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카산드라 Dec 30. 2021

블레이드 러너 / 블레이드러너 2049

* 스포일러 있습니다.

블레이드 러너(1982)

리들리 스콧 감독에 대한 나의 미심쩍음은 '델마와 루이스'와 '프로메테우스'의 극명한 대조로부터 시작된다. 나는 리들리 스콧을 '델마와 루이스'로 처음 접했는데, 극장에서 재개봉한 '델마와 루이스'를 처음 보고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다리에 힘이 풀릴 정도로 흥분해서 함께 영화를 봤던 친구와 영화의 어떤 점이 천재같았는지 40분동안 정처없이 걸으며 다리가 아픈 줄도 모르고 떠들어대었다. 그리고 나서 필모를 훑어보다가 '프로메테우스'에 꽂혔다. 에? 이 감독이? 이 천재만재 같은 감독이 이런 요상한 영화를 찍었다고? (물론 프로메테우스도 꽤 괜찮은 영화다, 하지만...) '델마와 루이스'는 흠결 하나 없는, 대중성과 작품성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완벽한 갓작의 느낌이 있었는데, '프로메테우스'는 감독이 고추장과 올리브를 좋아한다고 해서 고추장 콤비네이션 피자를 만든 느낌이었단 말이다. 물론 못 먹을 맛은 아닌데, 프롤로그 씬은 무엇을 위한 것인지 모르겠고, 마이클 패스벤더는 왜 그렇게 생명의 탄생에 집착을 하며, 결국 등장인물 대다수를 죽이고 나서 전달하려는 주제는 무엇인지 도무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던 탓이다. 이 감독의 필모를 좀 더 훑어보고서, 나는 '프로메테우스'는 순수히 리들리 스콧의 SF 디스토피아 덕질에서 탄생한 영화라는 결론을 내리고야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1492 콜럼버스>나 <화이트 스콜>에서부터 리들리 스콧은 영... 내용과 비주얼은 사라지고 알맹이 없는 스펙타클만 남았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최근에 개봉하는 리들리 스콧의 영화를 뜯어볼 때면 미심쩍음이 항상 찝찝하게 감돈다. 한 때는 미슐랭 쓰리스타의 영화들을 뽑아내었지만, 이제는 고추장 콤비네이션 피자를 만드는... 리들리 스콧 감독...


그래서, 서론이 길었다. '블레이드 러너' 이야기를 해 보자. 순수히 영화적 관점으로만 접근하면 이 영화는 꽤나 괜찮은 영화다. 누구는 이 영화를 20세기 최고의 SF로 꼽는다. 분명히 안드로이드와 인간 사이의 경계를 흐리면서 SF장르에서 인간성이란 무엇인가를 논한 작품으로는 거의 시금석이 된 작품이 틀림 없다. 비주얼리스트로서 이후 거의 모든 영화의 기준이 된 디스토피아 근미래의 모습을 창조해냈다는 점도 그렇다. 리들리 스콧은 빛보다는 어둠을, 남성보다는 여성을 더 재미있게 다루는 감독이고, 그런 점에서 '블레이드 러너'의 인간성을 상징하는 레플리칸트(안드로이드), 레이첼은 짧게 등장함에도 굉장히 인상적인 결말을 가진 캐릭터다. 이 영화의 주제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은 바로 도망친 레플리칸트들의 리더가 난간에 매달린 주인공에게 레플리칸트들이 느끼는 공포와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이제야 알겠냐고 말한 뒤, 죽이기는 커녕 살려주고나서 자신의 수명이 다하는 것을 기다리며 하는 대사일 것이다. "난 네가 상상도 못할 것을 봤어. 오리온 전투에 참가했었고, 탄호이저 기지에서 빛으로 물든 바다도 봤어. 그 모든 기억들이 사라지겠지... 빗속의 내 눈물처럼." 이 대사는 '콘택트'의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시인이 왔어야 했어. 너무 아름다워요..." 라는 대사를 떠올리게 한다. 창작물에서 인간성의 표현은 주로 '아름다움을 느낄 줄 아는 본성'과 '사랑과 공감이 가능함'으로 나타난다. (후자에 약간의 불만이 있지만) '블레이드 러너'에서도 두 표현이 모두 등장한다. 레플리칸트들의 리더에 의해 살아나고, 그의 유언을 들은 주인공은 자신이 사랑하는 다른 레플리칸트 레이첼과 함께 언제가 끝이 될 지 모르는 삶을 이어가기 위해 떠난다.


