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카산드라 Jan 13. 2022

핑크 / 할머니

* 스포일러 있습니다.

핑크(2016)

내가 옛날에 읽은 인도를 소개하는 책자에서는 발리우드를 이렇게 한 마디로 요약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잘 살았답니다~ 랄랄라~" 그리고 사실 뭐 틀린 말도 아니다. 한국의 음지에서 인기를 끈 바후발리 시리즈는 아직도 그들은 그렇게 잘 살았답니다~ 랄랄라 하고 노래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 어이없게 신나는 지점이 인도 영화가 가진 고유한 매력이 아닐까? 그러나 그것만이 인도 영화의 매력은 아니다. 지금 내가 소개할 두 편의 영화만 봐도 말이다. 그렇다, 인도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더없이 현대적인 진보된 IT기술과 함께 더없이 낙후된 보수적인 관념이 함께 존재하는 이 나라에 말이다. 남성에게는 모르겠지만, 여성에게는 인도란 여행가기 무서운 나라로 가이드가 성폭행을 했다느니 버스에서 집단강간이 일어났다느니 하는 괴담이 먼저 떠오르는 나라다. 내가 인도로 여행을 갔을 때 우리 어머니는 걱정을 하고 또 하셨다. 결국 진짜로 걱정해야 했던 것은 가이드가 노인분들에게 치는 성희롱적인 농담보다 더 위험했던 아무데서나 마시는 물로부터 오는 식중독이었지만 어쨌거나, 여성들에게 인도란 두려운 괴담이 흉흉한 곳이다. 그렇다면, 거기 사는 여성들은 얼마나 두려울까? 어쩌면 이 모든 걱정이 나의 타자화된 시선에 의한 걱정일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이 두 편의 영화들은 인도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한국의 이야기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그냥 보편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보편적이기 때문에 더욱 슬픈 이야기. 그것은 여성에 대한 성폭력의 이야기이다.


영화 '핑크(2016)'를 보면서 나는 울었다. 그것이 너무 내 이야기 같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인 미날 역의 탑시 판누, 파락 역의 키르티 쿨하리, 안드레아 역의 안드레아 타리앙은 세 명의 같이 사는 여자 친구들이다. 영화는 사건이 벌어진 직후를 기점으로 시작한다. 무언가 사건이 벌어졌고, 남자는 다쳤고 여자는 불안하다. 양쪽 다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지만 그러기를 끝끝내 주저한다. 도대체 무엇이 켕기는 것일까. 나는 여기서 이 영화를 보는 여성 관객과, 남성 관객의 차이가 있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성인지 감수성에 민감한 관객과 그렇지 않은 관객의 차이일 수도 있다. 영화는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알았다. 여성들은 성추행 혹은 성폭행을 당했고(대한민국 현행법상 성추행 또한 성폭행이다.), 그래서 남자를 공격 한 후에 도망을 쳤는데, 신고를 하자니 일이 너무 복잡해지고 자신들이 되려 가해자로 책임을 지게 될 것 같고, 그래서 어색한 일상을 제대로 웃지도 못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나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왜냐하면 나 또한 비슷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즐겁자고 만났다. 놀고 싶은 날이었다. 술도 좀 마시고 싶어서 마셨다. 그러다가 같이 영화를 보자고 했다. 그래서 같이 방에 따라들어갔다. 그리고 콘돔도 없이 동의하지 않은 성관계를 당했다. 주인공인 탑시 판누의 손에는 술병이라도 있어서 내려칠 수 있었지만 나는 내려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근육질의 남자를 밀쳐내는 건 정말로 힘든 일이었다. 결국 나는 고분고분한 척 연기를 하고 해달라는 것을 다 해주고 나와 응급실로 달려가 사후피임약을 먹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허망한 일주일이었다. 고소를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잘못한 게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남자 혼자 사는 방에 따라들어가면 안 되었다. 같이 술을 마시면 안 되었다. 즉흥적으로 만나면 안 되었다. 왜냐하면 모두 여성에게는 자신의 의사와 상관 없이 남자에게 너와 자겠다는 신호를 보내게 되는 사인이 되기 때문이다. 법정에서는 그걸 물을 것이 뻔했다. 그리고 나보고 이제 나의 경험 유무와 관계 빈도를 물어보겠지. 뻔했다. 그리고 끔찍했다.


다행히 나의 강간범은 내게 "잘 들어갔어? 또 보고싶다 ^^"따위의 메세지를 남겨서 나는 그 자식을 차단했고, 그것으로 일은 일단락 되었다. 하지만 탑시 판누와 키르티 쿨하리, 안드레아 타르앙의 일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이 병으로 내려친 사람은 유력가의 일원이었고 권력을 가지고 있는 남자들은 셋을 계속해서 협박하면서 괴롭혔다. 남자들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 나랑 술도 마시고 야한 얘기도 하고 방으로도 따라 들어온 여자가 갑자기 끝에 날 병으로 내리치고는 튀어? 이 XX가. 하지만 술을 마신다는 게, 야한 농담을 같이 한다는 게, 방으로 따라 들어간다는 게 섹스에 동의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이 남자들은 그걸 몰랐다. 그래서 주인공 셋을 살인미수로 법정에 세웠고, 꽃뱀으로 몰아갔다.


