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항일투쟁열사기(抗日鬪爭烈士記) - 18

일본인은 절대로 정면승부를 하지 않는다. - 1

by 발검무적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2059


일본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하면서 방학은 늘 동민에게 있어 시련의 잠복기였다.

2005년 9월 일본에 처음 발을 내딛고 나서 2005년 겨울방학에서부터 2006년의 여름방학,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가 한국에 가서 일본의 연구실에 없었던 시기는 언제나 이상한 소문과 모함이 한국에서 지내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 그를 괴롭혔다.


지도교수 사토 렌코쿠는 언제나 그 포문을 가장 먼저 여는 선발대 역할을 자처하기 일쑤였다. 그게에는 사실 확인을 한다는 대의명분이 있었지만, 한번 그에게 불려가서 진실을 규명하고 나면 정작 그때까지의 모든 험한 소문들을 간접적으로 공격하는 것은 일본인 특유의 이죽거림을 넘어서 사토 자신이 그것을 즐기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그는 비아냥과 농담의 소재로 삼기를 멈추지 않았다.


2006년 여름 두 달간 한국에 나갔다 들어온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소문은 ‘몹쓸 성격의 새디스트’였다. 여름방학이 시작되던 7월말에 한국에 들어갔다가 두 달여의 시간을 보내고 연구실에 돌아왔을 때였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사토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방학을 잘 쉬었고 이제 논문지도를 다시 시작하고 공부를 다시 시작하자는 보고전화를 넣었다.


“그렇지 않아도 할 말이 있으니 다음 주 수요일 오후 4시경에 연구실에서 기다리지. 내가 도착하지 않으면 일단 기다리고.”


그렇게 짧고 차가운 목소리를 들으며 동민은 또 고개를 갸웃했다. 사키에의 세크하라 누명사건이 지난 지 반년 정도 지났지만 최소한 사토교수는 지도교수로서도 그렇고 평상시에 그를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었기에 최소한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알려줄 수 있는 유일한 아군이었기 때문이었다.


약속한 날 연구실에 대기하고 있은 지 30여분이 지나서야 무척이나 서둘렀다는 잔걸음으로 달려 연구실 문을 열고 사토가 동민을 불렀다.


“1분 있다가 내 연구실로 들어오지.”


약속한 시간에 늦은 것에 대한 양해는 고사하고 그의 얼굴은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언제나 순진무구한 사토교수의 굳은 얼굴을 보고 동민은 다시한번 심각하게 마음을 다잡고 그의 연구실로 들어섰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녔길래, 여학생을 울렸다는 소리가 다나오고 말이야. 박군 그렇게 안 봤는데 여기

저기 학생들과 이렇게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다니면 내가 아주 곤란하네.”

“예?”


갑작스런 그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범죄자를 취조하는 형사의 얼굴에 다름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제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려주셔야···”

동민은 차분히 사토의 얼굴을 살피며 다시 물었다.


“자신이 한 일을 모른단 말이야? 중국문학 전공의 여학생에게 가혹행위를 하고 울리고 난리가 났었다고 들었는데 내가 무슨 바보인줄 아나?”


평상시 온화하기 그지없던 사토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사토가 아이같이 순진한 얼

굴을 하고 지극히 감정적인 사람이라는 것은 익히 예상하고 있었던 터였지만 이렇게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도 이제는 익숙해진 터였다.


“저에게 해명할 기회를 먼저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차갑게 동민이 말을 이어갔다.


“지난번 사키에의 세크하라 건 만에도 제가 먼저 말씀드렸고 그것이 누명이라고 확실하게 해명했을 텐데요. 기억하고 계시지 않나요?”


의외로 냉정하게 상황파악을 끝낸 동민의 태도에 사토의 얼굴이 급격하게 원래의 색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선생이라는 입장을 생각해서인지 험악하게 잔뜩 화가 났다는 표정을 유지하려는 노력은 그치지 않았다.


“그러면 이번에도 무슨 할 말이 있다는 건가?”

‘이번에도?’


하마터면 입 밖으로 그렇게 항의를 할 뻔했다. ‘이번에도’라니? 지난번에도 누명이라고 말했더니 진상규명을 핑계로 사키에에게는 물론 먼저 말을 꺼낸 동민을 이상한 성추행 용의자로 만들었던 렌코쿠 아니던가? 동민은 다시한번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분노를 삼켜야만 했다.


