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조림 회사의 이름으로, 해체하고 나서 39년이 흘러도

우리가 다시 노래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by 발검무적

1966년 6월 비에른 울바에우스(1945년 출생)가 벤뉘 안데르손(1946년 출생; 한국인들은 '베니'라고 많이 부른다.)을 처음 만나게 된다. 비에른 울바에우스는 매우 인기 있는 포크 음악 그룹인 '후테나니 싱어즈'의 멤버였고, 벤뉘 안데르손은 1960년대 스웨덴의 가장 인기 있는 팝 그룹이었던, '헵 스타즈'에서 키보드 연주자였다.

3주 후 두 번째 만남에서 그들은 울바에우스의 부모님 집에서 파티를 한 후, 나중에 '헵스타즈'가 발표한 첫 번째 공동곡인 'Isn't It Easy to Say'를 썼다. 이들은 이후 대중음악사에 남을 송라이터로써 역사적인 파트너십을 맺게 된다.


1969년 봄, 울바에우스와 안데르손은 그들의 미래의 배우자이자 ABBA의 나머지 멤버들이 될 두 여자를 만나게 된다. 우리에게 '프리다'라고 알려진 노르웨이 출신의 애니 프리드 린스태드(1945년 출생)는 1967년에 국가 주최로 열렸던 경연대회에서 우승하며, 어느 정도 유명세를 타는 듯했지만 몇 년 후 그저 그런 재즈 가수가 잊혀갔다. 린스태드는 노르웨이 태생이었지만 매우 어린 나이에 스웨덴으로 이주했다. 안데르손과 린스태드는 1978년 10월에 결혼했다.


ABBA로 데뷔하기 이전에, 솔로로 활동하며 주로 스웨덴의 전통 음악을 선보였던 앙네타 펠트스코그(1950년 출생)는 1968년 가수 겸 작곡가로서 국가 주최로 열리는 경연대회의 우승을 노리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는 1967년 첫 싱글이 히트를 기록하며 성공적인 솔로 가수였다. 그녀와 울바에우스는 1971년 7월에 결혼했다.


앙네타 펠드스코그(한국인은 '아그네사'라는 이름으로 많이 기억한다.)와 비에른은 같은 해에 여러 차례 투어를 함께 했다. 1969년, 안데르손과 비에른 울바에우스는 스웨덴 영화인 '인가 2'의 사운드 트렉과 함께 'Ljuva Sextal'을 제작했으며, 스웨덴 음악 듀오 Svenne & Lotta와 함께 여러 차례 출연했다. 린스 테드는 1969년 3월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스웨덴 예비 결정전에서 'Härlig är vår jord'라는 노래로 4위를 차지했다.


이곳은 당시 안데르손이 작곡가로 활동하던 장소인데 이 행사에서 린스태드와 안데르손이 만났고 곧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1969년 5월, 울바에우스와 펠트스코그가 텔레비전 쇼에 함께 출연했고, 또한 이 둘도 커플이 된다. 그와 동시에 안데르손은 헵 스타즈를 떠나 1969년 8월에 린스태드와 약혼했으며, 곧 그의 작품인 싱글 피터 팬을 녹음했다.

1970년, 베니와 비에른의 첫 번째 공동 싱글인 'She’s My Kind of Girl'를 발매한다. 또한 1970년 4월 아그네사와 비에른도 약혼했다. 한편, 비에른은 아그네사의 솔로 앨범 'Som jag är'에 도움을 줬다. 베니는 이 앨범의 프로듀서 역할을 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베니와 비에른은 스티그 안데르손의 음반 회사인 폴라 뮤직에서 'Lycka'라는 제목의 첫 번째 공동 앨범을 녹음했다.

아그네사와 비에른은 1971년 7월 6일에 드디어 결혼에 골인한다.


당시 베니와 비에른 콤비의 싱글은 'Hej Gamle'을 제외하고는 스웨덴에서는 히트곡도 아니었다. 그러나 1972년에 'She’s My Kind of Girl'이 일본에서 발매되면서, 그곳에서 판매 차트 7위에 오르고, 그리고 몇몇 다른 히트 차트의 선두에 올랐다. 그들의 영어 노래 중 하나가 다른 나라에서 성공하게 되면서 그들은 스웨덴어보다는 영어 팝송에 더 치중하게 된다. 몇몇 곡에 아니프리드와 아그네사의 목소리가 그들의 목소리와 조화를 잘 이루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베니와 비에른은, 그들의 인생의 동반자들을 향후 제작한 음반에 본격적으로 합류시키기로 결정한다.

