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아직 仁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구나.

한 글자 차이, 함부로 도달할 수 없는 격의 차이.

by 발검무적
子貢曰: “我不欲人之加諸我也, 吾亦欲無加諸人.” 子曰: “賜也, 非爾所及也.”

자공이 말하길, “저는 남이 저에게 하기를 원하지 않는 일을 저도 남에게 하지 않고자 합니다.”라고 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賜; 자공의 이름)야, 너의 힘이 미치는 일이 아니다.”

공자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하고, 제자들 중에서도 나름 상위 랭커에 속했던 자공이 자신이 어느 정도인지를 스승에게 조심스럽게 제시하며 평가를 묻는 부분이다.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ion), 이른바 ‘국제화’라는 화두가 전 세계를 강타하며 유행하던 당시, <뉴욕타임스>에서 세계화를 제대로 했는가에 대한 척도로, 한문원문 그대로 제시했던 첫 번째 기준에 빛나는 ‘己所不欲 勿施於人’이라는 문구의 등장되시겠다.


물론 이 문구 자체는, 한참 뒤에 공부하게 될 ‘위령공편(衛靈公篇)’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나오는 글이다. 하지만, <논어>의 전체를 관통하는 공자의 가르침이자 목표 지향점인 이 문구의 본격 스펙터클 예고편이, 바로 이 장이라 할 수 있겠다.


왜냐구?

제자들 중에서 상위 랭커에 속했으며, 앞서 살펴봤던 것과 같이, 다른 이와의 비교분석을 기가 막히게 하면서, 그 방식을 즐겼던 자공이, 이번에는 다른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고 스스로의 레벨을, 그것도 비유를 통해 스승에게 넌즈시 들이민 것이다.


그런데 스승은 그 자기 측정이 가당치 않다는 듯이 ‘감히 니가 오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라는 말로 한 방에 죽비를 내려친다. 그 죽비 이후에 자공의 대꾸가 없는 것은, 스승이 일깨워 주고자 한 의미가 그의 정수리를 후려치고 내려가 등골까지 서늘한 가르침을 이미 그가 이해했기 때문이다.


아직 본문의 글만으로는, 모골이 송연한, 식은 땀 흐르는 느낌이 당신에게 아직 오지 않았을 테니 천천히 그 의미를 살펴보기로 하자.

자공이 풀어 말한 내용은, 공자가 <논어>에서 仁의 기본에 대한 실체라고 가르쳤던 ‘己所不欲 勿施於人’의 내용은 틀림없다. 그러니 공자가, 그것이 자공이 아직 이를 수 있는 레벨이 아니라고 규정한 것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말했는지는 본문의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저 제자를 무시하고 깔보는 것이 아니었다면 왜 그렇게 말했을까? 주자는 그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자공이 말하기를, “남이 나에게 하게 하길 원하지 않는 일을 나도 남에게 시키지 않으려고 한다.”하였으니 이는 仁者의 일로서 억지로 힘쓰지 않고 저절로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夫子께서 자공(子貢)이 미칠 바가 아니라고 하신 것이다.

해설 문구의 방점은 ‘억지로 힘쓰지 않고 저절로 되는 것’이어야 한다는 부분이다. 바로 앞 장에서 공부했던 剛에 대한 부분을 기억하는가? 조금 이해하기 어려웠겠지만, 진정한 剛이란 嗜慾하는 바가 없어야 한다는 것의 연장선상으로 이해하면 앞장과 이 장의 취지는 맞물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자공은 공부하고 수양하여 그것을 지향해서 그렇게 하는 경지에 다달았다고 말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스승 공자는 그것이 공부하고 수양하여 그렇게 하겠다고 마음먹고 하는 것이라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한 것이다. 이전 장의 설명에 이어 수영에 비유하자면, 수면에서 수영의 기본에 해당하는 ‘음파’를 하고 호흡법을 익히고 4가지 영법을 다 배운 후, 체력을 키우고 힘과 기술이 모두 필요한 접영을 완성시키려고 할 때, 물고기나 돌고래처럼 웨이브를 타고 물을 자연스럽게 가슴 안쪽으로 휘어잡으며 수면 위로 펄떡거리며 올라와 돌고래처럼 멋지게 돌핀킥을 하고 나아가면, 수영장의 상급 레인의 웬만한 이들도 뻣뻣한 웨이브에 발차기만 퍼득거리는 모습에 비해, 내가 아주 훌륭하게 선수처럼 접영을 마스터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정작 그 영법은 돌고래의 영법을 인간이 빌려와 따라한 것 뿐이다.

돌고래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물길을 헤쳐나가지만, 그것을 자연스럽게 웨이브를 하겠다는 의도나 어떻게 하면 더 멋지고 힘차게 해야 하는지를 연구하고 연습하지 않는다.


