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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씰리 Feb 05. 2024

K-장녀들이 여행을 떠나는 이유

오늘도 그녀들은 비행기 티켓을 끊고 캐리어에 짐을 싼다 



해외여행이란 게 그리 어렵지 않은 취미가 된 세상이지만, 내 주위의 몇몇, 싱글이자 엄마와 함께 사는 케이장녀들은 주기적으로 그리고 의무적으로 캐리어 봇짐을 싸서 멀리 여행을 떠나곤 한다. 하나의 큰 프로젝트를 끝내면 반드시 혼자서 가장 먼 나라로 휴가를 다녀오는 이도 있고, 돈을 버는 목적이 여행인 이도 있다. 나 역시도 큰 작업이 마무리될 무렵이면 미리 비행기 티켓을 끊어놓고 그날만을 기다리며 버텼다. 혹은 일이 잘 풀리지 않아 헤맸던 어떤 해에는 거의 매달 여행을 떠나서 우리 집 강아지가 내 캐리어만 봐도 또 어딜 가느냐며 경기를 일으킬 정도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행을 좋아하고 그리워하고 선망하지만, 확실히 케이장녀들의 여행에는 뭔가 비장한 구석이 있다. 나는 그 이유를, 본가에서 독립한 이후에야 깨달았다.


우리들은 잠시 도망가있을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집으로부터. 

더 정확히는, 엄마로부터. 


나를 비롯한 그녀들은 엄마와 물리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유대감이 몹시 깊다. 나이가 들수록 웬만한 부부보다 더 찰떡같은 파트너십을 갖게 된다. 볼트와 너트처럼 서로가 없이는 해낼 수 없는 일들이 많아진다. 엄마는 볼일이 생기면 '너 있을 때 같이 가지 뭐' 라고 말할 때가 늘어나고 인터넷으로 주문할 것이 생기면 딸에게 원스톱 카톡을 날린다. 일터에선 총명하기 그지없는 딸은 집에 오면 '엄마! 오늘 저녁 뭐 먹어?' 라고 외치며 소파에 발라당 드러누워 엄마의 잔소리를 느긋하게 즐긴다. 


어느 순간부터 당연하게 엄마의 노후에 함께할 사람은 나뿐이라고 생각한다. 내 주위 그녀들 중 비혼주의를 선택한 이들이 여럿인데 그중 엄마와의 동거 및 부양이 꽤 큰 이유를 차지한다. 나의 부모는 이혼한지 오래되었지만, 내가 아는 어떤 케이장녀는 현재 아버지와 다함께 살고 있음에도 이다음에 엄마와 둘이서만 나란히 실버타운에 입성해 여생을 보는 게 꿈이다. 아버지의 노후는 아버지의 몫이라며. 오빠나 남동생이 있어도 왠지 엄마의 부양은 내 몫이라고 큰 저항 없이 받아들인다.


우리집 역시 그렇다. 외할머니가 여생을 보냈던 요양원을 방문하고 돌아올 때마다 여러 복잡한 상념들에 사로잡히곤 하던 엄마는 늘 기어이 촉촉한 눈으로, 옆에서 운전을 하고 있는 남동생 대신 뒷좌석에 앉은 나를 휙 돌아보며 말했다. "넌 나중에 엄마 요양원 보내지 마. 난 요양원이 싫어." 보내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는데 한 발도 아니고 세 발짝쯤 앞선 단도리를 듣고 있노라면 한숨이 절로 나오곤 했다. 


엄마와 함께 사는 집에서 내 방은 내 방보다는 엄마의 집 중 일부였다. 외출하고 집에 돌아오면 전혀 내 취향이 아닌 이불로 바뀌어있거나(물론 그 전의 이불도 내 취향이 아니었고) 내가 딱히 좋아하지 않는 내 사진이 인화되어 액자에 걸려있곤 했다. 엄마가 자꾸 내 방을 마음대로 헤집는 게 점점 넌덜머리가 나서 서른이 넘어 "아 내 방 청소하지 마! 쓰레기장이 되든 말든 냅두란 말이얏!" 이라고 비명을 지르며 청소기를 붙잡고 몸싸움을 벌인 적도 있다.


프리랜서인 딸의 불규칙한 업무루틴을 도통 파악할 수 없던 엄마는 내가 방에서 일을 하고 있으면 문을 휙 열고 들어와 강아지를 품에 안고 책상 옆을 어슬렁거리며 강아지의 입을 빌려 "누나야 뭐하니~? 나랑 놀아주세요오" 하곤 했다. 그래서 나의 업무루틴을 그녀에게 보다 가시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노트북을 들고 카페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내가 나간지 서너 시간쯤 지나면 전화를 걸거나 카톡으로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아직 일하는 중이야? 언제 끝나? 같이 장보러 갈까?" 


