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결혼한 부부의 사랑을 전우애라 부르는가?
지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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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누가 뭐라 하더라도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고 가장 큰 가치임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는 개념이다.
결혼은 ‘당연히’ 서로 사랑해서 한다.
결혼 상대를 선택하고 결혼식장에 정식 옷을 차려입고 성혼선언문을 낭독하고 반지를 끼워주고 키스를 하는 그 모든 행위들은 내가 상대방을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한다고 하는 것을 만인의 앞에서 공표하는 사회행위에 다름 아니다.
연애를 시작하면서 사회적으로 공표한다거나 서로 간의 책임감을 법적으로 신고하는 방식으로 책임지지 않으면서 결혼은 그 번거로운(?) 과정을 모두 거치는 데에는 문화인류학적으로도 그렇고 사회학적으로도 그렇고 다 그럴만한 과정과 히스토리와 사연이 축적된 것이라는 의미이다.
사랑에 아파해본 적이 있는가?
‘가슴이 아프다.’라는 표현이, 비유가 아니라 생리적인 실제 감정이라는 것을 겪어본 사람들은 그 흔한 유행가 가사에 툭 튀어나오더라도 쉽게 공감한다.
정말로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파오고 저려오는 경험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가슴 저민 사랑을 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부모가 반대하며 머리를 밀고 방 안에 가두고 그 난리를 쳐도 창을 뜯고 야반도주하듯 사랑을 찾아 결혼을 쟁취(?)해냈던 그들이 불과 몇 년 살지도 못하고 서로 맞지 않는다면 이혼을 선택하는 일을 우리는 너무도 비일비재하게 본다.
그 말인즉은, 분명히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고통스럽고 아프고 가슴 저린 사랑이 어느 순간 어떤 계기를 맞아 시간이 지나고 나서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은, 아니, 상대가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원수 같은 감정을 느끼며 헤어짐을 선택하게 된다는 뜻이다.
너무도 당연한 자연의 섭리이자 간악한 인간의 감정이 그러하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냐?’냐고 가슴 저린 절규를 외쳐본들 이미 상대의 마음은 차갑게 식어버린 후인 경우가 너무도 많다.
당신의 사랑은 그렇지 않은가?
사랑의 가치를 폄하하자는 말은 아니지만, 사랑은 변한다.
물론 그것이 어떤 상황의 어떤 대상을 향한 어떤 형태의 사랑인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이런저런 미사여구를 붙여볼 수 있겠으나, 최소한 결혼을 결정하게 만든 그 사랑은 변한다.
그것이 변질인지 진화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결혼을 결정하게 된 그 불타는 사랑이 어떤 이유로든 시간이 흘러 변한다는 점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사랑은 연일 활활 불타오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매번 뜨거운 사랑을 위해 상대를 갈아타면 될 것 아니냐고 말하는 짐승 같은 자들이 득시글거려야 할 텐데 의외로 아직까지는 이혼한 커플들보다는 정상적인(?) 결혼을 유지하며 함께 살아가는 커플들이 더 많다.
왜일까?
그저 바보같이 애들을 싸질러 낳아뒀으니 얘들이 나중에 한부모 가정이라고 손가락질당할까 봐 참고 사는 구시대적인 부모님 세대를 생각하며 황혼이혼쯤을 꿈꾸며 참고 살아가는 커플들이 많은 것일까?
그럴 리가. 그런 이유라면 이렇게 폭증하는 이혼율이나 사회분위기의 변화를 설명하기엔 98%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그들은 많이 배웠든 가방끈이 짧든 돈이 더 많든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든 그것과 상관없이 그들이 결혼할 당시에 느꼈던 사랑이 변화하는 것에 따라 새로운 가치를 자연스럽게 체득해 냈기 때문이다.
수많은 결혼을 희화한 로맨틱 코미디를 보게 되면, 그들이 결혼을 결정하게 된 사랑의 이유가 나중에는 증오의 이유가 되는 경우를 클리쉐처럼 지겹게 보게 된다. 그것이 바로 우리네 결혼생활의 현실이 바로 그렇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방증에 다름 아니다.
돈이 많아서 결혼을 결정했는데, 사업이 망해서 돈이 없어지면 바로 이혼하는 것은 결혼이 아니다. 그건 말 그대로 비즈니스 계약일뿐이다. 너무 잘생기고 쭉쭉 빵빵해서 결혼했는데 늙고 쳐지고 배 나오기 시작하는 꼴이 도저히 같은 침대를 쓸 수 없다고 이혼하는 것은 그야말로 시장에서 하는 딜이고, 아이들의 사탕 고르기에 다름 아니다.
결혼은 맛없다고 바로 다른 식당으로 메뉴를 바꾸거나 처음에 달콤했지만 계속 물고 있으니 달콤을 넘어서 머리가 아파져서 냉장고 한 켠에 던져두는 사탕이 아니다.