법정 공방 장면은 눈물이 났다. 눈물이 날 정도로 현실적이고 답답하다. 상대의 주장은 빈틈 하나 없이 다 입이 맞춰져 있고 말이 되고 내 주장은 그저 나의 억울함 뿐이다. 모독적인 질문 앞에 나의 은밀한 사생활은 모두 까발려지고, 나는 치욕스러운 질문에 답해야 한다. 질문은 끝없이 이어진다. 당신은 매춘부입니까 아닙니까? 당신은 성교를 대가로 돈을 받으려고 한 게 아닙니까? 당신은 꽃뱀이 아닙니까? 하지만 나는 할 말이 하나밖에 없다. "나는 싫다고 했습니다." 아미타브 밧찬은 여기서 '변호인(2013)'의 송강호만큼이나 인상적인 변론을 이어간다. 나에게는 그보다도 더 인상적이고 눈물을 자아내는 말들이다.


"싫다고 하셨습니다. 싫다고 하셨습니다. 싫다고 했습니다, 재판장님. 하지만 라즈비르 싱은 피고인을 역겹게 만졌습니다. 피고인은 수치를 당했습니다. 피고인은 약간 취했었고, 이게 네 번째 규칙입니다. 어떤 여자도 절대 남자와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 만약 그렇게 행동하면 남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랑 술도 같이 마셨으니까 같이 자도 신경 안 쓸 거라고. 여자가 술을 마신다는 건 허락한다는 의미입니다. 여성에게만요. 남성에게는 아닙니다. 남성에게는 아니죠. 남자에게는 기껏해야 건강 상의 위협 정도죠. 조건이 다른 겁니다, 재판장님. 청바지나, 티셔츠나, 치마까지도 여자는 입으면 안 됩니다. 자기들에게는 괜찮지만, 남성들이 보면 심각한 위협이 되니까요. 불쌍한 남자들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이런 차림의 여성을 보면 실수를 저지를 수밖에 없죠. 지금까지 저희가 노력을 기울인 방향이 틀렸던 겁니다. 우리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를 구해야 합니다. 남자를 구하면 여자가 안전해질 테니까요. 여성들은 혼자 살아서도 안 됩니다. 절대 안 되죠. 남자는 되지만 여자는 안 됩니다. 혼자 사는 여자는 남자를 혼란스럽게 하니까요. 여자는 대화 도중에 절대 웃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좋은 소식을 말하더라도 표정은 비통해야 합니다. 휴대전화도, 교육도 안 되고 어릴 때 결혼시켜야 합니다. 기타 등등, 기타 등등!


하지만. 주제에서 벗어났습니다, 재판장님. 제 의뢰인은 몇 잔의 술을 마셨습니다. 그것이 난폭한 행동의 원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계속해서 여자를 멋대로 만져대는데! 그런 상황에서 여자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뭘 어쩌시기를 바라십니까? 이런 것을 보고 정당방위라고 부릅니다. 절대! 심각한 상해나 살인 미수가 아니고 말입니다, 재판장님. 절대 아닙니다."

핑크(2016)

누군가는 이 영화를 보면서 변호인이 발리우드의 신이라고 불리는 아미타브 밧찬인 것도 좋지만, 여성 변호인이었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이야기를 한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여성 변호인이었으면 이만큼 흥행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도 한다. 여성은 눈물겹게도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 아직도 근엄하게 생긴 중년 남성의 입을 빌려야 한다. 유색인이 아직 백인의 입을 빌려야 하듯이. 장애인이 비장애인의 입을 빌리고, 성소수자가 앨라이의 입을 빌려야 하듯이 말이다. 영화는 다행히도 공정한 판사를 운 좋게 만나 아미타브 밧찬과 탑시 판누, 키르티 쿨하리, 안드레아 타리앙의 승리로 끝난다. 하지만 그 승리는 작은 승리일 뿐이다. 이건 1심일 뿐이고, 상대방은 권력과 돈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변호사는 늙었고, 싸움은 지지부진하게 계속될 것이다. 그래도, 씁쓸하고 작은 승리일지라도, 이 영화에서는 승리를 하며 끝난다.