조금 결이 다른 설명이긴 하나, 피아노나 바둑을, 이제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들에게 가르쳐 정점에 오르게 되는 원리 역시, 연습시간이나 공부를 오래 시킬 수 있어서가 아닌, 이와 같은 원리로, 머리가 아니라 그렇게 온몸의 세포로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하기 위한 궁여지책에서 나온 것에 다름 아니다.

혹여, 주자의 간단한 설명에 이해가 안 되었을 당신 같은 초심자를 위해, 정자(伊川)가 드디어 ‘仁’의 정수에 해당하는 이 가르침을 그나마 노력해서 이를 수 있는 범인(凡人)의 단계에서 이를 수 있는 ‘恕’를 비교대상으로 하여 아주 친절하게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내가, 남이 나에게 시키길 원하지 않는 일을 나도 남에게 시키지 않으려고 함은 仁이요, 자신에게 시행하여 원하지 않는 것을 나 역시 남에게 시키지 않으려 하는 것은 恕이다. 恕는 자공(子貢)이 혹 힘쓸 수 있으나, 仁은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하는 것도 만만한 것이 아니라 공부와 끊임없는 수양이 필요하지만, 다른 사람의 생각과 마음의 기준을 내게 맞추는 것은 함부로 범접할 수 있는 단계의 것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단 한 글자 차이인데 그 엄청난 격차가 당신에게는 느껴지는가?

이렇게 말하면서, 정자는 그 두 가지 개념의 차이점을 통해, ‘仁’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를 이렇게 던져준다.

“내가 생각건대 ‘無加諸人’의 ‘無’는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요, ‘勿施於人’의 ‘勿’은 금지하는 말이니, 이는 仁과 恕의 구별이 되는 것이다.”

아! 소름이 돋지 않는가? 아주 미묘한 차이인 것 같지만, 차원이 다른 이 격차에 대한 설명을 들은 자공(子貢)의 넘사벽에 대한 깨달음과 자신의 공부가 얼마나 아직 부족한가에 대한 인정을 했을 그의 수준은 또 얼마나 상당했을까에 대해 짐작해보고 있노라면, 정말로 앞서 공부한 선배들의, 선생들의 그 높이와 깊이를 이루 가늠하기 어렵다. 그래서 이 장이, 공부하는 이로 하여금 더 겸허해지고 자세를 바로하게 되는 장이라고 한다.


새벽같이 일어나 전날 가졌던 음주의 독을 빼면서 운동으로 체력을 만들고, 조찬모임에 가서 의견을 나누고, 국회의사당 안에 있는 사무실로 가서 간단히 보고를 받고, 회의를 진행하고 또 그날 있는 행사가 있는 곳을 가고, 또 본회의가 있는 날에는 회의에 참석하고, 요즘처럼 국정감사가 있을 때는 보좌진들이 밤새 몇 주간 준비한 자료를 보고 대본 외우는 연기자처럼 카메라 앞에 서서 언성도 높이고 그렇게 그렇게, 국민들의 피 같은 혈세를 야금야금 낭비하고 대놓고 탕진한다.


도대체 그들은 언제 공부하고, 언제 수양하며, 언제 자신을 가다듬고 돌아보고 한단 말인가?


그 사이사이 방송에는 또 얼굴을 들이밀어야 하고, 그것과 상관없이 시대의 흐름이라는 유튜브에도 얼굴을 들이밀어야 하고, 욕심이 과하기 시작하면 직접 유튜브 채널을 운영까지 해야 한다. 그들이 과연 지역구의 민원을 직접 살피며 민원인을 만나는 일은 몇 차례나 있을까? 아니, 보좌진을 통해 연락이 오는 그 수많은 지역구를 포함한 민원들에 대해서 제대로 보고를 챙기기나 할까?

지역구가 없는 비례대표들은 또 어떠한가? 전문성이라고는 없는, 방송으로 얼굴을 알린 방송인이나 불을 끄던 소방수나, 정부기관에서 늘 기획서 도장이나 찍어주던 고위직 공무원이나, 대학병원 진료랍시고 환자들 얼굴 보는 것만으로 돈을 챙기던 의사라는 자들은 또 어떠한가? 일주일에 대학원 강의까지 9학점만 대강 떼우고 1년에 인사평가 때문에 겨우 논문 한 편 발표할까 말까 하던 전 교수란 작자들은 또 어떠한가?


그중 으뜸이라고 할만한 세금도둑?

