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0년 코네티컷주(州) 뉴헤이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경영하는 철물상에서 일하면서 다양한 소재들에 대해 눈을 뜨고 다양한 관심을 보이면서 철물점을 이어받게 된다.
1820년대 말, 당시 그는 아내와 함께 운영하던 철물점을 날려버리고 만다. 그런 그가 생활비를 벌고 빚을 갚기 위해 눈을 돌린 것은 바로 '고무'였다. 브라질에서 들어온 이 새로운 방수 물질에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직접 목도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고무가 많은 가능성을 지닌 원료임을 처음부터 확신했다. 남아메리카에서 수입된 고무 신발은 수년 전부터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벌써 생산이 시작된 상태였다. 그는 많은 다른 사람들처럼 고무 사업에 뛰어들었고, 구명조끼에 쓸 방수 밸브를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다.
고무의 유행이 빠르게 시작되었던 만큼이나 빠르게 시들어버렸기 때문이었는데, 그 이유는 간단했다.
고무는 방수성이라는 매력을 지니고 있긴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열에도 냉기에도 약한 성질을 드러냈다. 열에 노출되면 고약한 냄새를 풍기면서 녹아내리거나 들러붙었고, 냉기에 노출되면 돌처럼 딱딱해지면서 갈라져버렸다.
그러나 그는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고무를 열과 냉기에 견디도록 만들 수만 있다면 자신이 고무 시장을 장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돈을 빌려다가 연구를 시작했고, 질산과 산화마그네슘 가루를 비롯한 여러 물질로 실험을 반복했다. 그 결과 1837년, 테레빈유를 이용한 처리법을 마침내 발견해내고는 최초의 고무 관련 특허를 등록한다. 그런데 1838년의 어느 날, 그는 납품업체들 가운데 한 곳에서 들어온 고무가 이제까지 보던 것과는 성질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가공을 했음에도 탄력이 좋았고, 들러붙지도 않고, 냄새도 보통 고무보다 나쁘지 않았다.
"이건 어떻게 한 거죠?"
그의 질문에 납품업체 사장이 대답했다.
“황 분말을 뿌려서 햇볕에 말렸을 뿐인데요.”
그렇게 그는 N. 헤이워드와 함께 생고무에 황을 혼합하는 실험을 거듭하다가, 1839년 우연히 뜨거운 난로에 떨어뜨린 가황(加黃) 고무의 조각이 냉서에 견디는 성질을 갖게 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가 바로 고무를 안정시키는 이른바 ‘가황(加黃, vulcanization)’이라는 방법을 개발한 찰스 굿이어(Charles Goodyear)라는 미국의 발명가이다.
식물성인 고무가 여러 산업 분야에서 가죽과 나무, 조개껍데기, 상아, 뿔, 유리, 금속, 직물, 종이 등을 대신해 쓰일 수 있게 된 것이 바로 가황법 덕분이었다. 굿이어는 길고 지루한 연구 끝에 1840년에 우연의 도움으로 가황법을 발견하게 된다.
간단히 몇 줄로 그가 가황법을 발견했다고 기술하긴 했지만, 그가 그저 그리 쉽게 그런 성공을 우연히 얻었다고 착각하는 독자가 있을까 싶어 조금 자세히 그가 얼마나 얄궂은 운명의 수레바퀴에서 달렸는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굿이어는 햇빛에 처리했다는 말에 해답이 있음을 예감했다. 하지만 그것을 알아차렸다고 해도, 실제 결과물을 얻어내기까지는 갈 길이 멀었다. 1년 뒤, 굿이어는 연방 우체국과 계약을 맺고 황과 햇빛에 처리한 고무로 만든 우편 행낭을 납품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다. 우편 행낭이 여름의 열기에 노출되자 녹아버려 쓸 수 없게 돼버린 것이다. 고무를 황으로 처리하면 들러붙는 것은 막을 수는 있어도 온도 변화에 민감한 성질은 해결할 수 없었던 것이다.
굿이어는 또다시 파산했고, 빚더미에 올라앉아 살던 집까지 내놓아야 했다. 가족을 부양할 돈이라고는 한 푼도 없었다. 아내와 12명이나 되는 아이들은 이웃들의 동정과 주변의 일부 농장주들이 베푸는 동정으로 먹고살았다. 하지만 그 처절한 생활의 와중에도 굿이어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던 1840년 1월의 어느 날, 굿이어는 자신에게 들이닥친 빚쟁이들과 한바탕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이때 그는 우편 행낭의 재료로 썼다가 파산까지 몰고 왔던 문제의 고무 조각을 손에 쥐고 있었는데, 화가 난 나머지 그 조각들을 방에 내던져버렸다.
내동댕이쳐진 고무 조각들 가운데는 뜨거운 난로 위에 떨어진 것도 있었다. 그로부터 약 1시간 후, 빚쟁이들이 돌아간 뒤에 굿이어는 난로에 떨어진 고무 조각을 정리하려고 하다가 신기한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열에 녹아내렸을 줄 알았던 고무 조각은 놀랍게도 멀쩡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고무는 색이 짙게 변해 있었고, 언뜻 보기에는 가죽으로 혼동할 만큼 생김새가 달라져 있었다.
이것이 가황법의 원리가 우연히 밝혀지게 된 비하인드 스토리의 전말이다.
