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9년 모스크바에서 명문 귀족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초상화를 보면 심한 곱슬머리에 검은색 피부의 외모가 매우 독특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그의 외증조부(어머니의 할아버지)가 아프리카 출신 흑인으로 러시아 제국의 귀족이 된 아브람 페트로비치 간니발(Абрам Петрович Ганнибал)이다. 간니발은 에티오피아에서 오스만 제국으로 끌려갔다가 러시아 대사에 의해 러시아로 오게 된 인물인데, 표트르 대제가 세례를 받을 때 직접 대부를 서 주었을 정도로 러시아의 귀족 자제들과 함께 최고의 교육을 받았으며, 이후 간니발 가문은 러시아의 명문가로 자리 잡게 되었다. 즉, 그는 ‘흑백 혼혈’이고 당시의 관점으로는 그저 보기에도 명백한 흑인에 가까웠다.
이후 간니발은 표트르 대제의 총애로 노예 신분에서 면천된 후 프랑스 유학을 하기도 하였으며, 이때 많은 학자, 철학자들과 교류하게 되며, 볼테르로부터 ‘계몽주의의 검은 별’이라는 상당한 찬사를 들을 정도로 학문적 성과를 이뤘던 유명 인물이었다. 그래서였는지 그는 자신의 외증조부 혈통과 이국적인 외모를 자랑스러워했다. 흑인 노예 출신이라는 의미가 아니 자랑스러운 대학자 집안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곱슬머리에 키도 매우 작은 흑인이라고 놀려댔지만, 여자들에게는 인기 대폭발이어서 평생 여자가 너무 많아서 셀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군대에서 퇴역한 후 문필활동을 하던 아버지의 개인 서재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고전 문학들을 접하며 책을 많이 읽었고, 삼촌도 시인이었기 때문에 역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동시에 유모로부터 러시아의 여러 민담과 민요들을 배웠다. 이런 성장 배경은 그가 시인으로 성장하는 데 밑거름이 된 동시에 훗날 그가 러시아의 전제 정치를 비판하고 러시아 민중들을 동정하게 만든 밑바탕이 되었다.
일리야 레핀의 그림.<리쩨이 시험장에서의 푸슈킨>(1911)
이미 10살 때 프랑스어로 자작시를 지었고, 12살 때 중, 고교 과정이 통합된 러시아 귀족 자제 교육기관인 ‘리쩨이(лице́й)’에 입학했다. 리쩨이에서 교육받는 동안 130편의 시를 지었고, 15세 때에는 처음으로 시집을 출간하기까지 했다.
17살 리쩨이에서 승급 시험을 칠 때 '차르스코예 셸로의 추억'이라는 자신의 자작시를 낭독했는데 심사위원으로 왔던 문학가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고, 그의 이름이 러시아에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러시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이자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 낭만주의 문학가인 동시에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선구자였던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시킨(Александр Сергеевич Пушкин)의 이야기이다.
당시,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러시아 문학이 인지도를 얻게 된 것도 푸시킨의 공이 가장 크다 할 정도로 유명했다.
서유럽에서 유행하던 자유주의와 러시아의 민족주의를 적절히 배합하여 러시아의 국민성과 혼을 문학으로 잘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황금기를 맨 처음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그는, 막심 고리키의 말대로 ‘시작의 시작’이라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도스토옙스키 역시 푸시킨의 작품을 ‘모든 것을 포용하는 보편성’이라는 한 마디로 극찬하였다. 그의 문학작품은 모든 예술사조(ism)를 수용하면서 새로운 예술사조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그는 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의 모든 요소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모든 것을 부정하는 아이러니한 대화를 하고 있다. 그래서, 투르게네프는 러시아의 모든 작가들은 푸시킨이 개척한 길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등 후대 러시아 문학가들의 존경을 받았다.
리쩨이를 졸업한 후에는 당시 귀족 자제들의 출세 코스를 따라, 외무성에 들어가 8등 문관 신분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 뻔한 전형적인 생활 탓에 금세 공무원 생활에 흥미를 잃고, 이때부터 3년간 향락에 빠지는 생활을 하게 된다. 방탄한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어렸을 때부터 품어온 자유주의적 사상을 발휘(?)하여 당대의 혁명적 자유주의자들과 활발한 교류를 했으며 진보적인 낭만주의 문학 그룹에 동참했다. 유명한 서사시 '루슬란과 류드밀라(Руслан и Людмила)'를 발표한 것도 이 무렵이다.
