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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산드라 Dec 30. 2021

헤이트풀8

* 스포일러 있습니다.

헤이트풀8(2015)

이 영화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데뷔작, '저수지의 개들'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이 영화는 싸구려문화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고 스탠리 큐브릭과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무겁고 진지한 이야기에 쩔어있던 헐리우드에 '자 이제 오락영화나 한 편 신나게 보자'라고 선언하는 작품이었다. 그 후 헐리우드와 세계 영화의 흐름은 바뀌었고 이동진 평론가는 90년대 세계 영화계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작품을 두 개 고르라면 '저수지의 개들'과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이라고 한 바 있다. 타란티노는 대중소설과 로저 코먼 류의 B급 영화 감성을 가지고 있고, 특히 초기작들은 장 뤽 고다르의 이야기를 해체하는 유럽 예술영화풍의 시놉시스를 가지고 있다. '저수지의 개들'을 한 줄 평 해보자면 이렇다. 의미 없는 대화들의 핑퐁으로 이루어진 내용 없는 스타일을 선정적으로 선전하는 재미있는 쓰레기 더미.


저수지의 개들(1992)

"영감을 준 분들에게 이 영화를 바친다. 티모시 캐리, 로저 코먼, 안드레 드 토스, 주윤발, 장 뤽 고다르, 장 피에르 멜빌, 로렌스 티에니, 라이오넬 화이트..." 저수지의 개들 시나리오 첫 페이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이것은 타란티노 영화 필모그래피를 꿰뚫고 있는 감성이기도 하다. 타란티노는 엄청나게 많은 머릿속 영화 아카이브에서 이것저것 좋아하는 것과 재밌어보이는 것을 꺼내어 퀼트를 만들듯 짜집기하여 한 편의 끝내주는 오락영화를 만들어낸다. 일명 오타쿠의 영화. 특히 이런 감성은 '킬 빌'에서 정점을 찍는데 나는 '킬 빌'의 한줄평을 이렇게 적어놨다. "타란티노 이 끝내주는 오타쿠, 어디서 김치똠양꿍스파게티 같은 걸 만들어와서 내미는데 중요한 건 맛있다 냠냠." 타란티노는 당당히 선언했다. "위대한 아티스트들은 도용을 하지, 오마주를 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타란티노는 엄청난 쓰레기 대화 더미들을 만들어내었고, '저수지의 개들'에 나오는 캐릭터들에게 그 대화를 신나게 뱉어내도록 시켰다. 그리고 후대의 위대한 아티스트들에 의하여 열심히 오마주당했다. 지금 생각나는 '저수지의 개들'을 오마주한 영화만 해도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 '도둑들', '불한당', '아모레스 페로스'... 그리고 아마 훨씬 더 많이 있을 것이다.


'헤이트풀8' 리뷰인데 '저수지의 개들'이야기를 쓰고 있는 것은 두 영화가 기본적으로 같은 시놉시스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개성이 강한 캐릭터들을 만들어놓고, 그 개성이 강한 캐릭터들이 밀폐된 장소로 한데 모이게 만들고, 그 안에서 쓰레기더미 대화로서 갈등을 일으키다가 다 죽게 만든다. 차이가 있다면 가장 초기작인 '저수지의 개들'은 아무런 의미 없이 순수한 오락적 재미만을 좇고 있다면 8번째 영화인 '헤이트풀8'은 주제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타란티노 초기작과 후기작의 차이점이다. 초기작은 그야말로 싸구려 대중소설같다. 제목도 대놓고 '펄프픽션'으로 짓지 않았는가. 그러다가 더 적극적인 도용을 폭주처럼 해대는 '킬 빌'의 중간작들을 거쳐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장고: 분노의 추적자', '헤이트풀8'에서는 오락과 옛 영화들의 도용과 사회적인 이슈들을 섞는다. 그러다가 방향을 갑자기 꺾어 가장 최근의 영화인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헐리우드...'를 보면 다시 초기작들처럼 싸구려 대중소설로 돌아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자신이 영화를 보며 자랐던 그 시절에 대한 향수가 들어있다는 것. 다시 초기작 스타일로 돌아갈 기미는 '헤이트풀8'에서부터 보였는데, 오직 강렬한 캐릭터들과 오락적 대사만으로 이야기를 멱살잡고 이끌어나간다는 점이 그렇다.


헤이트풀8(2015)

사실 헤이트풀8는 세상에 나오지 못할 뻔한 위기를 겪은 영화다. 영화 크랭크인이 되기 전에 시나리오가 유출이 되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무 낙심한 타란티노는 이 영화를 찍지 않으려고 했었는데, 팬들의 요구가 너무 커서 배우들을 시켜다가 낭독회를 열었다. 그리고 그 낭독회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제발 이걸 영화로 찍어달라는 팬들의 요구와, 타란티노의 영혼의 짝궁 사무엘 L. 잭슨이 끈질기게 설득을 한 탓에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고 내 5점 만점에 5점 영화 리스트에는 영화가 한 편 더 늘게 되었다. 타란티노는 이 영화를 '보난자', '빅 밸리', '버지니아인' 같은 TV 웨스턴 드라마들에 착안해서 만들어내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그 웨스턴 드라마들에는 시즌에 두 번씩 무법자 무리들을 잡는 에피소드를 넣었다는 것이고, '헤이트풀8'에는 그런 히어로는 한 명도 없이 무법자들만 나온다는 것이다. 타란티노는 이렇게 말했다. "그저 범죄자 같은 사람들만 실내에 있는데, 그들 전언이 진실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는 각자의 사연을 털어놓는 거야. 밖에서는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가운데 실내에 그 사람들을 가둬놓고 그들에게 총을 쥐어준 다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는 거야."


