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호의 소설 「공자」를 읽고
혼란의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춘추시대는 그나마 주나라 천자에 대한 명분과 의리가 남아있던 시대였다. 하지만 전국시대에 접어들면서 명분과 의리는 사라지고 약육강식의 논리만이 지배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중국 산동지역에 자리잡은 조그만 노나라는 풍전등화의 위기 상황에 놓인다.
공자는 그러한 혼란의 시대에 노나라에서 태어났다. 공자는 자신의 나라에서 쓰임받기를 바라며 열심히 학문을 연마했으나, 공자가 보기에 노나라는 불의와 무례가 판을 치는 무도한 나라였다. 신하인 삼환씨(계, 숙, 맹)가 자신들의 주군인 소공까지 몰아내고 정치를 좌지우지 하고 있었다. 주군인 소공은 이웃나라인 제나라로 쫓겨난 상황이었다. 그래서 공자는 제나라로 정치적인 망명의 길을 떠난다.
그렇게 시작된 공자의 떠돌이 삶. 그는 이때부터 평생 자기를 등용해 줄 주군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공자의 유학을 정치에 활용하고자 하는 임금은 없었다. 말만 그럴듯하지 실제 현실에서는 무용지물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공자가 존경했다는 제나라의 명재상 안영(晏嬰)조차 공자를 등용해보려던 제나라의 경공에게 다음과 같이 조언했다고 한다.
"대체로 유자(儒者)란 말만 그럴듯하지 바른 규범을 지키지 못하며 거만하게 자기만을 내세워 남의 밑자리에 들어가기를 꺼리고 있습니다. 또한 상례(喪禮)를 지나치게 숭상하여 파산을 하면서까지 성대하게 장사를 지내니 풍속으로 삼을 수도 없는 것이며 여러 나라를 유세하며 구걸하고 빌리기만을 잘하니 나라를 위하는 것도 못됩니다." 사마천의 「사기」
안영이 공자를 질투하고 경계하여 이렇게 말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권모술수가 횡행하는 전국시대의 정치판에서 ‘군주는 군주답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백성은 백성다워야 한다’는 정명사상 아래 ‘인의예지’의 원리원칙을 고수하는 공자의 사상은 현실에서 수용되기 힘든 것이었다.
결국 공자는 기대했던 제나라에서도 등용되지 못하고 쓸쓸하게 고향으로 돌아와야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실패 앞에서 자신의 길을 수정하고 타협을 한다. 그것이 가장 보편적이고 현명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공자도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상황이었다. 조금만 현실 정치에 영합하면 얼마든지 출사도 하고 재물도 벌어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공자는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 이러한 공자의 고지식함은 그를 따르던 제자들조차 두손 두발 다 들게 만들 정도였으니 공자가 얼마나 철저한 원칙주의자였는지 알 수 있다. 다만 우리는 여기에서 역사를 바꾼 위대한 스승들의 단면을 보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가치를 위해 목숨을 초개(草芥)와 같이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조금만 타협하면 모두가 다 '좋은 게 좋은 것'이 되는 상황에서 그들은 옳다고 생각하는 신념을 위해 과감히 독배도 들고 십자가도 졌던 것이다.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하며 독배를 든 소크라테스가 그렇고 온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진 예수님이 그러했다. 그들은 신념과 정의를 위하여 원칙을 고수하면서 심지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이후 공자는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으며 세월을 기다렸다. 자신을 어떤 사람이냐고 누가 물으면, '자기보다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게 배우기를 좋아한 공자는, 그래서 당대 최고의 지성이라 불렸던 노자(老子)를 찾아가기도 한다. 배움에 대한 목마름으로 떠난 불원천리 머나먼 길이었다. 하지만 생각이 전혀 다른 노자와의 만남은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실제로 공자가 노자에게 들은 말은 ‘잘난체 하지 말고 조용히 지내라’는 충고였고, 노자의 생각을 따르는 무리들로부터는 헛소리나 지껄이는 자라는 조롱과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공자는 화내지 않고 노자와의 만남도 소중하게 생각했다. 자신과 뜻이 다른 노자의 삶을 존중하며 그를 자신과 다른 세상에 사는 용(龍)과 같은 존재라고 하였다. 그리고 현실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자신의 신념을 더욱 확고히 하는 기회로 삼았다.