할머니(2017)

여기 그 승리도 없는 이야기가 있다. 대도시에 사는 자립한 여성이지도, 좋은 신분이지도, 변호사를 선임하지도 못하는 이야기가 있다. 이 영화에는 아무것도 없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있다. 빈민가에 사는 아이 만다는 어느날 마을의 유지를 등에 업은 불한당에게 강간당하고 동네 철길 옆에 버려졌다. 할머니는 만다를 집을 데려와 치료하고 경찰에 신고를 하지만, 경찰은 범인이 정치인의 아들임을 알고서 오히려 할머니의 가족을 협박한다. 이 영화의 왓챠피디아 소개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 있다. "부와 권력의 불균형이 남아 있는 사회에서 상식적인 법체계 또는 공적 시스템마저 작동하지 않을 때, 범죄에 대한 처벌은 사적 복수의 영역이 된다." 그렇다, 할머니는 사적 복수를 결심한다. 뭘 어떻게 하겠는가. "할머니, 피가 나요. 저 이제 생리를 시작한 건가요?"라고 묻는 조그만 아이에게 할머니가 해줄 수 있는 게 무엇이 있겠는가. 여기에는 변호사도 없고, 돈도 없고, 힘도 없다. 그저 할머니는 치장할 뿐이다. 이 늙은 몸으로나마 그 술에 취한 자식을 홀려서, 그 개자식의 물건을 잘라버리겠다고.

할머니(2017)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다른 두 영화가 떠올랐다. 하나는 봉준호 감독의 '마더(2009)'이고, 다른 하나는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 -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1995)'이다. 마더에서는 엄마가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내 아들을 위해 무너진 한국 사회의 인프라 역할을 대신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결국 자신의 아들이 풀려나고 자신의 아들보다 더 약자 위치에 있는 억울한 아이가 자신의 아들 자리에 대신 왔다는 걸 깨닫고서 울먹이며 내뱉는 김혜자 배우의 한 마디는 강력하다. "너는 엄마가 없니?" 그렇다. 엄마가 없으면 한국에서는 나를 돌보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국가는 나를, 소수자를 돌봐주지 않으니까. 영화 '할머니'의 할머니 또한 마찬가지이다. 변호사도, 돈도, 힘도 없을 때, 있는 건 할머니의 돌봄 뿐이다. 그리고 그 할머니는 복수를 위해 다시 여성이 된다. 치장을 한다. 이 지점에서 '낮은 목소리 -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이 생각났다. 변영주 감독의 이 작품은 마지막에 주름지고 늙어서 쳐진 할머니들의 나신을 카메라가 천천히 되짚으면서 끝이 난다. 변영주 감독은 그것의 의도를 "더 이상 성적인 존재로 보이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자유로워진 할머니들의 모습을 담고 싶었다."라고 말한다. 그렇다, 여성은 더 이상 성적인 존재로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야 자유로워진다. 하지만 이 할머니는 복수를 위해 다시 성적인 존재가 되려고 한다.


이 영화의 장르는 공포다. 하지만 정작 영화를 보면 답답하기만 할 뿐이다. 남자에게는 거세불안이 가장 큰 공포라고들 말한다. 누군가는 이 영화를 보면서 할머니가 성기를 잘라가다니 정말 무서운 영화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것으로밖에 복수할 수 없는 현실이 더 공포였다. 이 영화에서 가장 무서웠던 장면은 할머니가 마지막에 강간범의 성기를 잘라가는 장면도 아니고, 소녀가 아파서 누워있는 장면도 아니고, 남자 둘이서 여자 마네킹을 가지고 그 마네킹을 조각조각내면서 짐승처럼 울고 광란에 빠져서 자위를 하는 장면을 즐겁게 셀카로 찍는 장면이다. 이들에게 여성이란 그저 마네킹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언젠가 나는 포르노에서 여성이란 성기만 극대화된 주물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그러나 현실의 여성 또한 주물화 되고 있지 않다고 할 수가 있을까. 조각조각나서 남자의 성기를 입에 물고 있는 여성 마네킹과 살아 숨쉬는 여성인 나는 얼만큼이나 다를까. 분명 다르다. 아주 많이 다르다. 그건 마네킹이고 나는 살아있는 인간이니까. 하지만 그들의 눈에는 다르지가 않다. 그것이 공포스러운 것이다.


내가 성폭행을 당하고 나서 시간이 조금 지났을 때, 들었던 생각은 이것이 내게 너무나 일상적으로 일어났다가 일상적으로 스러졌다는 것이다. 마치 밥을 먹듯이 그렇게 지나갔다. 누군가는 밥을 먹는 것처럼 기억속에서 쉬이 사라질 일로 성폭행 가해를 하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밥을 먹듯이 성폭행 가해를 당하고 있을 것이다. 만약에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문득 떠오른 기억에 괴로워하면서 울고 있다면, 나는 그것이 단순히 밥을 먹는 일보다 더한 일이었다고 말해주고 싶다. 우리는 모두 생존자다. 당신이 살아줘서 나는 감사하다. 나는 살아나갈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곡성 / 짐승의 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