와이오밍의 드넓은 광야를 배경으로 그 옛날 '벤허'를 찍었던 70mm 울트라 파나비전으로 촬영한 이 영화는 호화로운 와이드스크린을 가지고 있지만, 타란티노가 만든 가장 비좁은 영화다. 영화의 전반부는 대부분 역마차 내부의 장면을 찍고, 영화의 나머지 부분은 잡화점 내부를 찍는다. 설원 위의 웨스턴 영화. 그 기초설정만으로 이 영화는 가슴을 뛰게 만드는데, 오프닝 장면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의 뒤편으로 달려 지나가는 역마차는 결국엔 모두가 죽게 되리라는 묵시록적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하고 그리스도의 등 뒤로 지나간다는 점에서 메시아는 아무도 없고 모두가 악인일 것이라는 암시를 하기도 한다.


영화는 '장고: 분노의 추적자'에서 처음 등장했던 웨스턴 장르 현상금 사냥꾼 캐릭터를 전면으로 등장시킨 후에, 갱스터를 등장시킨다. 하지만 두 무리를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것은 자기가 죽인 시체더미 위에 앉아있는 현상금 사냥꾼 사무엘 L. 잭슨을 찍은 한 컷으로 설명된다. 그렇다, 이 영화의 모두는 악인이다. 악인들은 잡화점 내부에서 각자 총을 들고서 살벌한 분위기 속에 대화를 시작하고, 사람들이 하나둘 씩 죽기 시작한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후더닛 무비의 특징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뉴요커'의 안소니 레인은 이 영화를 일컬어 "불쾌한 혼합물, 즉 아가사 크리스티와 세르지오 레오네를 섞은 뒤에 포스트 모더니즘의 독약을 탄 작품"이라고 평했다.


사무엘 L. 잭슨은 단연 이 영화의 스타다. 타란티노가 '장고: 분노의 추적자'를 썼을 때 사무엘 L. 잭슨은 그 시나리오의 주인공인 장고 역할을 맡고 싶어 했지만 나이 때문에 하지 못했는데(그래도 사무엘 L. 잭슨은 '장고: 분노의 추적자'에 인상깊은 역할로 등장해서 한껏 기량을 뽐냈다.) 타란티노는 그런 사무엘 L. 잭슨에게 '헤이트풀8'의 역할을 선물했다. 가장 흥미로운 배역이라고 하지 않는 이유는 데이지 도머그 역의 제니퍼 제이슨 리가 있기 때문이다. 제니퍼 제이슨 리가 얼굴에 카리스마를 뽐내며 기나긴 대사를 치는 장면은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만들 정도로 매력적이다. 나는 이 영화를 사무엘 L. 잭슨과 제니퍼 제이슨 리의 영화라고 하고 싶다. 물론 모든 캐릭터들이 매력적이지만.


또한 '헤이트풀8'은 인종갈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영화를 끝까지 보면 7명의 백인(그 중에 한 명은 여성), 그리고 1명의 흑인이 있는 남북전쟁이 막 끝난 시기의 비좁은 잡화점은 미국 사회를 은유하고 있다는 것이 명백히 보인다. 남부 출신으로 영화 내내 흑인에 대한 차별을 하던 보안관 윌튼 고긴스는 마지막에 사무엘 L. 잭슨과 함께 악인을 처벌하자며 제니퍼 제이슨 리를 목메달아 죽이는데, 백인 남성과 흑인 남성이 함께 힘을 합쳐 백인 여성을 목메달아 죽이고 흑인 여성은 이미 죽어서 8인 중에 끼지도 못한다는 점이 아주 미국 사회 답다. (타란티노는 인종 문제만 생각하고 이 시나리오를 쓴 것 같지만 어쨌거나.) '장고: 분노의 추적자' 또한 인종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그것은 좀 더 오락적인 요소에 가깝고 진지하게 주제로 택하지 않은 면모가 보이는데 '헤이트풀8'은 작정하고 인종문제에 대해서 다루었다는 것이 보인다. 타란티노는 '장고: 분노의 추적자'는 질문이고 '헤이트풀8'은 그에 대한 대답이라고 말한 바 있다.


어쨌거나 이 영화는 한 편의 재미있는 오락영화다. 타란티노가 헐리우드의 정상의 자리에 서서 자신의 제일 첫 번째 작품인 '저수지의 개들'의 방식으로 되돌아간 영화이기도 하다. 내 친구는 타란티노의 의미 없는 대사 핑퐁에 익숙하지 못하고 지루함을 느껴서 타란티노 영화만 보면 수면제를 먹은 것처럼 자는데 나는 그 의미 없는 대사 핑퐁으로 점점 고조되는 갈등을 좋아하기 때문에 타란티노를 좋아한다. 만약 당신도 그런 쓰레기 대화 더미를 좋아한다면, 강추하고 싶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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