“제가 뭐라고 백번 말하는 것보다 이번에는 증거도 가지고 있으니 증거를 보여드리지요.”


대강 감정이 격해서 자신의 변명에 급급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렌코쿠는 의외로 침착하게 증거까지 운운하며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겠다는 동민의 태도가 뻔뻔한 거짓말이라고 느껴졌다. 동민이 없는 동안 연구실의 학생들이 모여서 쑤군거리는 소문에 귀를 기울여 다수의 학생들이 동민의 마구잡이 행동에 대해 성토하는 것을 분명히 들었고 증언을 확보한 터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일본학생의 경우, 선생의 앞에 불려와 이렇게까지 추궁을 당하게 되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머리를 숙이는 것이 인지상정이라고 알고 있던 자신의 경험상 지금 동민이 보이는 태도는 이제까지의 행동처럼 언제나 자신이 옳고 떳떳하다는 그 꼿꼿하고 당당한 태도를 전혀 바꾸지 않았다. 그 자체가 그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곱게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이며 자신의 잘못을 빌라고 부러 쎄게 나간 것이었는데 이제는 증거까지 준비되어 있다면서 진실을 밝히겠다고 하지 않는가?


“증거? 허풍 아닌가? 정말 있다면 지금 내 앞에 가져올 수 있겠어?”


렌코쿠가 동민의 표정을 살피며 허를 찔렀다는 듯이 아주 잠시였지만 히죽 입가에 미소를 흘렸다.


‘흥분해서 증거라고 말을 했을지는 몰라도 지금 당장 내놓을 수 있을 리 없지 않나? 안그래?’


“알겠습니다. 모든 정황을 설명하는 당사자의 이메일이 있으니 지금 연구실에 가서 당장 출력해오도록 하겠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굳은 표정의 동민이 고개를 살짝 숙여 예를 표하고 방을 나서버렸다.

렌코쿠가 아차, 하는 생각을 했던 것도 잠시, 5분이 채 지나지 않아 동민이 다시 자신의 눈앞에 나타났다.


“제가 백번 떠들어봐야 변명으로 들릴 수 있을 테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이 이메일을 보시고 직접 판단하시지요.”


동민이 손에 들고 있던 인쇄된 종이를 내밀었다. 떨떠름한 표정의 렌코쿠는 그것을 받아 읽기 시작했다.

이메일은 문제의 피해학생이라는 코모리라는 여학생이 동민에게 직접 보낸 이메일이었다.


안녕하세요. 중국문학 연구실의 코모리입니다.


파일 잘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당신이 번역하시겠다고 했던 한국 작가분의 그림책을 교재로 보내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설마 이렇게 그림이 능숙한 한국인 작가가 있다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이 그림은, 마치 일본에서 인기가 있는 ‘이와사키 치히로’의 그림을 닮아 있습니다.

이와사키 치히로는 초등학교 교과서의 삽화에도 사용되었고 미술관도 2개나 있습니다.

죽은 지 30년이나 지났기 때문에 이러한 화풍이 귀중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와사키 치히로

http://www.chihiro.jp/

그 밖에도, 수채화계통의 인기가 높은 것은 현역에서 활동하는 작가로는 ‘오오타 케이분’이 있습니다. 무척이나 예쁜 그림이니 홈페이지에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오오타 케이분

http://www3.ocn.ne.jp/~keibun/


특별히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만, 저를 이 그림책의 번역자로 해 주실 수 없습니까?

물론, 돈도 권리도 일절 필요 없습니다.

책에 번역자라고 제 이름을 넣어 주세요.

책에 이름이 들어가면, 취직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고등학교의 교원이 되고 싶습니다만, 채용시험의 배율이 현재 120대 1의 좁은 문입니다. 교원 응모할 때 시험성적이 부족하더라도 ‘내가 번역한 책이 있다’ 라고, 이력서에 쓸 수만 있다면 상당히 유리하다고 생각합니다.


협력해 주실 수 없을까요?

제 쪽에서도, 완벽한 일본어 문장을 만드는데 노력하고, 출판사에 교섭하는 것도 적극 협력하겠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일본어 문장과 그림책의 페이지가 딱 맞아서 편집자가 읽기에 쉽게 정돈하거나 전체 개요를 준비하거나 한국인 작가의 소개문장을 쓰거나 한국에서의 프로필을 일본어로 번역하고 어느 정도 반응을 유도하는 등을 어필하려고 이것저것 생각중입니다.


