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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영철 Dec 31. 2021

21세기 귀족(34)

중세 유럽의 토지사상(5~6세기. ii)

당신은 신분제가 폐지되었다고 믿는가? 


사람이 다른 사람을 합법적으로 착취하는 제도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믿는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폭력적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신분제도는 그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경제적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부동산제도'라는 이름으로.

 
  

- 프롤로그 -


지금까지의 카카오톡 브런치의 가장 큰 방향성과, 필자의 <21세기 귀족>의 방향성이 다소간 다를 것이다. 허나 브런치를 애독하는 독자들 중에 필시 깊은 학구열과 경제적 정의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 믿어 이 글을 올리는 바이다. 이 글 <21세기 귀족>은 필자가 지난 3년 간 개인적으로 연구해온 결과물이다. 


당신도 이 <21세기 귀족>을 통해, 오늘날의 부동산 기득권층이 꼭꼭 숨겨왔던 역사를 발견하길 바란다.


- 본문(34) : 중세 유럽의 토지사상(5~6세기. ii) - 


클로드비히 왕이 511년에 사망한 후 네 명의 아들이 국가를 4분할하여 통치하다가 558년에 재통일되었고, 다시 561년에 국가는 4분할되면서 왕권이 크게 쇠락하기 시작했다. 그만큼 중앙 권력은 불안정했다. 오히려 그들의 왕토사상은 왕과 그 왕자들로 하여금 국가와 그 영토가 자신의 것들이라는 사고방식을 만들어내어,[1] 국토가 분열되는데 기여했다. 이렇게 국가 혼란을 틈타서 지방의 세력가 및 영주들은 자신의 세력을 키우고 왕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이 목적을 위한 필수 조건은 자신들이 왕으로부터 증여 받은 땅에 대해 왕의 소유권을 퇴색시키고 자신들이 그 소유권과 그 땅 안에서의 절대적인 힘을 확보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끈질기게 노력했다. 그들은 비록 로마 건국 초의 지주 귀족들과 출발점은 달랐지만 그들과 같은 결과를 얻길 원했던 것이다.


그 첫 단추의 예시는, 이 또한 로마로부터 유래했는데, 511년 오를레앙 공의회의 결의로써 교회 토지와 성직자에 한정하여 허가된 세금 및 부역에 대한 공권면제특권이었다.[2] 이는 국가의 권력 행사로 인한 개인의 세금 등의 부담을 부분적으로 면제받을 수 있는 특권을 의미하며, 이 또한 로마에서 대지주들이 로마 정부의 공권으로부터 벗어났던 것으로부터 배워 온 것이다. 이렇게 정치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틈타 대지주들은 일반 민중에 대한 통제력을 취했다.[3] 이 통제력의 근간은 바로 토지소유에서 비롯되었다. 


게다가 프랑크 당국은 조세 감소, 군역자 감소, 치안 수준 등의 문제가 생기지 않는 한, 이런 패악한 대장원의 형성과 확장을 굳이 막으려 하지 않았다.[4] 물론 대토지 소유자는 자연스럽게 귀족으로 신분이 상승하였고 특히 작센지역에서는 토지 없는 혈통귀족이나 토지 없는 관직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5] 


이는 ‘지주=귀족=지배계급’이라는 로마적 사고방식 잔존하고 있다는 것, 즉 게르만이 로마화 되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 와중에 갈리아 땅에 완전히 정착한지 몇 세기도 채 지나지 않았음에도 토지사유제와 장원제도는 “확립되고 확대되고” 있었다.[6]


로마로부터 배우고 상속받은 대지주지배체제와 그 토지는 그 위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람과 사건에 대한 중세 프랑크 지주의 절대적 영향력과 지배를 가능케 했고 그 외 사람들에게도, 심지어 왕에게조차 배타적인 힘을 가지게 되었다. 로마의 토지제도를 배우기 전까지는 동산, 주로 가축의 수에 따라 경제사회적 지위, 지주로서의 막중한 의무와 책임이 결정되었던 옛 게르만인들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어지고, 토지 매매 및 교환에만 관심이 쏠리고 있었다.[7]


 자연스레 장민들의 생계는 국왕과 그의 공권력이 아니라 점차 대지주들에 의해 결정되기 시작했다.[8] 그나마 다행으로 여길 점은 토지세는 약 1/10로써 매우 압제적인 수준은 아니었다는 것이었다.[9]


프랑크왕국의 군역 대상자는 군제개혁 이후의 로마와 마찬가지로 지주층이 아니라 자유인 전체가 이행했으며 예속농도 법적으로는 자유인에 속했기 때문에 모두 군역을 이행해야 했다. 하지만 로마의 사상과 법제를 계승하면서 토지공개념과 평등사상이 눈에 띄게 퇴색되기 시작하고 대지주지배제가 확장되는 가운데 노예를 제외한 거의 모든 인민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징병은 과거 가난한 로마 시민들이 느꼈듯이 경제적으로 큰 부담이었다. 


이는 변변찮은 토지 재산을 가진 사람들까지 지주로서의 군역 의무를 동일하게 이행해야 하는, 법의 획일적인 적용 때문에 벌어진 불평등한 결과였고 그만큼 지주들은 짐은 덜게 되었다. 군역토사상의 퇴색과 만민에 대한 법의 형식적 평등이 실질적 불평등을 초래한 것이었다.


한편 서게르만 일파인 부르군트족이 세운 부르군트 왕국에서는, 군도바드왕 이 법전 편찬 사업을 시작하였고 이어서 그 아들 지그문트왕이 6세기 초중반에 사업을 완료하였다. 


지그문트 왕을 상상하며 그린 15세기 그림(Piero della Francesca.)


