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보내며
누군가 신호를 보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딱히 세울 사람도 없고, 나설 수 있는 입장도 아닙니다. 지리적으로 가깝지도 않고 서로의 상황을 모르니 연락을 주고받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동안 안간힘을 쓰면서 버텨왔습니다. 수액은 점점 말라가고, 곧 생명의 끈이 끊어질 것이라는 걸 모르지 않습니다. 그래도 한 날 한 시에 마지막 궐기를 부려야 한다는 것은 우리들 사이에 있는 암묵적 약속입니다. 기온이 내려가고, 날씨가 추워지는 날을 택했습니다. 가장 좋은 날은 비가 오고 기온이 급강하할 때가 적기입니다.
오늘 새벽이 기회입니다. 일기예보상으론 본격적인 추위가 새벽에 내리는 비로부터 시작된다고 합니다. 본능적으로 오늘이 함께 행동해야 할 때입니다. 바람이 강하면 좋으련만 일단 가능성만 안고 갑니다. 전화도 문자도 연락병도 없지만 바람과 습도와 작은 빗방울이 결국 그토록 끈질기게 잡고 있는 손을 놓게합니다. 나는 떨어집니다. 등 뒤로 차가운 바람이 살짝 등허리를 밀어냅니다. 절규하는 동료의 얼굴이 노랗게 스쳐갑니다. 약속도 없이, 신호도 없이 우리는 떨어집니다. 하나, 둘, 십만, 백만, 천만의 우리는 찬란한 태양이 떠오를 때 비로소 '거리의 낭만자'로 다시 불려집니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시절에 '운치 있는 거리'를 위해 낙엽을 쓸지 않기로 한 후, 가을이면 흩날리는 낙엽이 한층 도시의 멋을 장식합니다. 어제 아침 새벽에 내린 비로 가로수 은행잎이 절반은 떨어졌습니다. 거리에 노란색 은행잎이 황금물결을 이룹니다. 서로 약속이라도 한 걸까요? 어떻게 한 번에 다 같이 떨어지는지 신기합니다.
퇴근하는 길에 하늘에 무지개가 떴습니다. 함께 떨어지는 은행잎을 보면서 '약속'이라는 단어가 머리에 맴돌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하나님과의 언약'을 연상케 하는 무지개라니.....
은행나무 얘네들 분명 '약속'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