제가 분석한 바로는, 박상이 번역하신 이 그림책 같은 경우는, 초등학교 고학년의 여자아이와 그 모친을 독자로 하는 것이 적격이라고 생각됩니다. 최근의 일본의 젊은 여성이 읽는 그림책은, 캐릭터 위주의 것이 많기 때문에, 일본 독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에 대해서는 주석을 달아서 설명하거나 추석 등의 한국 문화에 대해서도 알 수 있는 교양 노선으로 가야하지 않을까하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출판사와는 벌써 연락을 하고 계신다고 하시니까, 저의 아마추어적인 생각으로 어줍잖게 말참견을 하는 것 같아서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 코단샤 그림책 신인상

http://shop.kodansha.jp/bc/ehon/s_oubo/s_oubo.html


일본에서는 보통, 작가는 신인상을 통해 데뷔합니다. 대기업 출판사에서는 원고의 반입을 받아들이지 않고, 대신에 신인상이 출판의 창구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또, 상을 받으면, 출판회사가 선전으로 비용을 걸어 주고, 책이 팔린다고 하는 장점도 있다고 합니다.


코모리 유키코


“지금으로부터 5개월 전이나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동민이 이메일을 읽고 있는 렌코쿠를 향해 부연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렌코쿠는 이메일을 읽는 순간 얼굴이 약간 일그러졌다. 설명을 듣기 전에 그 내용만으로도 문제의 코모리라는 여학생이 동민에게 이상한 부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만 했기 때문이었다.


“공대에 교환교수 오신 분의 작품인데, 일본어로도 작품을 직접 번역하셨기에 제가 번역이 어색한 부분이 없는지 그리고 그 분이 한국에서 이미 출판하셨던 책이었기 때문에 일본에서 출판할 생각을 가지고 계신다고 하여 그 분이 일본어로 번역한 원고를 가지고 한국어를 제법 할 줄 아는 학생이 문학 연구생에 있다고 하여 코모리를 소개받았습니다.”

“···”


아무 말 없이 다음 장을 넘기며 이메일을 읽으려던 렌코쿠를 향해 동민이 차갑게 말했다.


“한국어 공부를 하고 싶다고 하길래, 그 분의 그림책과 원고를 일본어로 번역된 것을 교재로 함께 교정하면서 공부를 하자고 말을 꺼낸 것인데, 갑자기 이런 말도 안되는 이메일을 보내면서 자신을 번역자로 해달라고 억지를 부렸습니다. 그것도 만나서 얘기할 때는 아무런 소리 하지 않다가 이메일로 불쑥 그런 제안을 하길래 이메일로 정중하게 이미 작자가 직접 번역한 일본어 원고가 있는데 교정을 도와준 사람을 번역자로 올리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거절하였습니다.”


https://brunch.co.kr/@ahura/91


“무슨 책 출판하겠다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나? 자네도 출판을 했었나?”


한국에서 동민이 저술활동을 했었다는 것은 들은 적이 있었지만 그것을 허풍이나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던 렌코쿠는 그것이 사실이라는 점이 못내 놀라웠다. 20년이 다 되어가는 교수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이름으로 책을 낼 생각이라고는 엄두도 못 내고 언젠가는 대단한 저술이 나올 것이라고 허풍을 떨던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봤을 때 한참 연배도 아래인 이 한국인이 자신의 출판 저작물이 있다는 것은 그닥 기분좋은 일이 아니었다.


“자네 말이 맞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왜 싸웠다는 말이 나왔지?”

“다음 이메일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제가 번역자를 따로 둘 거라면 굳이 그 분이 직접 일본어로 쓰지도 않았을 것이고, 내가 다시 수정할 것도 별로 없어서 코모리상이 일본어 번역자로 등재될 일은 없다고 거절하자, 그녀가 끈질기게 자신의 요구를 들어달라고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동민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 말 그대로 일본인의 자존심을 버린 듯한 구차한 이메일 증거가 버젓이 렌코쿠의 눈에 들어왔다.


다음 편은 여기에...

https://brunch.co.kr/@ahura/2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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