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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Aug 09. 2021

비디오 렌털 연체료로 40달러를 물고 열 받은 끝에..

스스로가 납득할만한 서비스 시스템을 만들어버리다.

요즘 두둥~하는 소리와 함께 N자가 떠오르는 이 장면에 너무도 익숙해진 느낌이다.

전 세계 190여 개국 9800만 명의 시청자가 이용 중인 세계 최대의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 '넷플릭스(Netflix)'.

별도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의 유명세를 타고 이는, 코로나 최대의 수혜기업이라고 부러움을 사고 있는 현시대를 대표하는 상품이라고 하겠다.


수많은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등을 무제한으로 감상할 수 있다는 장점을 바탕으로 넷플릭스는 서비스 가입자 1억 명을 눈앞에 두고 있다. 타사가 제작한 콘텐츠를 제공하는 단계에서 일찌감치 미래 시장을 보고 투자하기 시작한 자체 제작 콘텐츠의 제공이 더해지면서 전 세계 가입자들은 넷플릭스 홀릭에 들어갔다.

현재 넷플릭스는 1년에 약 50억 달러에 이르는 막대한 돈을 투자해 600시간이 넘는 자체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다. 한국의 작품들 역시 봉준호 감독의 <옥자>를 비롯해서, 극장 개봉에서 선회했던 <승리호>에서 드라마로 이어지는 <킹덤> 시리즈와 <스위트홈>에 이르기까지 연타석 홈런으로 한국은 물론, 동남아를 중심으로 전 세계에 신한류를 개척하는 첨병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이 기업을 누가 어떻게 왜 만들었는지에 대해 알고 있는 이들은 드물다.

넷플릭스 왕국을 설립한 인물은 리드 헤이스팅스이다.

그의 본명은 '윌모트 리드 헤이스팅스 주니어(Wilmot Reed Hastings, Jr)'.

1960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시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 윌모트 헤이스팅스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보든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한 후,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스와질란드에서 2년 동안(1983~85)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수학을 가르쳤다.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스탠퍼드 대학교에 진학해 1988년 컴퓨터공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90년대 초 그는 전공의 특성에 맞게 개발자로 '어댑티브 테크놀로지'에 입사해 소프트웨어 디버깅 도구를 개발했다. 그리고 사표를 내고 1991년 소프트웨어 개발자를 위한 개발 툴을 만드는 '퓨어 소프트웨어'사를 설립했다. '퓨어 소프트웨어'사는 시대의 흐름에 맞게 급성장하게 된다. 1995년에는 마침내 IPO(기업공개)를 진행할 수 있을 정도로 그 크기로 회사가 성장하게 된다.


하지만 1997년 '퓨어 소프트웨어'사는 개발 프로세스 관리 도구를 만드는 '래셔널 소프트웨어'사에 적대적 인수합병을 통해 흡수된다. '래셔널 소프트웨어'사는 리드 헤이스팅스에게 최고 기술 책임자(CTO)의 자리를 맡기겠다는 제안을 하지만 자신만의 회사를 원했던 리드 헤이스팅스는 새로운 창업을 위해 그가 6년 동안 키운 회사를 떠난다는 파격적인 결정을 내린다. 만약 그가 그저 그 회사에 남아 적당히 스톡옵션을 챙긴 개발자 출신의 CEO였다면 이 글의 주인공이 되기에는 20% 부족했을 것이다.


회사를 매각하고 잠정적 백수생활을 하던 리드 헤이스팅스에게 작지만 파급이 엄청난 사건이 발생한다.

비디오 대여점에서 영화 '아폴로 13'을 빌려다 본 리드 헤이스팅스는 비디오테이프를 제때 반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40달러에 이르는 연체료를 지불해야 하는 불상사를 맞게 된 것이다.

좋은 동네에 살다 보니 비디오 대여점이 멀었던 탓에, 왔다 갔다 하는 것도 귀찮았지만, 조금 늦었다고 어마어마한 연체료까지 내야 한다는 사실에 그는 이 불합리한 서비스 시스템에 분노한다.

다른 사람이라면 짜증을 내고 말았을 그 상황에 그의 머리 위로 전등불이 들어왔다.

이렇게 일반화된 불합리 시스템이라면 그것을 개선하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훌륭한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 창업 기회를 찾은 것이다.


거실에 앉아서 명령 한 번만 내리면 원하는 드라마와 영화를 즉시 볼 수 있고, 내가 이미 다 본 콘텐츠를 즉시 반납할 수 있는 서비스. 1990년대 초에 떠올린 아이디어라는 점을 감안하면 획기적인 것을 넘어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는 시스템 개발자들을 위한 개발 툴을 개발하던 사람이었다.

