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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의 생각 Jul 11. 2022

장애의 발현을 최소화 하는 기술: 사회적 기술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이 드라마는 서번트 증후군으로 우월함과 열등함을 동시에 지닌 복합적인 우영우의 두 면모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최수연은 영우의 생활 속 어려움과 사회적 편견에 초점을 맞춰 지원자가 되어주지만 가끔 마주하게 되는 영우의 우월함에 씁쓸함을 느끼고, 권모술수 권민우는 영우의 법조인으로서의 우월한 능력에 경쟁심을 느끼며 주변의 지원과 배려에 박탈감을 느낀다. 이 둘의 간극은 우리 사회의 상대적 평등과 절대적 평등을, 그리고 그 사이의 딜레마를 은유한다. 우리 사회는 과연 장애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보조개도 장애라는 소문이 있었다. 장애는 사회적인 관점이다. 정상성에 대한 기준이 사회에 있고 장애의 실질적인 발현 또한 사회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보조개는 근육 발달의 부진이라는 의학적 결손이지만, 사회의 적응과 능력의 발현을 가로막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장애로 규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비장애인이라고 모두 사회의 적응과 능력의 발현에 전혀 방해를 받지 않고 있는가? 근시와 난시와 좁은 시야를 가진 누군가가(나) 파일럿 사회에 진입하고자 한다면 나는 기준 미달의 인간이다. 하지만 나는 파일럿 사회와 무관하기에 진입 장애를 겪지 않는다. 드라마 속 수능 만점 엘리트 ’정상인‘ 상훈(정훈의 형)은 서울대 의대에 진학하며 본인의 학업 능력을 극단적으로 비관하게 되었다. 그러나 ‘장애인’ 영우는 법이라는 학문 안에서만큼은 즐겁게 헤엄친다. 이처럼 누군가의 가능성과 'ability'는 언제나 상대적이다. 본인이 속한 사회에 따라, 가고자 하는 목표에 따라 우리는 여러 갈래의 사회적 결손을 느낀다. 장애라는 것은 그러한 결손 중 일반적이면서도 치명적인 하나의 갈래이다.



    앞선 파일럿의 예시처럼, 꿈과의 간극 속에서라면 우리는 모두 장애를 경험한다. 인생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좁혀나가기 위한 발버둥이다. 기술의 존재 이유는 그 발버둥에 있다. 기술은 제약을 해결하여 사장된 능력을 발현하게 한다. 세탁기의 개발이 여성의 다양한 능력을 가시화했고 시력교정술로 저시력자들도 파일럿으로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게털 알레르기가 있는 나도 알레르기 약을 먹으면 간장게장 많이 먹기 대회에 나갈 수 있다. 냠냠굿.

   세상에 기술의 도움을 받지 않은 스스로의 온전한 노력이란 없다. 학습으로 얻은 지식은 출판 기술과 교육 시스템 덕분에 개발된 지능이며, 의술과 공학과 IT 기술 덕분에 세균 감염, 홍역, 영양부족, 파상풍을 뚫고 살아남아 손바닥 안에서 글을 공유하고 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사소한 모든 환경이 개개인을 '유능한' '정상인'으로 보이게 만들어주고 있는 것이다. 바꿔말하면 당신의 '정상성'과 '유능함'은 문명의 수혜자라는 증거다. 기술의 도움을 받았기에 스스로의 부족함을 외면한 채 다음 단계의 전문성과 생산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부족함의 외면. 부족함을 외면하는 것이 불가능한 사람들. 약자와 장애인은 아직 사회가 기술적으로 극복하지 못한 속성을 지녔다. 그 속성과 '정상성'의 간극을 기술로 줄여나가는 것이 장애 극복의 개념이다. 새로운 기술의 개발로든, 현존하는 기술을 평등하게 공유하는 방법으로든.


    그런데 인간 사회가 탄생함과 함께 개발된 고차원의 기술이지만 어째서인지 활용에 소홀한 기술이 있다. 이 기술은 근본적으로 사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바로 사회적 기술이다. 우리의 이상향과 정상성을 포함한 현존하는 사회의 모든 가치와 제도는 사회적 기술의 산물이다. 우리 모두는 장애의 발현을 최소화할 수 있는 ‘사회성’이라는 엄청난 카드를 가지고 있다. 정상성의 재정의와 사회 자원 재배치의 기술. 소통의 기술, 배려의 기술, 협력의 기술, 연대의 기술. 회전문을 잡아주는 기술, 느린 말과 걸음을 기다려주는 기술. 기술을 적용할 대상과 행동의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영우는 배탈 난 최수연에게 바지를 가져다주고 김정훈에게 펭수송을 불러준다. 내가 해결할 수 있는 타인의 어려움을 마주한다면 누구든 기술을 걸면 된다. 이것이 사회성의 기술이다. 최수연처럼 영우가 받는 차별적인 대우의 부당함을 꼬집는 비판을, 정명석처럼 무단결근을 월차로 땡겨써주는 융통성을 차근차근 발휘해나가면 된다. 사회적 기술은 병렬적으로 모았을 때 발전하는 신기한 특성이 있기 때문에 쨉이라도 날리는 게 의미가 있다. 다만 경중을 따져볼 한 가지는 회전문을 잡아주는 30초짜리 사회성이 비장애인에게는 매너 정도겠지만, 장애인에게는 진입의 벽을 허물어주는 큰 효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이다. 지훈의 30초가 문 앞에서 서성이는 영우의 30분을 절약해주고, 출근길 늦어지는 30분을 인내하는 소극적 지지가 누군가의 30년을 단축해줄 수 있다. 배려는, 지지는, 복지는 약점과 약자를 향할 때 최고의 가성비를 낸다. 우리 사회는 그 비율과 각 사회적 행동의 효과를 이제야 막 계산해나간다. 그 과정에서 일시적인 불편함과 미시적인 불평등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앞에서 씁쓸함과 박탈감을 느끼는 대신 인내하고 배려하고 지지하며 자신의 사회적 기술이 만들어내는 생산성에 집중해보면 어떨까. 어차피 우리는 유능함에 취해 살고 있으니.


    영우는 자신과 정훈의 유사성을 상정하는 정명석에게 자폐는 스펙트럼이라고 말한다. 자신도 다른 스펙트럼에 있는 사람은 처음 본다고. 우리는 모두 4차원의 스펙트럼 위에 놓여있다. 관점에 따라 상대적으로 우월하기도 열등하기도 하고, 상황과 시대에 따라 유능해 보이기도 무능해 보이기도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를 함부로 판단할 수 없으며 서로의 잠재력에 책임이 있다. 정훈의 심신미약과 영우의 변호 능력을 동일선상에 올려두는 검사의 납작한 시선이 무책임한 이유다. 책임 소재를 서로에게 미루느냐 하나둘 가늠해나가느냐가 갈등을 위한 갈등과 발전을 위한 갈등을 가른다. 기술의 베이스는 학문에 있듯 사회적 기술의 베이스는 식견에 있다. 세상을 알아가고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결국 사회성의 획득이기에 영우를 품어낸 한바다에서 최수연과 권모술수가 겪는 평등에 대한 고민은 서툴지만 건강하고 유의미하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초반 전개는 공존을 위한 사회적 논의의 첫걸음을 뗀 우리 사회의 희망편을 아른거리게 한다. 앞으로 이 드라마가 어떤 바다를 만들어 나갈지 수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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