1972년 3월, 4명의 멤버들이 그룹으로 녹음한 첫 번째 곡의 제목은 'People Need Love'였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온전한' 그룹이라고 스스로 자각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모든 멤버들은 그들 자신의 개인의 일로 바빠 가수 혹은 온전한 그룹이라고 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People Need Love'는 1972년 6월에 발매됐고, 그 커버에는 밴드 이름 대신 'Bjorn & Benny, Agnetha & Anni-Frid'라는 그들의 이름만 적혀 있었었다. 싱글은 스웨덴 싱글 차트 3위, 싱글+앨범 판매에서는 17위를 차지했다. 이 성공은, 이 네 사람이 제대로 그룹을 만들어 음반을 만들면 뭔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을 갖고 음반 작업에 몰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1972년 가을과 1972년 봄 사이에 'Ring Ring'은 'He Is Your Brother'과 함께 1972년 11월에 최초로 발매됐다. 독일 시장에서 더 높은 판매량을 얻기 위해, 당시 많은 국제 예술가들을 따라 해 스웨덴 노래인 Hej Gamle Man(헤이, 음악가)와 Livet gär sin gäng(사랑의 말)과 영어로 된 노래인 Ring Ring과 Another Town, Another Train(사랑의 대기실)을 채택했다. 또한 독일어로 된 가사도 포함해서다. 이 밴드는 6일 독일 TV에 첫 출연까지 하게 된다.


1973년 1월, 첫 싱글 'People Need Love'와 함께 음반 쇼에서 진행자 일자 리히터는 알려지지 않은 스웨덴 밴드의 이름을 소개했지만, 무대에는 비요른 울바에우스, 벤니 안데르손, 애니 프리드 린스태드, 인거 브룬딘이 있었다. 인거 브룬딘은 린스태드의 친구인데, 펠트스코그가 임신 때문에 독일까지 여행을 하거나 하는 일을 원하지 않아 불려 온 대타였다. 이 밴드는 당시 독일에서 알려지지 않은 아무도 모르는 무명 밴드였기 때문에 관객들 중 누구도 그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1973년 9월, 4명의 멤버들은 여름이 시작되기 바로 전에 그들의 새 밴드 이름인 "ABBA"라는 이름이 결정되었던 후에 두 번째 앨범의 녹음을 시작했다. 이들은 그룹의 이름을 그들의 이름의 앞자리를 딴 'ABBA'로 바꾸었다. ABBA는 스웨덴의 통조림 생선 회사의 이름이기도 했다. 다행히도, 이 회사는 그들의 이름을 ABBA가 쓰는 것에 동의해주었다.


그렇게 ABBA는 1974년에 열리는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서 스웨덴의 예비결정을 위해 다시 초청되었다.

1973에서 74년으로 넘어가던 겨울에 'Waterloo'라는 앨범의 이름이 만들어졌다. ABBA는 원래 'Hasta Mañana'라는 노래를 생각했는데, 이 발라드는 지난해의 우승 타이틀 스타일과 상당히 비슷했기 때문에, 우승을 노리려면 뭔가 새로운 것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Waterloo'를 선택했는데, 바로 이 'Waterloo'라는 노래가 새롭고 혁신적인 스타일을 보여주며 당시 유행하던 발라드 방식에서 벗어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 선택으로 그들의 전설은 시작된다.

'Hasta Mañana에서 펠트스코그가 리드 보컬로만 부른 반면, 'Waterloo'는 두 여성 가수들의 듀엣이 돋보이는 곳이었고, 이후 히트곡의 패턴 및 그룹의 확실한 이미지를 구축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Waterloo'와 함께, ABBA는 1974년 2월에 처음으로 멜로디 페스티벌에서 공연했다. 1974년 3월 4일 'Waterloo'라는 타이틀을 가진 새 앨범과 싱글이 발매되었다. 이 밴드의 새로운 이름인 ABBA를 혼동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의 성(Bjorn, Benny, Agnetha & Anni)에 그들의 새로운 이름인 ABBA 뒤 괄호 안에 배치하였다.

