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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영철 Dec 22. 2021

21세기 귀족(32)

원시 게르만의 토지사상(ii)

당신은 신분제가 폐지되었다고 믿는가? 


사람이 다른 사람을 합법적으로 착취하는 제도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믿는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폭력적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신분제도는 그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경제적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부동산제도'라는 이름으로.

 
  
  

- 프롤로그 -

 

지금까지의 카카오톡 브런치의 가장 큰 방향성과, 필자의 <21세기 귀족>의 방향성이 다소간 다를 것이다. 허나 브런치를 애독하는 독자들 중에 필시 깊은 학구열과 경제적 정의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 믿어 이 글을 올리는 바이다. 이 글 <21세기 귀족>은 필자가 지난 3년 간 개인적으로 연구해온 결과물이다.


당신도 이 <21세기 귀족>을 통해, 오늘날의 부동산 기득권층이 꼭꼭 숨겨왔던 역사를 발견하길 바란다.



- 본문(32) : 원시 게르만의 토지사상(ii) -


당시 게르만의 토지사상은 로마를 포함한 고대 국가들처럼 지주에게 그 토지 소유에 따르는 상당한 의무를 부과했다. 구체적으로는 고대 그리스의 스파르타와 같이 게르만 자유인 남성들에겐 병역 의무가 있었으나 그에 대한 급부로 농지분배청구권과 부동산 상속권이 있었으며(여성에겐 없다), 귀족은 그들보다 더 많은 토지를 분배받았으나 전투에서 패배하면 처형을 당하는,[1] 명백하고 철저한 군역토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원시 상태에도 게르만족 중심에는 왕은 있었으나 게르만인 전체를 통솔할 수 있을 만큼의 중앙집권국가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이렇다 할만한 군역토제도 및 봉건제도에 준하는 제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주라면 마땅히 군역을 감당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있던 것이다. 특히 전 병력 동원은 오직 부족의 신성한 ‘토지’를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가능하다는 점에서[2] 정확하게 ‘자유인=지주=군역인’이라는 등식이 명확히 성립했다.


"로마화 이전의 기원전 4~1세기 게르만 전사들"(Joan Francesc Oliveras Pallerols.)


한편 대자연이 인간에게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 주는 창구인 숲은 건축이나 땔감 등을 쓰이는 목재, 수렵과 채집의 식량, 목초 등을 제공해주며 인간이 창조한 것도 아니므로 결코 개인이 독점할 수 없었고 토지공개념적으로 함께 향유했다. 기원전 52년에 카이사르가 갈리아 정복을 완수하기 전 즉, 갈리아가 본격적으로 로마화 되기 전에도 갈리아의 켈트족 사이에서는 예속민들이 대지주를 위하여 일구는 큰 소유지가 존재하기도 했으나 그 와중에도 토지를 공유하며 농경하던 토지공개념은 당연히 뚜렷했다.


토지공개념 아래서 게르만의 임대차는 지주의 산림에서 소작인에게 벌목권, 채취권, 방목권 등이 있어서 소작인이 물권적 용익권을 가졌을 정도였다.[3] 따라서 산림, 목초지, 하천 등은 구성원들이 자유로이 공개념적으로 사용⋅수익하였다.[4] 이러한 사상과 전통은 그들의 토지공개념적 관습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씨를 뿌린 자가 거둔다」


「제방을 쌓지 않는 자는 그 토지를 떠나야 한다」


「매매는 임대차를 깨뜨리지 못한다」


「일하는 자에게 성과가 귀속되어야 한다」[5]


위 첫 번째 관습법에서 토지 소유에 따르는, 공익에 기여해야 하는 의무성이 확인된다. 또한 로마법의 담보권 행사는 국가의 개입 없이 개인이 실행 가능 했던 반면 후에 게르만법상에서는 법정 절차의 구속을 받았다는 점에서,[6] 로마에 비해 게르만의 토지는 아주 오랫동안 꾸준히 공적 개입과 관리 아래 있었음이 확인된다.


두 번째와 세 번째 관습법에서 의무성과 토지공개념이 확인된다. 따라서 로마의 지주권처럼 절대적이지 않았으며 자신의 재산에 대해 무한정한 자율성이 보장되지도 않았다. 네 번째 관습법에서 게르만적 토지사상은 절대적 소유권사상이 부재함이 확인된다. 게르만적 토지사상과 소유권사상의 관계를 도식화하면 아래와 같다.