굿이어는 고무를 안정화시키는 비결을 알아낸 뒤에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더 나은 상품을 만들어내기 위한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연일 쳐들어오던 빚쟁이들은 더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굿이어는 그 상황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고, 결국 빚 때문에 감옥에 들어가는 상황을 맞게 된다.
그렇게 빚을 갚지 못해 수감생활까지 하게 된 굿이어는, 1843년 봄, 감옥에서까지 구상에 구상을 거듭하며 연구했던 결과를 얻어낸다. 안정화된 고무를 압축 증기를 이용해 단단하게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가황법 덕분에 이미 가죽 대신 쓰이고 있던 고무는 이때부터 나무처럼 단단한 재료도 대신할 수 있는 소재로 시장에 활용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사이 12명의 자식들 중 6명이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났고, 이미 쇠약한 상태에 있던 그 자신의 건강도 나날이 나빠져만 갔다. 고무를 연구하느라 들이마신 수많은 유독물질 때문에 그의 폐는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다. 결과적으로 굿이어는 성공했지만 상처뿐인 영광이었고, 그 성공을 얻기 위해 너무도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1844년에 새로운 특허를 등록한 굿이어는 자신의 고무로 만들 수 있는 모든 물건을 생각해내기 시작했고, 남성용 셔츠를 만드는 직물 공장도 열었다. 굿이어 덕분에 고무 신발 산업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굿이어는 그는 특허품을 가지고 1851년 제1회 만국박람회의 개최지인 영국으로 건너가 공장을 세우려 했다. 그러나 세울 수가 없었는데, 이는 그의 특허가 프랑스에서는 도리어 고소를 당하여 패소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1855년 파리 세계박람회에서 고무를 활용해 만든 수많은 일상용품들을 선보였다. 가구, 시곗줄, 목걸이, 반지, 안경부터 바이올린, 클라리넷, 플루트의 악기들에 이르기까지. 박람회 위원회는 그의 발명품에 찬사를 보내며 이 새로운 물질이 앞으로 산업혁명을 위한 길을 마련하게 될 거라고 내다보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연구자였고 발명가였을 뿐, 사업가 기질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기 고집이 강한 연구자였던 그는 자신의 발명품을 어떻게 제대로 보호하는지에 대한 방법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는 별생각 없이 자신을 추켜세우는 브로커와 잘못된 특허 계약을 맺었고, 이를 바로잡기 위한 재판을 하는 데에 남은 말년을 모두 바쳐야만 했다. 그렇게 굿이어는 고무 산업이 한창 무르익던 1860년에 초라하게 세상을 떠나고 만다.
20세기 초, 굿이어와 아무 혈연관계도 아닌, '프랭크 세이버링'이라는 미국인이 타이어 제조회사를 세워 ‘굿이어’라는 간판을 내건다. 이는 굿이어에 대한 존경의 표시이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기업가로서 굿이어의 이름을 로열티도 주지 않고 홍보에 활용한 것이 지나지 않았다. 끝까지 굿이어는 사업가들의 이용대상일뿐이었다.
굿이어가 우연히 난로에 던진 고무때문에 가황법을 발견했다고 착각하는 이들이 없길 바란다.
온종일 고무 가공법 한 가지만을 연구 해오던 그에게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의 포기하지 않는 집요함이 얻어낸 아주 작은 보상이었을 뿐이다.
아무리 자식이 많다고 하더라도 6명이나 되는 자식들이 파산으로 인한 빚 문제로 감옥에 아버지가 간 사이 영양실조로 죽었다면, 아버지로서 느꼈을 그 처절한 좌절감은 말이나 글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가 만약 고무의 가공법에 그렇게 목숨 걸듯 매달리지 않고 그저 평범한 장사치나 월급쟁이로만 살았다면 그렇게까지 처절한 실패를 맛보고 자녀들의 죽음을 목도하지 않았어도 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확신한다.
굿이어에게 당신에게 다시 생이 주어진다면 당신은 어떤 삶을 살겠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주저 없이 고무의 가공법을 제대로 연구해서 그 연구로 다양한 상품을 만들겠다고 할 것이다.
내가 확신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이다.
그가 그렇게까지 연구와 발명에 목숨을 걸고 모든 것을 올인한 것이 단순히 돈을 벌겠다는 이유가 아니었기 때문이고, 그가 어느 정도 발명에 성공하고 나서도 더 완전한 고무제품을 만들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던 천상 타고난 연구자이고 발명가의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고집스러운 사람에 대해 그다지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성향이 있다.
집요하게 무언가 끝까지 파헤치고 알아내려는 사람을 좋게 평가하지 않는다.
하지만 무언가를 연구하고 어떤 것을 알아내고 완성하기 위해 이러한 성향은 필수적이다.
적당히 넘어가고 적당히 해보다가 그저 포기하고 다른 사람의 말에 흔들리는 사람은 연구나 발명은 물론이고 어떤 일을 제대로 해내기 어려운 것이 사실임에도 사람들은 그것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 대단한 발명을 하고 발견을 하며, 상품화를 성공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그 성공을 위해 치러야 했을 대가를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성공은 그럴싸해 보이고 멋져 보이지만,
그 과정은 그렇게 멋져 보일 수도 없고, 실상 멋있을 턱이 없다.
그 뼈를 깎고 살을 에이는 고통을 이겨내지 않고 성공을 얻어낼 수는 없다.
당신이 지금 적당히
아프지 않고, 힘들지 않고, 괴롭지 않은 방법으로 성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말을 입에 담고자 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