LP는 빠르게 스웨덴 히트 퍼레이드의 최고 순위에 도달하여 판매 기록을 깼으며 싱글은 싱글과 앨범 판매에서 2위와 3위를 차지했다. 매니저 스티그 안데르손은 이미 여러 유럽 국가들을 거쳐 대회 전에 싱글들을 홍보했다.


1974년 4월 6일 영국 브라이튼 앤 호브에서 열린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그랑프리 결승에서 ABBA가 진출했다. 그때까지는 음악적으로 다소 독특하지만 매우 효과적이었던 'Waterloo'를 부른 후, ABBA는 점수 평가에서 최고를 기록하며 17개 참가국 중 1위를 차지하며 우승을 차지한다. 이 승리는 그들의 국제적 커리어의 시작이었다.

https://youtu.be/3FsVeMz1F5c

싱글 'Waterloo'는 54개 국가에서 발매되었고, 상당히 많은 매체의 히트 차트에서 선두로 올라서기 시작했다. 영국에서 데뷔 첫 1위를 기록했으며 이 노래는 500만 장 이상 팔았다. 심지어 미국에서 TOP 10 히트곡이 되었다.


스웨덴을 대표하는 전설적인 팝 그룹이며 대중음악 역사상 영향력 있고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그룹 중 하나라고 일컬어지는 그룹 아바(ABBA)의 이야기이다.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전 세계 대중음악을 대표하는 아이콘 중 하나다. 당대의 전 세계 음악계를 휘어잡은 전설로서, 세대를 초월한 뛰어난 음악으로 인해 대중음악계의 스테디셀러 반열에 올라있다.


조금 길게 이들의 결성부터 빅 히트를 치게 된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까지를 상세히 설명한 것은, 그들이 39년 만에 컴백을 발표하고 내가 이번 생을 끝나기 전에 그들이 다시 재결합하여 음반을 내는 것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가 받은 충격과 감동으로 적은 것도 아니다.


흘러간 음악은 흘러갔지만 그곳에 그대로 멈춰있는 내 인생을 반추하게 한다.

아무런 과학장비 없이도 과거로 한 번에 돌아갈 수 있는 타임머신은 단언컨대 음악 이외에는 없다.


신세대들에게는 뮤지컬과 영화 '맘마미아'로 더 유명한 그들의 음악은,

오리지널 1970년대 그들의 음악을 듣고자란 세대들에게는 과거가 아닌, 그날의 나로 한방에 되돌리는 마법과도 같은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의 추억과 사랑과 함께하는 음악을 만든 그들에게는 실패와 좌절이 없었을까?

없었을 리가 있겠는가?


무엇보다 그들은 2021년 9월 39년 만에 재결합하여 드디어 다시 음반을 냈다.

2011년 비에른은 "우리가 무대에 설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강하게 부정했고,

2013년 펠트스코그는 "ABBA 재결합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늙었고, 각자 자신의 삶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멈춰 선 지 너무 많은 세월이 흘렀고, 우리를 다시 합친다는 건 정말 의미가 없어요."라고 재결합은 말도 안 된다며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이제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그들이 그들의 음악을 다시 가지고 돌아오게 된 것이다.

다시 돌아온 그들이 어떤 굴곡 있는 삶을 겪느라 39년이라는 공백기를 갖게 되었는지

여러분들에게 오늘 그 이야기를 해주려고 한다.


원래 이 시리즈가 그렇듯이 그들의 음악을 연달아 도배 링크한다거나 그들이 잘 나갔던 시기의 이야기를 연대기식으로 해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 왜 그들이 그렇게 잘 나가다가 해체를 했어야만 했는지부터 살펴보자.


세계 양대 밴드로 불렸던 아바와 비틀스, 그중 아바는 그들의 명성이 하늘을 찌르던 1980년대 초반 그들 음악이 절정에 다다르고, 자유주의 국가에서 공산주의 국가에 이르기까지, 유럽에서부터 전 아시아를 거쳐 아프리카와 남미와 호주에 이르기까지, 세계 모든 나라가 아바의 음악으로 뒤덮여있을 때 갑작스러운 해체를 맞게 된다. (물론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해체'라고 발표한 적은 결코 없었다.)

그들의 음악이 한 시대를 풍미할 정도라는데 도대체 어느 정도 유명했었느냐 하는 묻는 이가 있다면, 베니가 만든 뮤지컬 프로젝트 '맘마미아'를 통해서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다.