그렇다면 게르만족은 재산 취득과 소유권 행사의 근거를 노동에 두고 있었을까, 아니면 로마인처럼 자본에 두고 있었을까? 살펴보았던 게르만족의 법언 중에 「씨를 뿌린 자가 거둔다」, 「일하는 자에게 성과가 귀속되어야 한다」[7]에서 충분한 답은 이미 나왔다.


한편 로마 정치기관의 수준에 비교하자면 상당히 조악하지만, 게르만 자유민들이 두루 참여하는 정치기관이자 회의인 팅(Thing)집회를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물론 귀족들이 주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운영 방식은 민주주의적이었고 자유민도 참여했었다.[8] 즉 자유민은 토지를 가진 자였고, 그 외 조건들도 갖추었다면 겉으로나마 질적 차이가 없는 참정권이 주어졌던 것이다.[9] 따라서 이는 로마인들은 토지 소유의 크기와 참정권이 비례했던 것과는 비교가 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종합적으로 게르만 자유인의 신분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도식화하면 아래와 같다. 등식으로는 ‘자유인=지주=군역인=참정권자’이다. 모든 백성은 토지를 가져야 하고, 토지를 가진 자는 목숨을 걸고 군대에 나갈 만큼 큰 책임을 져야 하고, 그 전제 하에 정치사회적 영향력을 고루 가졌던 것이다.



허나 이들은 훗날 로마를 파괴하면서 동시에 상속하였다. 단적으로 예시를 들자면 훗날 6세기의 부르군트 왕국의 법에서 확인 가능하듯 게르만 부르군트족은 로마의 용병 노릇을 한 후에 그들로부터 노예 및 예속농의 1/3과 특정 지역의 토지의 2/3을 할당 받았다.


또 스스로를 ‘로마 황제의 군병’이라고, 자신들의 게르만 왕은 ‘로마의 관리’라고 그리고 동로마 황제를 ‘우리들의 주인’라고 칭했던 것과,[10] 옛 로마의 땅을 획득하게 된다면 로마를 계승하는 것으로 자연스레 간주되었던 것, 481년에 프랑크 왕국을 건국한 클로드비히 1세가 기독교 세례를 받아 로마의 국교를 이어 받은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고고학적 증거로써 현대의 항공사진 분석으로도 확인인 된 바, 로마에게 정복당한 후의 갈리아 북부에의 대농장이 중세의 장원과 영지로 이어지는 흔적이 발견되었다.[11]


게르만 사회는 로마 사회에 대해 물적인 계승뿐만 토지제도 등의 비물질적인 계승으로 만들어진 사회였음이 확인된다.[12] 결정적으로 훗날 중세 유럽의 장원은 옛 로마의 대지주들의 대토지에 기반을 둔 토지였다[13]


오래 전엔 이민족, 더 노골적으로는 야만족이라고 일컬음 받았지만 그들은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 이후 스스로 당대 최고의 문명인인 로마인들의 계승자가 되고 싶어 했다. 한편으론 자신들의 수가 본래 거주민인 로마인들보다 훨씬 적었던 탓에 그들의 제도와 환경에 자연스럽게 편입할 수밖에 없는 배경도 작용했다.[14] 마치 중국역사에서 오랫동안 오랑캐라고 멸시 받던 만주족이 명나라의 자리를 꿰차고 중국을 통일했지만, 오히려 패자인 명나라의 유구한 문화에 편입했던 것처럼 말이다.


게르만 왕국들이 세워질 때에 그들 대부분의 인구는 자유인이었지만,[15] 로마의 건국과 마찬가지로 그들 왕국의 건국 시기부터 대토지소유제, 토지양극화의 씨앗은 심겨져 진작에 싹을 틔웠다.[16] 다행히 중세 초까지는 자유인이 자유인에게 인신이 예속되는 경우는 적었다. 따라서 화폐나 현물 지대가 아닌 부역노동을 지대로 제공하는 경우도 드물었지만,[17] 토지사유제로 인한 부동산양극화와 지주-非지주 계층 간의 경제사회적, 인신적 종속관계는 예고된 셈이었다. 물론 그 씨앗은 로마의 토지사상으로부터 받아온 것이다.