영화 외적인 이야기를 해 보자. 나는 이 영화를 필립 K. 딕의 원작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를 먼저 읽고 나서 보았다. 그리고나서 아주 실망했다. 필립 K. 딕의 소설은 훨씬 더 상상력이 풍부하고, 주제도 약간 다르다. '블레이드 러너'가 레플리칸트와 인간의 '인간성'을 구분할 수 없음을 나타내었다면,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는 안드로이드는 가지지 못한, 인간만이 가진 고유한 감정 능력이란 무엇인가를 논하면서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철학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나는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의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들었는데, 그것은 인간으로서 자부심을 느껴서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모두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무언가, 마음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인간이 때로는 완벽한 절망에 빠져있고 싶어하는 이유고, 아무리 멍청한 사람이라도 거미 다리를 떼는 것을 보며 아픔을 느끼는 이유다. 소설 속에서 이러한 인간의 마음은 '윌버 머서'라는 종교적 인물으로 상징화된다. '머서'는 필립 K. 딕의 다른 단편 '작고 검은 상자'에도 나오는 인물인데, 이 소설도 권력에 대항하는 인간성에 대해서 고찰하고 있으며 매우 흥미로우니 한 번쯤 읽어보기를 권한다.


블레이드 러너(1982)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궁금한 것이 한 가지 있다. SF영화에서 왜 차들은 멀쩡한 길을 놔두고 다 날아다니는 것인가? 날아다니는 차의 개수를 보면 세계관에 차가 그리 많아보이지도 않는다. 사람은 그렇게나 바글바글하게 많이 사는데. 디스토피아라 다들 돈이 없어서 차를 못타고 날아다니는 건가, 아니면 영화 예산의 부족인가? 혹은 그저 영화 비주얼의 간지를 위한 차량 감소? 나는 항상 SF영화에서 날아다니는 차를 볼 때마다 "현재 올림픽대로 상공은 정체구간이니 한남대교까지 한시간 이상 소요될 예정입니다." 같은 네비게이션 안내음성을 떠올리고는 한다. 이 정도 상상력을 가진 영화감독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점에서 정말 통탄스럽다. 분발해라 헐리우드.


잡소리는 그만하고, '블레이드 러너'의 비주얼과 상징에 대해서 더 이야기해보자. '블레이드 러너'는 쓸데없이 오리엔탈리즘적이다. 그건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디스토피아 도시를 굳이 일본과 중국과 한국을 섞어가며 묘사해야 할 필요는 무엇인가? '이스케이프 프롬 뉴욕'을 보면 맨해튼 배경으로도 충분히 세계관을 디스토피아로 만들 수 있는데 말이다. 벽에 쓰인 중국어는 그렇다 쳐도, 커다란 전광판에서 시종일관 게이샤의 이미지가 나올 필요는 정말이지 없었다. 덕분에 '블레이드 러너' 이후 디스토피아 SF 영화에서는 조금씩 오리엔탈리즘적인 이미지가 등장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어벤져스: 엔드게임'. 활을 쏘던 호크아이가 뜬금없이 사이버펑크 일본에 가서 사무라이 검을 휘두르게 된 것은 다 유구한 역사가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 마음에 안 드는 점. 인간과 비인간을 잇는 상징으로서의 여성이다. 이러한 여성의 이미지는 '블레이드 러너'에서 처음 등장한 게 아니라 더 오래전, '메트로폴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메트로폴리스'에서는 "머리와 손을 매개하는 것은 심장이어야 한다."라는 대사가 계속해서 나오며 '마리아'라는 여성이 등장하여 에덴의 자본가와 기계도시의 노동자를 중재한다. 그러나 결국 주인공이 되는 것은 마리아가 아니라, 주인공 남성이다. '블레이드 러너'도 그렇다. 레이첼은 남성 주인공이 인간과 비인간을 잇게 도와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주인공 남성이 사랑하는 객체로서의 여성, 그 자체로 하나의 인간이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을 매개하는 상징으로서의 여성. 언제쯤 창작물들은 이 도식에서 여성을 빼낼 수 있을 것인가? 여성을 주체적으로 내세우기 좋아하는 리들리 스콧 감독도 이러한 도식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니 이 또한 통탄스러운 일이다.