이 뮤지컬은 ABBA의 곡 중 24곡을 중심으로 제작된 뮤지컬이다. 영국에서는 1999년 4월 웨스트엔드 초연되었고, 미국에서는 2001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다.


공연의 성과는 그야말로 전 세계 가는 곳곳 초대박을 쳤다. 2021년 기준 역사상 가장 흥행한 뮤지컬 역대 3위를 기록하고 있을 정도이니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한다.


이런 전설의 시대를 구가하던 아바가 급작스레 해체된 결정적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는, 아바의 두 부부 중, 아그네사와 비요른의 이혼에서부터 출발한다.

왜 이혼했는지 궁금한가?

살다 보면 그냥 애정도 식고, 둘 중 한 명이 바람도 피우고, 아니면 둘 다 피우고 그러다 보면 부부의 세계를 찍는 거지, 하며 이해하려고 하는가?

아니다.

그들은 내내 사랑한다고 서로 인정하면서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결정적인 이유는, 아그네사의 극진한 모성애에 근거한 가치관에서 발단되었다.

청초함이 절정일 때의 아그네사

아바의 명성이 하늘을 찌르고 세계를 거의 정복해가고 있을 때 유달리 유럽 중에서도 변방인 스웨덴 밴드 아바에게 - 모든 마음을 다 내어주었던 유럽과 달리 - 자존심상 마음을 다 열지 않고 인색하던 미국인들, 그들에 대한 마지막 미국 정벌을 남겨두고 비요른의 아내였던 아그네사는 두 번째 아이 크리스티앙을 낳게 된다.

스웨덴의 친구가 있거나 그들과 이야기를 나눠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스웨덴은 북유럽 국가 중에서도 상당히 개성을 인정해주는 문화를 갖추고 있다. 뼛속까지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며 노래를 부르고 다니던 아그네사는 '톱스타의 명성'보다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다. 때문에 미국의 장기 공연을 위해 지구 반대편에 아이들을 두고 온 것이 내내 마음에 부담이었고 그 죄책감과 책임감 때문에 투어를 즐겁게 유지하기가 곤란해질 지경을 맞이하게 된다.


어렸을 때부터 자기 방 벽에 유모차에 아기를 태워 끌고 다니는 모델의 사진을 걸어놓고 좋은 엄마를 꿈꿨던 아그네사는, 세계 순회공연을 마치고 돌아와 지친 몸으로 캐리어를 끌며 스웨덴의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가장 먼저 주방으로 뛰어 들어가, 아이들이 맛있어하던 엄마표 음식을 만들어주려고 분주히 서둘렀다고 한다. 그런 그녀에게 이제 갓 태어나 보고 있어도 눈에 밟히는 둘째 크리스티앙을 떼어놓고 세계 공연을 다닌다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럽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반면 남자 멤버인 비요른과 베니는 마지막 미국 정벌을 앞두고 승부욕에 불타올라 그녀의 고통을 눈치채지도 못했다. 그렇게 서로의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던 중, 아그네사는 비요른에게 이혼을 통보한다.

여전히 사랑하는 사이임을 매일 함께 하며 확인했던 비요른은 이혼 통보를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렇게 수없이 이혼을 만류하던 비요른은 아그네사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법적으로는 이혼하되 서로 멀지 않은 곳에 살며 자주 얼굴을 보기로 약속하고 별거 상태를 유지한다.

아그네사는 자신의 소원대로 아바의 명성을 뒤로하고 아이들만의 온전한 엄마로 살아간다.


그러나 사랑하던 여자의 공백을 견디지 못한 비요른은 '아그네사와 꼭 닮은 여자'였던 레나를 만나게 된다.

정작 그렇게 되자 아그네사는 극도의 좌절과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1987년 아이 둘을 데리고 사람들이 찾지 않는 섬에 들어가 칩거생활에 돌입하게 된다,


섬으로 들어가기 전 이혼의 아픔을 아그네사가 자신의 슬픈 마음을 담아 노래로 만든 것이 바로 'The winner Takes It All'이란 곡이다.

https://youtu.be/iyIOl-s7JTU

하늘을 찌르던 아바의 아성도 그들의 사랑과 행복이 가득 담겨있던 음악도 그들의 사랑이 흔들리자 모두 함께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쪽 부부가 심각하게 흔들리자, 아바의 다른 한쪽 부부, 베니와 프리다도 10년 이상 금슬을 자랑하던 사랑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베니가 결국 프리다를 떠났며 그들의 결혼생활도 끝이 난다.