크게 두 가지의 법전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헌법 격의 <군도바드 헌법(Lex Gundobada)>이다. 다른 하나는 부르군트 왕국에 거주하는 로마인들을 위한 특별법 격의 <부르군트 법(Lex Romana Burgundionum)>이다. 주목할 만한 법은 아래와 같다.[10]

 [괄호 안의 말]은 필자가 이해를 돕기 위해 임의로 삽입한 것이다.



1조

증여를 할 수 있는 특권이 부에게 주어지는 것, 그리고 왕의 하사품과 봉급에 관하여.

1. 재산 증여를 할 수 있는 가장의 특권 혹은 통치자께서 주시는 하사품(과 봉급)에 관하여 그 어떤 것도 법에서 규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현 상태에서, 모두의 공동 합의를 통해 명하는 바는, 가장은 재산 분할 전에는 공동재산 혹은 자신의 노동으로 축적한 생산물로 재산을 증여하는 것은 허가되는데, 이전의 법이 여전히 규정하는 바 할당받은 토지는 제외한다.


2. 만약 가장이 (자신의 재산을) 아들들과 나누고 그들에게 각자의 몫을 상속 주었는데, 그 이후에 다른 아내를 통해 한 명 혹은 이상의 아들을 낳았다면, 그렇게 두 번째 아내를 통해 낳은 아들들은 (첫 재산 분할 이후의)가장이 소유한 재산의 몫을 상속받는다: 그리고 가장이 [두 번째] 재산 분할을 할 때, (두 번째 아내와 낳은)그 자식들은 다른 자식들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할 수 없다. 


1항에서 “통치자께서 주시는 (중략) 할당받은 토지 제외한다”라는 구절에서는 문자적으로 왕토사상이 확인된다. 또한 가장 개인의 자유로운 토지 처분을 제한한다는 점에서 소수에의 토지 집중을 막으려는 의도 즉, 토지주권사상과 토지평등사상이 엿보인다. 왜냐하면 왕으로부터 받은 봉토를 그 봉신 즉 가장이 자유로이 처분할 수 있다면 아들들에게 그 토지가 상속되지 못할 확률이 높아지게 되어 후세대로 갈수록 토지양극화의 발생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2항에서는 아들들만 토지 재산의 상속 대상자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군역과 직결되는 군역토사상이 확인된다. 


3. 아래와 같은 법이 추가되는 것이 옳다고 여기는 바, 그 법은 우리들[부르군트인들] 중 누구라도 선조들로부터 증여의 방식으로 어떤 재산이라도 받았다고 알려진다면, 현행하는 법령으로써 우리는 largesse사람들로부터 그가 받은 것을 자신의 아들들에게 상속 주어야 한다고 규정한다. 


largesse인이란, 자신들의 부르군트 국왕으로부터 토지를 하사 받았고 그 땅을 로마 거주민과 함께 누려서는 안되는 사람들이다. 위 법에서 그들로부터 증여 받은 토지를 아들들에게 상속하도록 규정한다는 것이 옳다고 여긴다는 점에서 1차적으로는 왕토사상을, 2차적으로는 토지평등사상이 재확인된다.   


27조

파손된 울타리, 폐쇄시킨 도로, 그리고 도둑질과 폭력 행위에 관하여. 

3. 만민에게 알리는 바이다: 누구든지 공공 도로(예를 들어 주요 도로), 혹은 마을 도로를 폐쇄하는 자는, 반드시 12솔리디의 벌금을 지불해야 함을 고지하며, 또한 그 도로에 걸쳐 있는 만큼의 [도로를 막은 자가 소유한]울타리와 농작물을 행인들이 훼손하는 결과가 초래될지라도 그들[훼손한 자들]은 처벌받지 않는다.    


공공 도로 등에 인접한 토지를 가지고 있는 자의 지주권이 오남용되지 않도록 강력히 규제하고 있다. 토지공개념이 명백히 확인된다.


해당 법전의 나머지 부분은 다음 글로 이어진다.




이번 글에서는 게르만 토지사상의 점진적 로마화를 살펴보았으며 그 초기의 특징들을 확인했다.


(1) 아직까진 토지공개념, 토지평등사상, 군역토사상은 법으로 제정되어 상당한 수준으로 실효를 발휘하고 있었다.


(2) 허나 로마적 토지사상에 물들어가며 점차적으로 공무를 하지 않는 자에게도 부동산이 주어지고, 반대로 부동산 없는 가난한 자들에게도 조금씩 공무를 전가시키는 폐단이 발생할 조심을 보였다.


References

[1] 김세신, 『서양법제사론』(법문사, 1990), 150~151쪽.

[2] 이기영, 『고전장원제와 봉건적 부역노동제도의 형성』(사회평론아카데미, 2015), 159~160쪽.

[3] Patric J. Geary/이종경 옮김, 『메로빙거의 세계』(지식의 풍경, 2002), 134쪽.

[4] 이기영, 『고전장원제와 봉건적 부역노동제도의 형성』, 64쪽.

[5] 현승종, 『게르만법』(박영사, 2001), 60쪽.

[6] 이기영, 『고전장원제와 봉건적 부역노동제도의 형성』, 47~48쪽.

[7] Geary/이종경 옮김, 전게서, 82쪽, 220쪽.

[8] John P. Powelson/정희남 옮김, 『세계토지사』(한국경제신문사, 1998),  105쪽.

[9] 현승종, 전게서, 329쪽.

[10] Katherine Fischer Drew, THE BURGUNDIAN CODE(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1996).

[11] 이기영, 『고대에서 봉건사회로의 이행』, 76~77쪽.

[12] 이기영, “영주권의 형성”, 「프랑스사 연구」(2012), 25쪽.

[13] Wolfgang Sellert/최병조 옮김, “독일법상 소유와 자유의 역사에 관하여”, 「법사학연구」(1993.12), 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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