블레이드 러너 2049(2017)

그리고, '블레이드 러너'의 속편 '블레이드 러너 2049'다. 나는 원작보다 속편을 더 재미있게 보았다. (원작은 아마도 소설을 읽고 기대를 너무 한 나머지 실망이 컸던 모양이다.) '블레이드 러너'처럼 전설로 꼽히는 작품의 속편을 만든다는 것은, 크리스토퍼 놀란의 말에 의하면 자폭테러와도 같은 일이라는데, 드니 빌뇌브 감독은 그걸 해냈다. 영화는 비주얼적으로 더 세련되어졌고, 이야기 흐름 역시 유려하다. 그리고 가족애를 그리기 좋아하는 감독답게 드니 빌뇌브 감독은 '블레이드 러너 2049'에도 가족애 서사를 넣었다. 분명 보고 있는 것은 SF영화인데 보고 있자면 드니 빌뇌브 감독을 유명하게 만들었던 '그을린 사랑' 생각이 자꾸 난다. 드니 빌뇌브 감독은 '컨택트(arrival)'에서도 가족애를 다루었다. 한 감독이 좋아하고 골몰하는 주제가 그의 필모그래피 전체에 걸쳐서 계속해서 변주되면서 나오는 것을 알아채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블레이드 러너 2049(2017)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대체 왜 세상의 남감독들은 어떤 상징으로서의 여성이라는 표상을 놓지를 못하는 것인가? 창작물 속에서 계속해서 여성은 생명력 있는 인간이기보다 생명이 없는 상징이 된다. 이 영화에서 레이첼은 '임신'이라는 여성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행위를 통해 완벽하게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흐리는 인간성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드니 빌뇌브 감독은 '임신', '모성애'와 같은 키워드들을 좀 숭배하는 경향이 있다. 개인적으로 유일하게 드니 빌뇌브 감독에게 있어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다.) 그리고 주인공 남성이 인간성을 드러내기 위해 위치하는 존재, '사랑과 공감이 가능함'을 나타내는 상대 역시 여성이다. (주인공 남성이 게이면 어디가 덧나나? 거기까지 상상이 안 되나? 분발해라 헐리우드.) 마지막으로 인간과 비인간의 사이에서 나온 결과물로서 전의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주인공에게 암울한 디스토피아에서 희망이 보이는 신세대를 암시하는 인물 또한 여성이다. 모든 여성을 남성으로 바꾸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여성을 쓰되, 여성을 생명력 있는 인간으로 묘사하라는 말이다. 생생한 여성 캐릭터가 단 한 명이라도 등장할 수는 없는 건가? 위의 여성들이 모두 상징으로서 필수불가결한 캐릭터들이었다면, 주인공도 여성으로 바꿀 수 있었잖아. 꼭 이런 영화들을 보면 상징들은 다 여성으로 채워넣고 그 상징들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민하는 생생한 캐릭터는 남성을 시켜요. 분발해라 헐리우드.


여하간 그렇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러니 저러니 해도 리들리 스콧 감독은 그나마 여성 캐릭터를 주체적으로 잘 다루어주는 감독이다. 드니 빌뇌브 감독도. 그렇다면 이건 디스토피아 SF장르의 한계인 걸까? 누군가 좀 클리셰를 깨주는 감독이 등장했으면 좋겠다. 클리셰는 깨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인간성을 고뇌하며 방황하는 고독한 늑대 컨셉의 남성 주인공은 이제 지겹다. 그 주변에 그 남성의 인간성을 살리기 위해 위치해 둔 여성 캐릭터들도. 누가 그 클리셰 좀 깨주었으면.


매거진의 이전글 뜨거운 것이 좋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