그 당시는 마침 피어오르던 컴퓨터를 이용한 인터넷 기술이 WWW를 만들기 시작하려던 시대였던 것이다.

그는 기술이 시장에서 어떻게 파급되는지에 대해 충분히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예상대로라면 '조만간' 자신의 아이디어대로 모든 사용자들이 거실에서 원하는 드라마와 영화를 즉시 감상하고 바로 반납할 수 있는 시스템은 일반화될 것이 분명했다.

더 이상 다른 사람이 이 좋은 아이디어를 사업화할 수는 없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1997년 '퓨어 소프트웨어'사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인 마크 랜돌프와 함께 실리콘밸리 남쪽 캘리포니아주 로스가토스시에서 새 회사를 창업하게 된다.


회사의 이름은 인터넷을 뜻하는 '넷'과 영화 주문을 뜻하는 '플릭스'를 합쳐 '넷플릭스'라고 지었다.


이름 그대로 인터넷에서 영화를 주문하는 서비스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사실 마크 랜돌프는 넷플릭스가 무엇을 하는 회사인지 정확히는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냥 막연히 인터넷을 통해 무엇인가를 판매하는 회사라고만 생각하고 친구의 호출에 따른 것이다. 즉, 넷플릭스의 아이디어는 모두 리드 헤이스팅스 한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리드 헤이스팅스는 비디오 대여와 감상이 모두 인터넷에서 이루어지길 원했지만, 초창기 인터넷의 열악한 환경에선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현실에 맞춘 타협이 필수적이었다. 초기 넷플릭스의 형태는 비디오 대여점을 인터넷으로 사용할 수 있는 정도로 한 예약주문 서비스 같은 형태였다. 사용자가 넷플릭스 홈페이지에 접속해 원하는 콘텐츠를 주문하면 해당 콘텐츠가 담긴 비디오테이프가 우편으로 사용자에게 전달된다. 이후 반납일이 되면 사용자는 우편으로 비디오테이프를 넷플릭스에 반납하면 되는 다소 원시적인 형태였다. 처음 아이디어였던 비디오테이프를 빌리거나 반납하기 위해 일부러 가게까지 오고 가야 하는 번거로움을 해결하는 데는 성공한 것이다.


넷플릭스는 1998년 30명의 직원과 925개의 콘텐츠를 갖추고 비디오테이프 임대 서비스를 시작했다. 1999년에는 넷플릭스 서비스의 핵심인 '월간 구독 서비스'라는 것을 시작하게 된다. 월마다 일정 금액(초기에는 5달러)을 내고 넷플릭스 회원으로 가입하면 넷플릭스가 보유 중인 콘텐츠를 무제한 임대할 수 있는 서비스였다. 한 번에 하나의 콘텐츠만 임대할 수 있고, 임대한 콘텐츠를 반납해야만 다시 새 콘텐츠를 임대할 수 있는 형태였다. 무엇보다 가장 큰 특징은 리드 헤이스팅스가 초기에 구상한 대로 '연체료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회원 가입 도중이라면 한 콘텐츠를 계속 빌리는 것도 가능했다.

이러한 서비스를 바탕으로 가입자를 늘려나갔고, 마침내 넷플릭스는 미국 최대의 오프라인 비디오 대여점인 '블록버스터'의 경쟁자로 떠오르게 된다.


그러나 넷플릭스의 수익성은 생각만큼 좋지 못했다. 사용자에게 받는 개별 요금이 낮은 데다가, 콘텐츠의 순환이 빨리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창립 이래로 계속 적자 행진이었다. 때문에 2000년에 들어서면서 리드 헤이스팅스는 '블록버스터'사에 넷플릭스를 매각하기로 결정한다. 마침 '블록버스터'사는 오프라인 대여 시스템만 구축하고, 온라인 대여 시스템이 없었기 때문에 좋은 거래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매각 대금으로 5,000만 달러 정도면 그간의 노력의 대가로도 충분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블록버스터'사는 넷플릭스의 이러한 제안을 단칼에 거절한다. '블록버스터'사의 전체 규모에 비하면 미약하기 짝이 없는 넷플릭스 따위(?)를 거액을 주고 인수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었다. (이 멍청하고 한심한 판단은, 야후의 구글 인수 거부와 함께 IT 업계에서 인수를 통해 경쟁자를 제거할 기회를 놓친 대표적인 사례로 두고두고 회자되게 된다.)


