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4월 도쿄, 을미사변에 가담한 후 일본으로 망명한 개화파 무인 우범선과 일본인 사카이 나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위태한 망명생활 중에도 우범선은 자신의 본적지 한국 경성에 장남의 호적을 올렸다.
아버지가 1903년에 고영근에게 암살되어 가세가 기울자 6살 때는 고아원에서 맡겨지기까지 했다. 후에 가정 상황이 나아지자 어머니를 따라 히로시마로 이사하여 구제중학교까지 마친 후, 박영효의 주선으로 조선총독부에서 학비를 지원받으며 도쿄 제국대학 농학부 실과에 진학하였다.
원래 교토 제국대학의 공학부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농학부가 아니면 학비를 지원해주지 않는다는 조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농학부에 진학했다고 한다.
실제로 '씨 없는 수박'을 개발한 사람이 아닌데도, 국수주의 영웅 만들기에 경도된 위인전 출판업자들에 의해 그 개발자로 오도되면서 더 유명해진 우장춘 박사의 이야기이다.
실제 최초로 씨 없는 수박을 만든 사람은 교토대학의 명예교수였던 키하라 히토시(木原均) 박사였다. 우장춘은 일반 농민들을 비롯한 대중에게 육종학과 농업기술의 중요성을 알리고 대중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히토시 박사가 만든 씨 없는 수박과 그 종자를 직접 들여와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새로운 농업기술을 배운다면 이렇게 신기한 수박도 만들 수 있습니다"라고 가르친 것이 다였다.
사실 우장춘이 이룬 업적은 '씨 없는 수박'수준 정도(?)가 아니다.
그가 이룬 가장 큰 학문적 업적은 1935년 "배추 속(Brassica) 식물에 관한 게놈 분석"이라는 박사 학위 청구 논문을 통해 '종의 합성' 이론을 제시한 것이다. 배추와 양배추의 교잡을 통해 이미 존재하는 유채를 실험적으로 만들고, 그 과정을 유전학적으로 규명함으로써 종간 잡종과 종의 합성이 실제적으로 일어날 수 있음을 밝혔다. 이 이론으로 인해 결국 '종의 분화는 자연선택의 결과'라고 정리했던 다윈의 진화론이 수정되는 엄청난 파장이 학계에 일었다.
중학교 시절의 우장춘(앞줄 오른쪽)
그가 1916년 대학에 입학했을 무렵, 자신에게 한국인의 혈통이 함께 흐른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는 사건을 겪게 된다. 어느 날, 조선에서 도지사가 방일하여 조선계 학생들을 대상으로 친일 연설을 하는 강당에서 와세다대학에서 유학 중이던 한국인 학생 김철수(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가 단상에 뛰어올라 그 도지사의 멱살을 잡고 항의하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는다.
대학 새내기였던 우장춘은 이 사건을 계기로 김철수를 수시로 만나게 되는데, 김철수는 우장춘에게 '너의 부친 우범선이 매국한 것에 대해 속죄하려면, 조선의 독립과 조선을 위해 네가 배운 바로 봉사해야 되고 절대로 너의 조선인의 성을 갈아서는 안 된다'는 제대로 된 민족주의 의식을 심어 준다. 그 이후 김철수와 우장춘 박사는 서로가 작고할 때까지 오랜 우정을 유지할 정도로 막역하게 지냈다고 한다.
1924년에 일본인 와타나베 코하루(渡辺小春)와 결혼했다. 모친 사카이 나카의 친구가 똑똑한 우장춘에게 자기 아들의 가정교사를 해달라고 부탁하여 우장춘이 그 집에서 가정교사를 하고 있었는데, 그 어머니 친구의 고종사촌동생이 코하루였다고 한다. 두 사람은 집에서 당연히 자주 만나면서, 결국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코하루 집안의 남자 어른들이 우장춘을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였고, 결국 코하루는 집안과 의절하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그래서 코하루는 3년 후, 망명 조선인을 지원하는 일본인의 명목상 양녀가 되어 스나가로 성씨를 바꾸고 우장춘은 그 일본인의 데릴사위로서 스나가 나가하루(須永長春)라는 이름을 얻었다. 자녀들도 일본인으로 키우기로 하여 스나가 성을 사용했으나, 우장춘 본인은 계속 우 씨 성을 사용했다. 그가 쓴 영어 논문에도 저자가 '우 나가 하루(Nagaharu U)'로 나와 있어 서양에서는 다들 일본인인 줄 알았다고 한다.