그렇게 세계 최고의 밴드 아바는 우리의 곁을 떠났고 그들의 음악은 그저 옛이야기에 묻혀버리고 만다.

'uDiscover Music'는 그들의 음악을 이렇게 평가했다.


1974년 유로비전에서 우승한 ABBA는 지난 40년 동안 가장 영향력 있는 밴드 중 하나가 되었다. 그들은 1970년대까지 비틀스가 1960년대와 같은 존재였고, 두 그룹 모두 다른 현대 예술가가 아닌 것처럼 대중음악을 지배했다. 벤뉘 안데르손과 비에른 울바에우스의 훌륭한 작곡, 아름다운 프리다와 앙네타의 환상적인 퍼포먼스. 완벽한 팝 밴드 – 그들은 거의 틀림없이 가장 위대한 밴드가 되었다.


결국 2018년 그들은 35년 만에 재결합했다. 2곡의 신곡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또한 아바 아바타 투어 프로젝트를 진행한다고 계획도 소개했다. 멤버들의 홀로그램 등을 통해 전 세계에서 콘서트를 개최할 예정이라고 해서 팬들의 마음을 술렁이게 했다.


아바의 대변인인 고렐 한세르는, 아바가 아바타 투어 프로젝트에서 홀로그램 말고 직접 무대에 나와 연주를 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세르는 “멤버들이 무대에 함께 올라 힘을 합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러지 않기로 했다”라고 말했다.


재결합 앨범은 2018년에 발매 예정이었으나 그룹 사정으로 2019년 가을로 연기되었다가 다시 2020년으로 또 연기됐다. 오는 11월 새 앨범 <아바 보이지(ABBA Voyage)>를 발매하고, 내년 5월 영국 런던에서 콘서트 계획이 확정되었다.

이제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가 된 아바 멤버들.

70이 넘어서야 그들이 39년간 닫혀있던 마음의 문을 열고 다시 재결합하는 것에는 당연히 사연이 있고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들의 굴곡진 사연 구석구석을 우리가 모두 알 수는 없다.

당신의 연애사와 결혼생활이 그렇듯이 말이다.


당신이 치열하게 부대끼며 사랑했던 젊은 날이 있었기에 지금의 여유로운 어른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치열하게 사랑했던 세월과 노년이 되어 뒤돌아보며 아쉬운 부분이 분명히 있었기에 다시 39년 전의 그 이전 행복하게 노래 부르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당신이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거라며 치열하게 했던 사랑이

아무렇지도 않게 식어버려

그저 발에 채이고 던져지는 것 같은 슬픔을 지켜보는 것은 당연히 아프고 아릴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당신 인생의 끝이 아님을,

당신의 사람과 사랑이 그리 짧게 끝나버리지 않음을

아바는 그들의 노래로, 그들이 겪었던 사랑과 좌절과 그 모든 경험을

우리들에게 들려주며 노래한다.

일어서라고, 지나고 나면 아무 일 아니라고

그저 눈 깜빡하는 순간처럼 다 가버리고 잊혀질 인생이지만

당신이 살아 있는 이 순간,

신이 부모님을 통해 당신에게 쥐어준 이 삶을 감사히 온전히 누리라고.


그들의 음악이 기존의 발라드 형식을 깼다고 평가받고 신나고 새로운 음악이었다고 평가를 받는 것에 대해 그들의 노래 대부분을 작곡하고 아바의 음악세계를 창조하는데 일조했던 비에른은 아바의 음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ABBA의 음악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 뭔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행복한 음악이 아니다. 그것은 북유럽의 우울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정말 꽤 슬펐을 때도, 우리는 항상 기쁨에 넘친 것처럼 들렸다.


그들이 힘들고 괴롭고 지쳐 외로울 때도

그들은 기쁨에 넘친 것처럼 그 슬픔을 흘러 넘겼고

그렇게 여든을 바라보는 노년이 되어 말한다.

지나고 보면 그것도 다 별것 아니라고.

그리 마음에 담아두지 말라고.


음악이 당신의 사랑을 위로해주었듯이

당신의 지친 삶의 한 자락에

다시 인생을 달관하고 돌아와 함께한 그들이 노래해준다.


당신에게는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행복해질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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