어이없는 거절에 다시 열 받은 리드 헤이스팅스는 결국 넷플릭스를 독자적으로 성장시키겠다는 결정을 내린다. 가장 먼저 IPO를 진행해 성장을 위한 자금을 확보했다. 이후 미국 각주에 물류센터를 구축하고 해당 센터를 통해 사용자에게 콘텐츠를 빠르게 임대하고, 유통하는 구조를 구축했다. 사용자가 임대를 신청하면 늦어도 하루 안에 콘텐츠를 받아볼 수 있도록 했다. 비디오테이프 시장에서, 한 번에 대량 유통이 가능한 DVD로 매체가 바뀌면서 넷플릭스에겐 기회가 오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초기부터 시작했던 넷플릭스의 콘텐츠 추천 시스템은 사용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사용자가 임대한 콘텐츠의 장르와 특징을 파악하고 분석한 후 사용자 취향에 맞는 콘텐츠를 추천하는 서비스로 진화한 것이 주효했던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어 불과 2년 만에 적자에서 흑자로 돌아서는데 성공했고, 2005년에는 3만 5,000개의 콘텐츠를 보유하고 매일 1백만 개의 DVD를 유통하는 온라인 콘텐츠 대여 업계의 강자로 입지를 굳히게 된다.


반면 넷플릭스 인수를 거부한 '블록버스터'사는 지속적으로 그 세가 축소되어 결국 2010년 파산보호 신청을 하고 2013년 마지막 점포를 정리함으로써 역사의 무대에서 퇴출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만다.


2007년에 들어 넷플릭스는 획기적인 변화를 시도한다. 창업 초기부터 꿈궜던 리드 헤이스팅스의 바람대로 이제 시스템이 현실화되어 인터넷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넷플릭스는 무료, 광고 위주로 구성되어 있던 기존 동영상 스트리밍과 달리 철저하게 유료, 콘텐츠 위주로 서비스를 구성했다. 넷플릭스 회원에만 가입하면 추가 비용 없이 넷플릭스의 모든 콘텐츠를 감상할 수 있었다. 콘텐츠 중간에 보기 싫은 광고 같은 철저하게 배제했다. 지상파와 케이블 TV에서 내보내는 수많은 광고에 지친 미국 사용자들은 이러한 넷플릭스의 정책에 열광했다. 가입자가 급격하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후엔 사업이 순풍에 돛 단 듯이 흘러갔을까?

물론 그렇지 않았다. 콘텐츠 유통업자들이 콘텐츠 제공을 거부하여 한동안 DVD와 병행했어야 했고, 넷플릭스 전용 단말기를 만들겠다고 했다가 셋톱박스 사업을 다 말아먹는 실패도 있었다.

절대 미국 독자 서비스사를 받아주지 않던 중국에 진출하기 위해 바이두와 손잡는 일도 과감하게 결정했다. 바이두의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인 '아이치이(iQIYI)' 브랜드로 중국에 영상 콘텐츠를 공급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2011년에 들어 넷플릭스는 두 번째 변화를 시도했다. 바로 콘텐츠 유통자에서 벗어나 콘텐츠 생산자로 거듭나기 시작한 것이다. 2011년 테드 사란도스(Ted Sarandos) 넷플릭스 최고 콘텐츠 책임자는 리드 헤이스팅스에게 '넷플릭스만의 자체 콘텐츠(넷플릭스 오리지널)'를 생산하자고 제안했다. 리드 헤이스팅스는 처음에는 이 제안이 돈이 너무 많이 든다는 이유로 거부한다.


하지만 시장의 흐름을 다시 분석한 리드 헤이스팅스는 다시 한번 현실과의 타협을 현실화한다.

투자를 하되, 기존, 콘텐츠 제작자가 감독에게 개입을 심하게 하는 할리우드식 제작 방식을 벗어나 철저하게 투자만 하는 방식으로 제작을 감행한다. 그렇게 탄생하게 된 작품이 바로  넷플릭스 최초의 오리지널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다.


2013년 공개된 '하우스 오브 카드'는 그야말로 대성공을 거둔다.

이 극적인 성공에 자신감을 얻은 리드 헤이스팅스와 넷플릭스는 자체 콘텐츠 제작을 더욱 강화한다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액션, 코미디, 스릴러, 다큐멘터리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콘텐츠를 생산했다.