로마를 본 따서 성공적인 정복전쟁으로 영토를 넓혔고, 오래 전부터 왕이 통치했던 왕정국가답게 나라의 토지는 왕의 것이라는 왕토사상이 그들의 토지사상에 자리 잡았다. 한편으로는 프랑크왕국을 건국했던 클로드비히 1세부터 그 뒤를 이은 왕들도, 권력과 이익을 위해 “교묘히” 로마제정기의 공법적 제도와 법사상을 도입한 것도 게르만인의 토지사상의 변화에 작용하였다.[18]


 물론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은 귀족, 신하, 교회에게 충성과 봉사를 조건으로 하는 토지 하사 및 분봉이었고 이것이 바로 중세 유럽 봉건제의 시발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앞서 언급했던 고전기 로마의 허용점유제도를 이어받아 프랑크 왕국 시기에도 지주가 무상으로 영세한 인민들에게 토지를 빌려주기도 했다는 것인데, 후에는 지주권이 강화되며 이마저도 5년 기한부로 바뀌고 말았다.[19]


위와 같이 비교적 급진적인 변화와 계승으로 인해 아주 점차적으로 게르만인들의 토지사상에도 토지소유권의 로마적 특성의 도입은 물론이요 이를 뒤이어 대토지소유제도, 예속제도, 채권적 임대차 관계 등이 형성될 예정이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이를 시간의 순서대로 알아보도록 한다.


다만 미리 언급해두는 바, 게르만족은 단일민족이 아니라 마치 고대 그리스처럼 여러 부족들의 집합체였기에 각 부족들이나 각 왕국들의 관습법과 법전의 사상과 내용이 천편일률적으로 동일하지는 않다. 고로 게르만 토지사상과 제도의 역사는 주로 프랑크 왕국을 중심으로, 법전들은 전해 내려오는 것들 중에 대표적인 법전들을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이번 글에서는 원시 게르만의 토지사상을 알아보았다.


(1) 원시 게르만인들에게도 토지공개념과, "부동산을 많이 가진 만큼 공익에 기여해야 한다"라는 군역토사상은 명확했다. 심지어 부동산을 많이 가진 귀족이 전쟁에서 패배하면 사형시킬 만큼 말이다. 허나 21세기에는 그 반대의 일이 벌어지고 있다. 부동산을 많이 가진 자들이, 조그마한 집 한채 없는 이들을 전월세 가격을 높여가며 주거의 절벽으로 몰아, 경제사회적 사형선고를 내리고 있잖은가?


(2)「일하는 자에게 성과가 귀속되어야 한다」라는 정의로운 부동산사상은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임차인들의 땀과 노력으로 그 수입이 높아지면, 건물주들은 그 건물의 지리적 위치 덕분인 줄로 착각하거나 또는 그렇다고 우겨가면서 임대료를 높인다. 땀과 노력으로 높아진 임차인들의 수입을 임대인들이 '임대료'라는 이름 하에 빼앗는 것과 뭐가 다른가? 정의로운 토지사상을 갖고 있던 고대인들에겐 도둑질로 보일 뿐이다.



통탄스럽도다.


References.

[1] 현승종, 『게르만법』(박영사, 2001), 57쪽, 459쪽.

[2] 최종고, 『서양법제사』(박영사, 2011), 80쪽.

[3] 현승종, 전게서, 35~36쪽.

[4] 상게서, 41쪽, 129쪽.

[5] 상게서, 37쪽.

[6] 상게서, 353쪽.

[7] 상게서, 36~37쪽.

[8] 손호은, “게르만족의 민족대이동기의 생활상 고찰”, 「인문학논총」14(2009), 47~48쪽.

[9] Stubbs, THE CONSTITUTIONAL HISTORY OF ENGLAND, p. 21.

[10] 김세신,『서양법제사론』(법문사, 1990), 112쪽.

[11] W. janssen/D. Lohrmann, ed. Villa-Curtis-Grangia(Müchen; Artemis, 1983)에 모두 수록된 Harald von Petrikovits, “L’économie rurale à l’époque romaine en Germanie inférieure et dans la région de Tréves”, pp. 1~16; R. Agache, “Typologie et devenir des villae antiques dans les grandes plains de la Gaule septentrionale”, pp. 17~29; J Metzler/J. Zimmer/L. Bakker, “Die römische Villa von Echternach(Luxemburg) und die Anfänge der mittelaterlichen Grundherrschaft”, pp. 30~45; 이기영, 『고대에서 봉건사회로의 이행』(사회평론아카데미, 2017), 67쪽에서 재인용.

[12] 이기영, 『고전장원제와 봉건적 부역노동제도의 형성』(사회평론아카데미, 2015), 154~156쪽.

[13] 이기영, “장원제 하 부역노동의 기원”, 「프랑스사 연구」(2005), 7쪽.

[14] 김세신, 전게서, 110쪽.

[15] 이기영, 『고전장원제와 봉건적 부역노동제도의 형성』, 118쪽.

[16] 상게서, 50쪽.

[17] 이기영, “서유럽 중세 초기 봉건농민의 부역노동 부담추이”, 10쪽.

[18] 상게서, 10쪽.

[19] 현승종, 전게서, 3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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