결혼이 단순한 연애와 다른 것은, 처음 사랑이라고 착각(?)했던 것들이 모두 없어지고 나서도 유지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논의의 이야기일 수 있겠지만 미성년자가 결혼을 할 수 없는 것은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법적으로 규제된 것이다.(현행 민법상 18세부터 결혼이 가능하지만 미성년자는 부모 또는 미성년후견인의 동의가 필요한 상황이다.) 10대도 사랑을 한다. 아니 훨씬 더 뜨거운 사랑을 한다.
그런데 왜 결혼을 못하게 하나?
결혼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 나이가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매일같이 사랑을 나누고 싶고, 잠시라도 떨어져 있기가 싫고, 뭘 입고 뭘 해도 예쁘고 멋지기만 한 그 시기는 결코 길지 않다. 아이가 없는 부부의 이혼율이 아이가 있는 부부의 이혼율보다 높은 이유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그저 단순하게 내가 낳은 아이들에게 우리의 결정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피해를 입게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는 아메바식 사고밖에 할 수 없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이를 갖고 아이를 낳고 아이를 기르는 과정이 부부를 사랑이상의 ‘부모’로 진화시키기 때문이다. 이것은 부부를 ‘부모’로 만든다는 명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우애’라는 이름으로 명명 지을 수 있는 가족애를 만든다는 설명으로 변환될 수 있다.
우리 민족을 위해서도 아닌, 나라에 돈을 벌어다주기 위해 자신이 더 많은 돈을 벌겠다고 베트남으로 파병을 나갔던 참전용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전우애’라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이해하게 된다. 처음 비행기를 타거나 배를 타고 생전 처음 들어본 베트남이라는 곳을 가서 총을 지급받았음에도 그들은 상대방을 죽이고 돈을 번다는 가혹한(?) 마음가짐을 먹지 못한다. 1960대 베트남에 참전했던 이들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그들은 그저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젊은 청년들이었다. 전국 각도에서 온 그 나이또래의 젊은이들이 처음 만나 통성명을 하는 것만으로 ‘전우’라 불릴 수는 없다.
그들이 첫 전투를 나가 베트콩(베트남 공산당)을 죽여야 한다는 대의명분도 없이 어리바리하게 대응하는 듯하다가 처음 같이 배나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같이 밥 먹고 담배 피우고 통성명을 한 그 친구들이 베트콩의 총알에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을 보게 되는 순간, 그 순박한 대한민국 청년들은 눈이 돌아버렸다고 한다. 그 순간부터, 생사고락을 함께 넘어온 그들은 세상 어디에도 비할 데 없는 끈끈한 ‘전우애’로 가족 그 이상의 존재로 진화된 것이다.
뜬금없이 왠 베트남 참전용사의 전우애가 부부애와 무슨 상관인지 황당하게 들리나?
아니. 생전 처음 임신과 출산이라는 힘겨운 생리적인 변화와 부모가 되는 과정을 겪게 되면서 부부는 처음으로 서로 간의 사랑을 넘어 새로운 생명을 맞이하면서 눈물을 흘린다. 함께 그 어려운 과정을 이겨냈다는, 그 고귀한 생명을 두 사람이 오롯이 지켜내서 세상에 나오게 했다는 전투 아닌 전투를 겪어낸 것이다.
그 힘겨운 임신과 출산이 끝이 아닌 가벼운 시작이었음을 육아전쟁을 통해 다시 겪고, 아이가 처음 엄마, 아빠라는 말을 배우고 기어 다니기 시작하면서 부부에게는 또 다른 공통의 목표가 생기게 된다. 사랑하니까 사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해내야 할 책무이자 부모로서의 책임이 주어지는 것이다. 아이의 분유값을 벌고, 아이의 학원비를 벌고, 아이의 비싼 옷값을 충당하는 것만이 공동의 책무는 아니다.
아이에게 처음 자전거를 타는 법을 가르치고, 젓가락을 올바로 쥐는 것을 가르치고, 책을 읽는 것을 곁에서 지켜봐 주고, 놀이터에서 다른 아이들에게 맞고 오면 같이 가서 언성을 높이고 하는 과정에서 부부는 부모이자 전우로 거듭난다.
아이들이 커가는 과정은 그들이 얼마나 많은 전투를 함께 견뎌내 왔는지를 보여준다. 물론 딩크족이라 아이를 갖지 않는 부부들에게도 살면서 함께 이겨낸 고난과 전투가 없는 것은 아니니 전우애가 없다고 볼 수는 없겠으나, 상대적으로 인간의 종족 계승의 본능을 위해 태어난 자녀와 함께 그 과정들을 통과(?) 해내온 부부는 더 강한 전우애로 가족애를 함께 성장시켜 나간다.
당신이 헤어질 결심을 하기 전에 냉정하게 생각해 볼 것은 그 전우애가 어떠했는지에 대한 부분이다.
다음 편은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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