리드 헤이스팅스의 가치관을 담은 저서

넷플릭스의 평균 연봉은 25만 달러가 넘는다. 전 직원이 억대 연봉을 받는 것이다. 근무 시간에 대한 제한도 없다. 반드시 자리를 지킬 필요도 없으며, 직원이 쉬고 싶을 때 언제든지 휴가를 내면 된다. 직원은 자신의 업무에 필요한 기기를 자유롭게 주문할 수 있고, 매니저의 허가 같은 것을 받지 않아도 새로운 업무나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추진할 수 있다.


대신 성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회사를 떠나야 한다. 회사에서 오래 일했다, 열심히 노력했다 등은 넷플릭스와 리드 헤이스팅스의 관심사가 아니다. 노력을 했지만 성과가 없었다면, 아쉽지만 그 직원은 회사를 떠나야 한다.


그는 넷플릭스 사의 인재 등용 이유에 대해 이렇게 단호히 설명한다.


"우리는 프로 스포츠 팀이지 아이들을 위한 레크리에이션 팀이 아니다.  최고의 스타플레이어들인 만큼 최고의 성과를 내야 한다. 대신 스타플레이어들은 그 능력만큼 대접받아야 한다"
철저한 실적 주의자인 그를 대표하는 말이다.

이제까지의 다른 글들과 조금 다르게 넷플릭스를 중심으로, 그것도 꽤 길게 이야기한 이유를 알아차린 독자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가 도대체 무슨 실패를 겪었느냐고 엉뚱한 질문을 하고 싶은 독자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는 매번 실패했다.

그런데 오늘 강조해서 이야기하려는 핵심은 그의 실패가 아닌, 그가 어떻게 그 실패를 이겨나갔는가 하는 것이다. 그는 현실과의 타협을 기가 막히게 조율하는 것을 그의 실패를 좌절이 아닌 성공 쪽으로 이어갔다.

그것은 그가 현실을 읽고 미래의 흐름에 맞춰 분석하는 능력을 갖추었기도 했지만. 당장 자신의 아이디어가 현실적으로 실현될 수 없을 때, 그것을 멀지 않을 미래에 어떻게 이어 나갈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다는 점이다.


그가 억울한 표정으로 40달러의 비디오 연체료를 내면서 가진 짜증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꿔놓았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연체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계속해서 비즈니스 모델에 두뇌를 열어놓고 집중시켰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야심 찼던 사업을 접고 매각하려고 했으나 거절당하는 수모를 겪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좌절과 달리 그는 다시 한번 그때까지의 문제점을 점검하고 수정하고 보완한다.


당신 역시 똑같은 일상을 살고, 똑같은 경험들을 한다.

똑같은 경험도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디에 집중하는가에 따라 완전히 다른 아이디어를 갖게 하고 아이디어가 샘솟아도 그것을 실현하고 현실화할 수 있는 사람과 그저 아이디어만 떠올리는 사람의 차이는 어마어마하게 크다. 그가 자원봉사 교사로 일생을 마치지 않았고, 개발자 출신의 CEO로 적당히 먹고 살 돈을 벌고, 그저 임원직으로 살지 않았던 것은 그가 스스로 고난의 길을 가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

그는 그의 아이디어를 실현하고 싶었고, 그것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투자한 것뿐이다.

제작에 투자하는 돈이 아깝다고 거절했지만, 다시 생각을 바꿔, 투자를 통해 훨씬 더 큰 가치를 벌어들일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기에 자체 제작 투자를 과감하게 결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누구에게나 변화는 두렵다.

끊임없이 계산하고 계획하고 준비해도

변화는, 변수는 두렵기 매한가지다.

하지만 그것에 맞서지 않으면

실제로 해보지 않고서 성공을 손에 쥘 수는 없다.

실패가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결국 실패는 고사하고 아무런 일조차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당신이 실패하지 않았다고 안도할 것인가?


그가 말하는 넷플릭스의 궁극적인 목표를 들으며

당신이 아직 얼마나 작은 시냇물에 머물러 있는지를

깨닫고 얼른 더 넓은 바다를 향한 항해를 시작할 수

있게 되기를 응원한다.


"라디오가 위성으로, 위성이 케이블로. 50년마다 콘텐츠 전달 방식에 변화가 있었습니다. 지금이 바로 변화의 시대입니다. 넷플릭스가 이러한 변화를 이끌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저에게 넷플릭스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저는 언제나 동일하게 대답합니다. 넷플릭스의 궁극적인 목표는 동일한 콘텐츠를 전 세계 모든 국가에 동시 제공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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