나는 엄마와 강아지와 함께있는 시간이 가장 평안하다. 엄마와 나는 정말 죽이 잘 맞는다. 엄마와의 농담 따먹기는 평생 질리지 않는다. 아직도 엄마가 나 없이는 못하는 것보다 내가 엄마 없이는 못하는 것들이 많다. 나는 엄마를 아주 많이 사랑한다. 


하지만 엄마의 목소리가 소음처럼 들리는 순간이 오면, 우리 사이에 며칠 정도 쉼표가 필요하다는 확신이 든다. 바로 그때 당장 비행기나 기차 티켓을 끊고 캐리어에 간소한 짐을 때려넣고 착한 가출 같은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집과 먼 곳으로 떠나 낯선 풍경을 걷고 내 집이 아닌 곳에 짐을 풀고 잠을 잔다. 내 집이 아닌 곳에 와서야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조용히 자유롭게, 나만의 온전한 시간을 보낸다. 마음이 다시 한껏 너그러워진다. 엄마가 그리워진다. 그렇게 충전을 마친 케이장녀는 다시 캐리어를 끌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랬던 내가 해외여행을 떠나지 않은지 벌써 4년이 넘었다. 물론 그 사이에 팬데믹이 있었다. 몇 년 동안 일이 잘 안 풀려서 여행 갈 돈도 없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미치지 않은 이유는 그 사이에 회사에서 숙식이 가능한 작업실을 내준 덕분으로 생에 첫 독립을 했기 때문이다. 


독립을 하고 나니 우리집은 이제 나에게 '본가'가 되었다. 


엄마나 나나 한동안은 하루아침에 분리된 연리지처럼 힘든 적응기간을 보냈다. 나는 생각보다 외로움을 많이 타는 애였다. 외로움을 느낄 만큼 혼자 있었던 적이 없었던 것뿐이었다. 새벽까지 일한 뒤 작업실의 적막이 참을 수 없어지면 지하철 첫 차를 타고 본가로 달려가곤 했다. 집을 나온지 3년이 지나도록 주소지를 분리할 생각조차 못했다. 청소기의 먼지통을 비우고 화장실 하수구의 시커먼 머리카락에 손을 대는 게 싫어서 엄마가 작업실에 방문할 때까지 흐린 눈으로 외면하는 철딱서니리스였다. 엄마는 요리솜씨가 그리 탁월하진 않아서 어제 저녁은 그럭저럭 맛있었지만 오늘 점심은 음? 지금 내가 입에 넣은 이게 뭐지? 할 때가 많았지만 혼자 대충 끼니를 때우다 보니 그 엄마밥이 본능적으로 고팠다. 본가에 가면 먹방파이터처럼 엄마밥을 입에 때려넣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나만의 것인 내 공간에서 혼자 사는 삶은 점점 달콤해졌다. 마감할 땐 며칠이고 맘껏 집을 더럽히며 쾌감을 느끼고, 마감을 끝낸 뒤 도로 깨끗이 치우며 상쾌함을 만끽했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잔다. 새벽에 살금살금 담배를 피우러 나가려 현관문을 스윽 여는 순간 안방에서 귀신처럼 "어딜 나가늬 이 시간엣' 외치는 엄마의 목소리도 없다. 완벽한 방임! 


독립을 함으로써 엄마와 나 사이에 지속적이고 느슨한 쉼표가 생겼다. 독립 전 1~2년쯤은 엄마와의 관계로 인한 스트레스가 극심해지고 서로 날선 말을 주고받을 때가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와 마지막으로 싸운 게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다. 따로 산 이후로 우리는 확실히 서로에게 한결 너그러워졌다.


그러니 자연스레 여행 욕구가 사그라들었다. 지금은 작업실에 캐리어마저 없다. 최근 나는 몇 년에 걸친 프로젝트를 마침내 끝냈다. 끝내기 한 달쯤 전부터 사람들은 나에게 여행 계획을 물었지만 나는 "글쎄요... 일단 일부터 끝내구요" 미지근한 답변만 할 뿐이었다. 지금까지도 비행기티켓을 끊기는커녕 '그래. 어디든 가긴 가야겠지... 지금 안 가면 나중에 분명히 후회할 거야.' 라는 미적지근한 생각만 하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이젠 여행을 핑계로 엄마에게서 잠시 도망갈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더불어 엄마는 요즘 집안을 새롭게 재정비할 계획을 세우며 나에게 물었다. "니 방을 없애고 거길 엄마 옷방 겸 업무방으로 써도 되겠니?" 어차피 본가에 가면 잠도 소파에서 잘 때가 더 많기에 흔쾌히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나는 비행기 티켓을 끊기보단 작업실에 새로 놓을 리클라이너와 사이드테이블 등을 검색하는 데에 골몰하는 중이다.


독립이라는 긴 여행을 떠나온 나. 영원히는 아니겠지만 당분간은 비행기나 호텔이 주는 설렘보다는 작업실이 주는 적막과 외로움 속에서 좀 더 자유롭고 평안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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