"새나 짐승이나 같이 어울려 살 수는 없는 일이다. 내 천하의 사람들과 어울려 살지 않고 그 누구와 더불어 살겠는가. 천하에 도가 있다면 나는 그것을 개혁하려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논어」
공자는 현실도피하는 삶을 살 수는 없다고 말한다. 천하에 도가 없기에 세상을 개혁하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공자에게 드디어 뜻을 펼칠 기회가 오기도 했다. 공자의 나이 51세, 그는 노나라 정공에 의해 비로소 등용된다. 그리고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자기의 조국인 노나라의 번영을 위해 힘썼다.
"사공은 육경 중의 하나로 국토를 다스리는 일을 맡는 중요한 자리였다. 비로소 중앙의 행정장관으로 임명된 셈이다. 「공자가어」에 의하면 공자가 사공(司空)이 된 뒤로는 노나라의 삼림과 강물, 호수와 고지대와 저지대의 평야가 모두 제대로 다스려져 각각 그곳에 맞는 식물과 동물들이 잘 자랐다고 한다." 사마천의 「사기」
그리고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공자는 머지 않아 노나라의 재상을 겸하는 최고의 벼슬은 '대사구(大司寇)'에 오르기까지 한다. 하지만 현실 정치는 녹록치 않았다. 공자가 노나라에서 인정을 받고 성공하면 할수록 반대하고 시기하는 사람이 생겼다. 이웃 나라인 제나라에서도 공자를 경계하여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상황이 되었다. 결국 공자는 다시 현실정치에 실망하고 노나라를 떠난다. 그리고 공자는 이후 13년이 넘는 오랜 시간을 떠돌이 신세로 보내야 했다. 물론 여기서 공자의 행동에 의문이 들기도 한다.
현실 정치는 원래 그렇게 무례와 무도함이 판을 치는 곳이 아니던가? 더 맞서 싸우고 간언하면서 자신이 모시는 군주가 올바른 길을 가도록 이끄는 것이 신하된 자의 도리가 아닌가? 어찌하여 군주가 예를 행하지 않는다고 비겁하게 사직하고 물러난다는 말인가? 모든 것이 갖추어진 정치적 상황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군주가 부족하니 현명한 신하가 필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질문 앞에 공자의 행동은 비겁하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어쨋든, 공자는 군주가 예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다는 이유로 과감히 노나라를 떠난다. 노나라 정공과 당시의 권력자인 계환자가 제나라 경공의 미인계에 빠져 정사를 외면하니 공자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고 떠났다고 전한다. 이른바 「논어」에 나오는 '색사거의(色斯舉矣)'란 말로 군자는 도(道)가 행해지지 않는 상황을 감지하면 미련없이 떠나 은거한다는 말이다.
여인들을 앞세워 나라를 망치려는 계략이라 하니
나라의 기둥들이 저 꼴이라면 남은 것은 오로지 파멸일 뿐
모름지기 군자는 멀리 떠나 여생을 한가로이 지낼 뿐이다.
그러나 패도와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과연 공자의 이상을 온전히 받아줄 군주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현실의 눈으로 보자면 공자의 생각은 지나치게 원칙적이었고, 지나치게 낭만적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에 실제로 공자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어느 나라에서도 등용되지 못한 채 제자들과 함께 천하를 떠도는 신세가 된다.
사람들은 그러한 공자를 ‘상갓집 개(喪家之狗)’라 조롱하기도 하고, 마침내는 믿었던 제자들조차 스승의 생각이 지나친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오랜 유랑에 지친, 공자의 충실한 제자였던 자공은 이렇게 따지며 물었다고 사마천의 「사기」에 전한다.
“선생님의 도는 그릇된 것은 아니나 너무 큽니다. 그래서 천하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도를 조금 낮추어 절충하지 않으십니까.”
사실 자공은 공자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공자의 무덤 곁을 6년이나 지켰던 제자 중의 제자였다. 자공은 스승인 공자를 아버지 이상의 존재로 여긴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자공조차 아무런 성과 없이 떠도는 공자에게 실망하고 허송세월하는 현실 앞에서 지쳐버린 것이다. 조금만 타협하면 얼마든지 쓰임을 받을 수 있는데 왜 원칙만을 고수하느냐는 원망이기도 했다.