뭐니 뭐니 해도 일주일에 딸랑 한번 공판을 갖으며 법원 컴퓨터로 재판 개정 중에 주식창 띄워놓고 매매하던 개념 없는 판사군과 다른 사람들에게 윽박지르고, 포주들한테 형님 소리 들어가며 룸살롱을 드나들던 검사군이 버젓이 ‘의원님’ 소리를 듣는다니 그야말로 기함할 노릇 아닌가?

요즘 듣자 하니 여의도에 그렇게 입성했던 자들의 정치 짠 밥이 짧지 않다고 그것도 경력이랍시고 상대적으로 정치 입문 경력이 짧은 자를 욕한다 들었다. 정치경력과 상관없이 법비로서의 무책임 때문에 응당 욕을 먹어야 하는 그이지만, 그것과는 별도로 위에 언급한 것처럼, 여의도 비싼 자칭 단골 한정식집이나 일식집에 가서 의원님 식사를 하면서 그렇게 수십 년 쌓아온 짠 밥 경력이 지금 대단하다고 지들 입으로 자랑까지 한다는 것인가?

아! 정말 육두문자로 해결할 수 있다면 한 바가지가 아니라 파일로리 탱크차에 가득 채워서 특급배송으로 보내주고 싶은 마음이다.


왜 仁을 논하면서 기승전 정치꾼 비판이냐고 묻고 싶은가? 당신이 아직 이 장에서 전달하고자하는 가르침의 행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나보다. 다시 위로 가서 정독하고나서 무슨 연결고리가 있는지 천천히 행간을 찾아 읽어보고 오라.


결국 자공이 자임했던 레벨이라는 것은, 仁에는 미치지도 못하는 수준이었다. 허나 그가 이르른 경지도, 공부하고 수양하여 자기가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은 남에게 시키지 않는 것까지는 힘써 닿을 수 있을만한, 어려운 수준이었다.


위정자는 그래야 한다고 공자는 늘 가르침을 주고 또 주었다. 모든 배우는 자들도 그래야 하지만, 위정자가 더욱 그래야 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언행이 직접적 영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기 수양은 고사하고, 공부도 하지 않는 자들이 仁者는 고사하고 자공이 힘써 닿을 수 있었던 그 경지의 발치에도 못 닿아있으니 꺼내는 이야기이다.


공부를 해야 내가 당하고 싶지 않은 그 일에 대해 알 고, 어찌하면 그러지 않을 수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아닌가 말이다. 도대체 그들이 언제 공부하고 언제 자신을 돌아보고 언제 다른 사람도 싫어할 것을 알고 그만둘 것인가? 그것이 무엇인지는 과연 언제나 안단 말인가?


당신은? 당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새벽에 일어나 브런치를 열고, 브런치에 매일 일상도 아닌 것이 자신이 읽은 책에서 멋있어 보이는 구절 대강 몇 개 뽑아서 뻔한 소리를 글로 그것도 스트롤 한 두 번 정도면 훑을 전략적인(?) 짧은 길이로 적으면서, 나는 매일같이 자성적인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뿌듯한 마음에 만원 지하철에 오르며 하루를 시작하는가?


그래, 백번 양보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정신 나간 정치 유튜버의 헛소리를 들여다보며 소일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기특하다고는 칭찬해주마.


그렇다고 착각은 하지 말길 바란다. 당신이 정말로 새벽에 일어나 원문으로 된 사서나 고전서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무 글도 쓰지 않고 그저 아무 고전이라도 펼치고 그 안의 정수를 받아들이며, 읽고 생각하는 시간에 단 30분만이라도 쓸 수 있다면, 브런치에 그런 쓰잘데기없는 일상인지 감상문인지, 아니면 받아쓰기인지 그따위 짓 하지 않아도 된다.

허망한 의도를 잔뜩 담아 지인들에게 알리고 알려 늘어난 구독자수를 보며, 자기만족을 느끼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게 당신의 객관적인 평가가 되어 주지도 않으며, 당신의 삶을 0.1%도 고양시켜주지 않는다. 아무도 읽지 않아도 당신이 새벽에 1시간 고전을 정독하고, 그것에 대해 당신의 생각을 그저 정리하기 위한 글쓰기를 시작한다면 내가 정말로 마음을 담아 손뼉 쳐주마.


공부를 왜 해야 하냐고, 무슨 공부를 해야 하냐고, 어떻게 공부하면 되냐고 그런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할 생각도 하지 마라. 당신이 이유를 알지 못해서, 방법을 알지 못해서 지금 그따위로 허접한 자기만족 행위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부러 애써 나에게 변명하거나 항변할 필요 없다. 자신에게, 새벽에 가만히 눈을 감고 명상하며 당신 자신에게 물어봐라.


당신의 그 안에 숨어있던 누구보다 냉철한 이성이 당신의 정수리에 죽비 같은 대답을 날려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