푸시킨은 이 무렵 러시아의 농노제와 전제 정치를 공격하는 시를 지었는데, 이 때문에 당국의 눈 밖에 나, 1820년 러시아 남부로 전근당한다. 오데사에 머무르며 외국 문학을 공부하던 푸시킨은 오데사 총독과 불화를 일으켜 영지인 미하일롭스꼬예로 추방당한다.
1825년에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귀환이 허용될 때까지 남부지방에서 유배 아닌 유배생활을 지냈고 1824년에는 외국 망명까지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거기다 그와 친분이 있었던 자유주의자들은 데카브리스트의 난으로 숙청당했다.
개인적으로는 매우 불행한 시기였으나 예술적으로는 매우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한 시기였는데 그의 대표적인 작품 <예브게니 오네긴>과 <보리스 고두노프>를 이때부터 쓰기 시작했다.
1825년에 자유주의자들이 일망타진된 후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귀환해도 좋다는 황제의 허가가 있었으나 푸시킨은 이미 위험인물로 낙인찍혀 당국의 감시를 달고 산다. 황제의 검열 없이는 작품 발표를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된 것이 그 결과였다. 사적인 여행도 일일이 허가받아야 했다. 때문에 귀환한 후 얼마간은 서정시나 연애 시를 적으면서 기분전환을 하고 다녔다. 그리고 1830년부터 다시 본격적인 작품 활동에 들어갔는데 1831년에 <예브게니 오네긴>을 완결 짓고 여러 가지 시와 소설들을 발표했다. <스페이드의 여왕>, <대위의 딸> 등 푸시킨의 대표 소설들도 이때 발표된 것들이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한 것으로 설정한 희곡인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도 썼고, 그것을 니콜라이 림스키 코르사코프가 1898년에 오페라화를 했다. 이후 1979년에 쓴 피터 셰퍼의 희곡 아마데우스에도 영향을 미쳐 연극으로도 반향을 일으키고, 1984년 영화화되어 더욱더 알려지게 된 것이다.
나탈야 곤차로바의 초상(1849)
1831년, 푸시킨은 러시아 상류층에서 미인으로 소문났던 나탈리야 니콜라예브나 곤차로바(Наталия Николаевна Гончарова)에게 청혼했다. 곤차로바는 당시 18살이었는데 이미 자신보다 13살 연상이었던 남성과 사별한 경험이 있을 정도로 조숙했다. 미인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는지 워낙 그녀에 대해 사생활이 문란하고 음탕하다는 등의 소문이 안 좋았기 때문에 푸시킨의 어머니는 곤차로바와의 결혼을 반대했지만 결국 푸시킨은 곤차로바와의 결혼에 성공한다. 이 무렵 푸시킨은 다시 관직에 등용되었고 곤차로바와의 사이에서 4명의 자식을 보며 행복하게 지내는가 싶었다.
하지만, 곤차로바는 결혼 후에도 사교계에서 인기가 많았고 자연히 많은 스캔들을 뿌리고 다녔는데 그중에는 니콜라이 1세와 불륜 관계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았다. 1834년에 푸시킨은 차르의 시종보가 되었는데 이게 사실 곤차로바를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던 니콜라이 1세의 음흉한 속셈 아니냐는 소문도 이미 당시 파다할 정도였다. 푸시킨은 이런 소문에 처음에는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지만. 나중에는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1836년 11월, 푸시킨과 그의 동료들은 아내 곤차로바가 염문을 일으키고 다니고 있다는 익명의 투서를 받는다. 푸시킨은 당시 곤차로바와 가까워진 프랑스인 근위대 장교 조르주 당테스가 범인이라고 확신했고 당테스에게 결투 신청을 한다. 하지만 당테스가 그의 처제가 결혼을 하는 바람에 결투는 유야무야 되었다. 그러나 곤차로바와 당테스를 둘러싼 추문은 끊이지 않았고 푸시킨과 당테스는 결국 결투를 했다.