그렇게 오랜 유랑 생활에 지친 공자의 제자들은 하나 둘 공자의 무리를 떠났다. 그리고 자공도 결국 현실적인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공자의 무리를 떠나 현실 정치에 뛰어들었다. 이후 자공은 탁월한 외교 능력과 경제 감각을 발휘하며 성공한 정치인이자 당대 최고의 거부(巨富)가 된다. 그의 이름은 따로 거부들의 일대기를 그린,『사기』「화식열전」에까지 오를 정도였으니 공자의 제자 중에서는 가장 성공한 사람이었다. 자공은 실제 자신이 스승에게 한 말처럼 스승의 학문을 절충하여 현실 정치와 경제에 적용한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자공은 스승을 배반한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자공은 오히려 스승의 학문이 비현실적인 사상이 아니라 얼마든지 현실정치에 활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자공은 사람들이 자신을 공자보다 뛰어나다고 아첨하는 말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한다.
“선생님께 우리가 미칠 수 없는 것은 하늘에 사다리를 놓고 오르려는 것과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나라를 맡아 다스리신다면 백성들은 스스로 일어서고, 가르침을 따라 평화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런 분께 어찌 내가 감히 미칠 수 있겠습니까.” 「논어」
그리고 그의 바람은 현실이 되었다. '자공'은 물론 '염구'와 같이 현실정치에서 성공한 공자의 제자들을 보고 사람들은 공자의 학문을 다시 평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후 공자의 사상과 학문은 맹자와 주자를 거치며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후대의 군주들에게 통치 이념으로 활용되면서 마침내 ‘성인의 학문’으로까지 추앙받게 된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는 조선의 통치이념으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공자는 절대적인 존재로 추앙받기에 이르렀다.
소설을 통해 알게된 공자는 현실적으로 보면 실패한 인물에 더 가까웠다. 야합으로 출생했다는 그의 신분은 미천했고, 외모 역시 뛰어나지 않았으며, 지나치게 고지식한 성격은 제자들마저 지치게 만들었다. 현대의학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결벽증에 가까운 강박성을 지닌 인물로 보이기도 한다. 원리원칙을 고수하는 그의 사상은 권도를 중시하는 현실정치인들의 눈에 지나친 낭만으로 보여 외면당했다. 다행히 그의 성공한 제자들에 의해 재조명되지 않았다면 공자 또한 수많은 제자백가(諸子百家) 중의 한 사람으로 그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평범하다 못해 실패를 밥먹듯이 한 평범한 인물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나는 최인호의 소설 「공자」를 읽고 이전보다 더욱 공자의 모습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나와는 차원이 다른 성인(聖人)이 아닌, 수많은 실패와 좌절을 경험한 인간 공자가 더욱 친근하게 다가왔다.
그러한 인간 공자에게서 나는 무엇을 배울 수 있었는가? 이 질문 앞에서 나는 다시 『논어』의 첫 문장을 떠올린다. 그동안 나는 아래의 문장을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인호의 소설을 읽으면서 아래의 문장이 매우 구체적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아래의 말은 실제 공자의 삶 전체를 함축한 위대한 말이었던 것이다.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공자는 누구보다 배우기를 좋아한 사람이었다. 자신을 비난하는 노자와 같은 사람을 직접 찾아가 배움을 청하기도 했고, 그의 비난 속에서 자신의 사상을 더욱 단단하게 다듬어 갔다. 먼 곳에서 찾아온 사람 누구나 벗이든 비난하는 사람이든 이들과 토론하는 것을 즐겼고 때로는 스스로 천하를 떠돌며 수많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만나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의 사상을 비현실적이라 비웃기도 하고 초라한 모습의 공자를 향해 ‘ 상갓집 개’와 같다고 조롱도 했지만 공자는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 사람들 앞에서 함부로 성내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었고 눈앞의 이익 앞에서 타협하지 않는 용기를 선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공자의 삶이 더 좋으냐 아니면 절충하여 현실에 적용한 자공이 옳으냐와 같은 물음에는 무엇이 더 좋다고 말하기 곤란하다.
아니다! 사실 나는 공자의 삶보다는 자공이 걸어간 길에 훨씬 더 호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공자를 좋아하는 문제를 떠난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