1936년에는 과학계에서 호평을 받은 논문을 발표하면서 도쿄 제국대학에서 조선인으로는 두 번째로 농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지만 그의 공식적인 위상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첫 직장인 농사시험장에서, 무려 16년 동안 '기수(技手)'라는 하위직의 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주변적인 연구주제로 간주된 원예분야만을 맡고 있을 뿐이었다. 1937년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이후 곧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온 타키이 종묘 회사에 연구원으로 입사하여 그곳에서 십자화과 식물에 대한 연구에 진력하다가 1945년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퇴사했다.
1950년 단신부임으로 한국에 귀국하기 직전 찍은 우장춘 박사의 가족사진
이후 4년 반이나 전후의 여파를 그대로 받은 일본처럼 아무런 직업 없이 지내다가 1947년부터 한국에서 우장춘 박사 귀국 운동이 벌어져 1950년에 귀국하였다. 이때 일본은, 정작 그를 중용하지는 않으면서도 한국에 그를 보내는 것이 아쉬워, 여러 수를 동원하게 되는데, 심지어 그를 감옥에 가두려는 꼼수까지 부리며 귀국을 방해했지만, 우장춘은 한 발앞서 자기 발로 조선인 강제수용소에 들어가 한국 정부에서 보내 준 한국인 신분증을 제시하면서 송환선에 탑승하는 방식으로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사실 광복 이후 이승만 정권에서 우장춘을 농림부 장관으로까지 임명하겠다고 설쳤던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은 농업 생산력이 부족해 우량종자의 개발과 보급이 필수적이었고, 우장춘과 같은 농학 인재는 대단히 귀중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그 증거로, 그가 한국에 귀국하자마자 한국농업과학연구소의 소장으로 취임한 그에게 100만엔의 이적비를 그에게 준다. 현재로는 10억 원이상의 가치를 갖는다. 그런데 정작 우장춘은 그 돈을 한국에 뿌릴 우량종자를 사는데 다 써 버렸다. 그는 귀국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다짐을 표명한다.
"이제껏 어머니의 나라에서 일본인 못지않게 노력해 왔습니다. 지금부터 아버지의 나라 한국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이 나라에 뼈를 묻겠습니다.”
이후 한국에서 사망할 때까지 9년 간 지내며, 한국의 육종학과 농업의 발전에 기틀을 다졌다. 막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6.25가 터지고 대한민국 해군 정훈장교로 임관해 소령으로 전역하기도 했다. 대우를 해주면서 모셔왔다고는 하지만, 정작 당시 열악했던 한국 사정도 그렇고, 무엇보다 당시 주변의 한국인들이 정작 그에게 협조적이지 않아 그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농림부의 지원이 필수적이었던 우장춘은 수차례 지원을 요청했으나, 농림부가 돈이 없다며 거절했고, 참다못한 우장춘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직접 찾아가 하소연했더니 대통령이 농림부 장관을 불러 질책했다는 등의 일화는 말만 초대 소장이지, 그에 대한 질시 때문에 그가 일본에서 받았던 것과는 또 다른 형태의 차별을 얼마나 심하게 받았을지 짐작할만하다.
어머니가 갑자기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해받고 일본으로 가기 위한 여권을 마련하기 위해 고생하면서 이승만에게 발급을 도와달라는 편지를 보냈지만 끝내 여권을 발급받지 못했던 사연도 있었다. 일설에는 우장춘이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며 무시하라는 주변의 충고를 이승만이 충실하게 듣고 이행했다는 말이 있는데 아주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지 싶다.
농가에 수익이 큰 벼와 감자, 무와 배추 등을 개량하기도 했다. 특히, 제주도, 거제도 등 남부 지역에서의 귤 재배 가능성을 시험하기도 하며 연구에 몰두했다. 실제로 결과가 뛰어나 현재 감귤 종자에 대한 부분은 당시 우장춘이 기반을 닦은 그대로 혜택을 받았다고 봐도 무리가 없다고 할 수준이다.