그러나 결투에서 푸시킨은 치명적인 총상을 입어 쓰러졌다. 그렇게 병원에 입원한 푸시킨은 이틀 후 사망하게 된다. 허망하게 아내의 바람기 때문에 결투에 임했다가 죽음을 맞이한 것이었다. 향년 그의 나이 38세. 그렇게 바람기를 흘리고 다녔던 그의 아내가 24살 때의 일이었다.
모스크바 아르바트 거리의 동상
푸시킨의 장례식에는 2만 명의 인파가 몰렸는데 그걸 보고 깜짝 놀란 니콜라이 1세는 일반인들의 장례식 참석을 금지하고 신문에 과도한 추모 기사 작성을 금지한다 명했으며 장례식에 군대까지 보냈다. 이런 정황에 대해 평론가들은, 당시 많은 사람들이 푸시킨의 죽음에는 푸시킨을 시기하던 보수적인 귀족들이 음모를 꾸며 푸시킨이 그 함정에 빠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근거 있는 추론을 내놓기도 하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18세기에 자신이 흑백 혼혈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기는 여간해서 쉬운 일이 아니다. 설사 그 혈통이 명문가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실제 푸쉬킨의 손녀는 흑백 혈통이라는 이유로 시집을 가서도 그 집안이 작위를 받지 못하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푸쉬킨은 자신의 외증조부가 흑인 노예였다는 사실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겼고 그렇게 명문가가 되었음을 공공연히 떠들고 다녔다.
자신이 명문가의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민중을 위한 문학을 하고 절대권력을 가진 위정자를 비판하는 입장이 되는 것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런 짓을 하게 되면 가진 것이 많은 위치에 있는 자는 잃을 것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권력자와 합류하여 민중의 고혈을 빨아먹는 경우는 많아도 반대로 그들에게 정신 차리라는 일침을 가하는 경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극히 드물다.
그런데 그는 그 어렵다는 일을 저질렀다.
그렇게 유배를 가고, 감시를 당하고, 자신이 쓴 작품조차 제대로 발표하지 못하고 검열을 당해야만 하는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생각을 글로 펼치기 위해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러시아 국민들은 그 유명한 톨스토이도, 도스도옙스키도 아닌 그를 가장 사랑하는 문인 중 1위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당신이라면,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프롤레타리아는 자신이 가지지 못했고 억울한 일을 당했으며 기득권층에 속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부르주아에 속해있으면서 그럴 수 있는 자는 많지 않다. 아니, 매우 드물다.
당신이 운이 좋아 괜찮은 집안 출신으로 돈 걱정을 하지 않고 좋은 교육을 받고 유학까지 다녀와 그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는 금수저라면 당신은 민중에게 관심을 보이며 잘못된 사회구조를 혁파해야 한다는 깨어있는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겠느냔 말이다.
당신은 늘 이런저런 핑계를 입에 달고 살았을 것이다.
부모님이 금수저를 입에 물려주지 않아서...
외증조부 때 빨갱이로 몰려서 집안의 가세가 기울어서...
아버지가 잘 나가던 사업이 하필 내가 사춘기 때 쫄딱 망해서...
그렇게 사랑하던 사람과 이루어지지 않아서...
뭔들 이유가 없을 것이며 사연 한 줄 없었겠냐마는, 그러면 다시 물어보자.
당신이 국가의 녹을 먹고사는 공무원이라면(실제로 브런치에 상당수의 공무원들이 있는 것으로 안다) 정책의 잘못된 부분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며, 당신의 조직에서 잘못된 부분을 고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 본 적이 있었던가 말이다.
모가지가 짤릴까 두려워 위에다가 지르지는 못할지언정 최소한 당신만이라도 당신이 할 수 있는 것부터라도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잡으려는 시도를 해보았는가 말이다.
그는 그 살벌했던 러시아에서 과감하게 그러했다.
물론 자신 역시 만났던 수백 명의 여자를 기록으로 남길 정도의 엄청난 바람둥이였고, 아내의 바람기에 욱해서 결투 끝에 마흔도 채우지 못해 허망한 죽음을 맞이하긴 하였으나 그가 사는 동안 그는 불합리에 자신의 목소리를 냈던 공무원 신분이었다.
당신이 말 한마디 잘못해서 모가지가 달아날 정도의 장차관직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아니, 장차관 자리에 있는 자라 할지라도 당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신념을 위해 당신보다 힘을 가지지 못한 이들을 위해, 잘못된 사회를 바로잡기 위해 목소리를 높여보았는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