 인사는 하고 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 가기 싫었다. 친아버지도 안 가는 그 집에, 친아버지도 없는 그 집에, 내가 왜? 싶었다. 그즈음의 나는 내가 내 아버지의 자식이라는 것에 화가 나 있었다. 버릴 거면 왜 낳았나, 싶은 심정이어서 그랬다. 중학생이 된 후로는 나는 그 집에 가지 않았다. 가기 싫다고 끝까지 버티는 나를 두고서, 그럼 혼자 갔다 오겠다고, 오빠는 혼자서 갔다. 그때의 오빠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 나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지금은 물어보고 싶다. 내가 견디지 못했던 그 많은 순간들을, 어떻게 아무 말 없이 견뎌냈냐고.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느냐고.


엄마는 가슴 아파하며 우셨다. 오빠보다 1년 먼저 결혼을 해서 집을 나간 나는 미처 몰랐는데, 그 후로 새아버지와 오빠는 사이가 아주 나빴다고 한다. 딸이라서 그런지 내게는 별다를 게 없었지만, 새아버지가 전남편의 아들인 오빠한테는 아주 못되게 하셨단다. 엄마는 그럴 줄 알았으면 재혼을 하지 말걸 그랬다고 하셨다. 아버지 없이 자라게 한 것도 속상한데, 하필 재혼을 해서 새아버지로 부터 또 마음의 상처를 받게 했다고, 가슴이 미어진다고 하셨다.


더구나 나의 기억 속에서는 희미하기만  친아버지는 오빠를 때리면서 키웠단다. 딸인 나를 때리지는 않았지만 아들인 오빠는 심하게 때렸단다. 이마에서 피가 줄줄 흐르기도 했단다.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눈물이 난다고 하셨다.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일들은 오빠의 기억 속에서는 여전히 살아있을 것이었다.


누구라도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고 엄마는 말씀하셨다. 하필 아무도 없었다. 일곱살 이후로 아들에겐 아버지도 없었고, 아버지 비슷한 남자어른도 없었고,  흔해 빠진 사촌  하나도 없었다. 오빠가 결혼하고    만에 장인어른께서 돌아가셨는데,  마저도 엄마는 너무 슬펐다고 하셨다. 아들이 마음을 기댈 남자어른이  명이라도,  누구라도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말이다.


오빠에게 아버지란 존재의 모습은 도대체 어떤 모습일까. 친아버지 그리고 새아버지. 다시 아버지가  자기 자신. 나는 함부로 헤아릴  없다.


구구절절하게 쓰고 있는 이 긴 이야기를 나와 같은 핏줄을 타고 난 그에게 언젠가는 보여줄 수 있을까. 나도 잘 모르겠다. 나는 내가 아는 사람이 내 글을 읽는 것이 불편하고 부담스럽다. 남편조차도 내가 글을 쓴다는 걸 모른다. 그래도 언젠가는 그가 이 글을 읽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쓰고 있다.


그 외롭고 힘들었던 어린 소년을, 이제는 아버지가 된 그 자신이 보듬고 안아주었으면 좋겠어서.


글쎄, 혹여나 이 글을 읽게 되는 날이 온다 해도 그는, 뭐 다 지나간 일이지, 하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그냥 웃어넘길지도 모른다. 원래 그런 성격인 건 나도 안다.


그래도 나는 말해주고 싶다. 우리 어렸을 때, 고생 참 많았다고. 정말 힘들었을 텐데, 그래도 오빠가 잘 버텨줘서 엄마도 그 시간들을 견딜 수 있었고, 나도 잘 자랄 수 있었다고. 고마웠다고.


그러니까 우리, 우리의 부모와 우리 남매의 슬픈 역사는 이만 끊어내자고. 사랑을 받지는 못했지만, 사랑을 주는 사람은 한 번 되어보자고.



언젠가 그들의 이야기는 먼지가 되리라
세상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이
언젠가 이 노래는 잊혀지리라
세상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이
그러나 아들은 아비를 기억하고,
또 아들의 아들이 그 아비를 기억하며
그들의 피는 이야기나 노래보다는
조금 더 오래 흐르리라
그리하여 우리 세상에 잠시 있었던 것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이야기하리라
다른 시간 다른 곳에서 다시 만나

故신해철 - STARMAN
(미발표곡, 아버지와 나 part 3)


그때 아버지 없이 자라던 그 소년은 <아버지와 나> 를 들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역시 나는 알 길이 없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또한 아들의 아버지가 된 그 소년이 다시 이 노래들을 들어보았으면 좋겠다. 몇 번이고 다시 들어보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가

부디

아들의 아버지로서도

후회 없는 삶을 살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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