1959년, 서울 메디컬 센터에 입원하여 십이지궤양 수술 후 병세가 악화되어 8월 10일에 사망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임종이 예상되자, 사망 몇 시간 전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수여하는 코미디를 찍는다. 그나마 병상의 우장춘 박사 본인이 "조국이 드디어 나를 인정했구나! 그런데 조금만 더 일찍 주지..."라면서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전해져 온다.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 정부 수립 이래 최초의 사회장이었다.
우장춘이 무슨 실패를 겪었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의 인생은 부침의 연속이었다고 생각한다.
일제 식민지 시기에 얼굴을 채 기억하지도 못할 나이에 암살당한 한국인 아버지를 둔 혼혈아.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한국의 국적을 얻어 한국 유학생의 신분으로 얻은 조선총독부 관비 유학생.
태어날 때부터 일본인들의 질시와 무시를 받으며 자생해야 했던 그에게, 고아원에서 지내던 6살 아들을 집으로 데려오면서 그의 어머니는 이런 이야기를 해주며 그를 교육시켰다고 한다.
“사람의 발에 밟히면서도 꽃을 피우는 길가의 민들레처럼 어려움을 이기고 훌륭한 사람이 돼야 한다”
그렇게 힘겹게 공부를 하면서 그는 일본의 농학 엘리트들 사이에서 출신의 장벽을 극복하기 위해 박사 학위 논문에 열과 성을 쏟았다. 어찌 보면 그에게 있어 그것은 유일한 탈출구이자 신분상승의 길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노력을 쏟아 1930년 완성한 나팔꽃의 유전에 관한 논문은 불행히도 제출 하루 전날 시험장에서 발생한 화재로 연구자료와 함께 전부 불에 타버렸다.
과연 그것이 우연이라고 여길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누가 왜 그런 짓을 했을지에 대한 의심은 수없이 그를 괴롭혔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의 좌절하며 눈물을 흘리는 그를 보면서 쾌감을 느꼈을 쓰레기 일본인들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의 민들레 이야기를 곱씹으며 결코 좌절하지도, 눈물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불에 탄 논문에 미련을 두지 않고 과감히 과제를 유채꽃으로 변경하고 바로 다음날부터 연구를 다시 시작했다.
당신이 이제까지 겪었을 그 어떤 고난도 우장춘의 그것보다 더 크지 않을 거라는 조심스러운 짐작을 해본다.
아니, 실제로 자신이 겪은 고난과 실패가 다른 사람의 그 어떤 고통보다 더 아플 것이라는 것은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장춘 박사의 이야기를 오늘 당신에게 새롭게 소개하는 이유는,
그의 고난이,
그가 잘못하였거나, 혹은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음에 있다.
그가 부모를 선택할 수 없었듯이 그가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그때마다 최선을 다했다.
당신은 지금 당신이 겪은 실패와 좌절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지는 않는가?
타이밍이 안 맞았고, 투자가 여의치 않았으며
다른 사람들이 나의 능력을 제대로 봐주지 않았고
하필이면 나보다 조금 더 잘난 자가 내 앞에 나타나는 바람에 당신이 실패하였다고 핑곗거리를 찾고 먹어보지도 않은 포도가 실 것이라고 구시렁거리지 않는가?
그는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조국을 자신의 조국으로 선택했고, 자신이 배운 모든 지식과 경험을 아버지의 조국이자 자신의 조국을 위해 헌신했다.
그는 자신의 61년 생애중에서 단 9년 만을 조국에서 보냈다. 아주 농축된 헌신된 삶으로 자신에게 조국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준 벗의 말대로 봉사하는 마음으로 전심전력을 다하고, 유언대로 조국에 뼈를 묻었다.
당신이 선택할 수 없는 고난에 대해 당신이 일일이 분석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당신이 극복해야 할 것이고,
극복하면 그뿐이다.
당신이 감내할 수 없는 고통을, 하늘은 결코 내리지 않는다.
당신이 이겨낼 수만 있다면 당신은 더 견고하고 강해진 새로운 자신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지쳐 힘겨워하는 당신에게 우장춘 박사의 삶이 농축되었을, 그의 조언을 전한다.
"창의성은 그 사람의 재능이 아니고 훈련에 달려 있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생각하고 연구해서 터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