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직함은 자기만 곧다고 받을 수 있는 표현이 아니다.

자기 목적을 관철하려는 행위가 아닌 것이 있던가?

by 발검무적
子曰: “吾未見剛者.” 或對曰: “申棖.” 子曰: “棖也慾, 焉得剛?”

공자께서 “나는 아직 강직한 자를 보지 못하였다.”라고 하시자, 혹자가 “신장(申棖)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申棖은 욕심으로 하는 것이니, 어찌 강직이라 할 수 있겠는가?”

공자가 강직한 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하는데, 뜬금없이 공자의 제자 이름을 대며, 그가 강직하다고 어떤 사람이 말한다. 그 다음 공자의 대답에서 공자가 왜 강직한 이를 본 적이 없다고 말했는지에 대한 실마리가 나온다. 가장 기본적인 것, 두 사람의 대화에서 개념의 정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즉, ‘剛(강직함)’의 개념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에서 나온 것이다. 공자는 상대가 이해를 못하자 ‘慾’이라는 개념을 불러온다. 혹자도 그렇고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대척 개념이다.

주자는 이 부분에 대해 이렇게 해설을 하고 있다.

“剛은 굳세고 강하여 굽히지 않는다는 뜻이니, 사람으로서 가장 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夫子께서 아직 보지 못하였다고 탄식하신 것이다. 신장(申棖)은 제자의 성명이다. 慾은 기욕(嗜慾)이 많은 것이다. 기욕(嗜慾)이 많으면 剛함이 될 수 없는 것이다.”

‘剛’에 대한 개념은 지금도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와 비슷하기 때문에 위의 본문에서도 내가 일부러 ‘강직함’이라고 해석하였는데, ‘사람으로서 가장 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설명한 것이 조금 이례적으로 들려 마음에 걸린다. 뒤에 나온 대척 개념인 ‘慾’에 대해서는 기욕(嗜慾)이라고 풀어서 설명했다. 기욕(嗜慾)이란, ‘의욕이 지나친 것’을 의미한다.

신장(申棖)의 초상

새로 언급된 제자 ‘신장(申棖)’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나 언급이 많이 보이지 않는다. 자(字)를 ‘주(周)’라고 하는 인물로 공백료(公伯僚)라는 사람이었을 것이라 추정할 뿐이다. 공자의 72 수제자를 가리키는 공문칠십이현(孔門七十二賢) 중 가운데 사람으로, 공자 사당에 배향되었다.


다른 역사적 기록이 없기도 하지만, 정작 이 장에서 그가 누구인지는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그에 대한 부분을 언급한 것이 아니라 ‘剛’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이길래 공자는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하고, 주자는 사람으로서 가장 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했는지를 풀어내는 것이 관건이다.

정자(伊川)는 이 두 개념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설을 하고 있다.

“사람이 욕심이 있으면 剛할 수 없고, 剛하면 욕심에 굽히지 않는다.”

정확하게 개념이 잡히는 것은 아니지만,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할 수 없다는 것은 대척 개념이니 당연한 이치일테고, 욕심이 있는 사람은 결코 剛할 수 없다는 공자의 말 자체만큼은 조금 이해가 간다.

이 장의 핵심 개념을 가장 상세하게 풀이한 사씨(謝良佐)의 설명을 마저 들어봐야겠다.


“剛과 慾은 완전히 서로 정반대이다. 물건을 이길 수 있는 것을 剛이라 한다. 그러므로 항상 만물의 위에 펴 있고, 물건에 가리워지는 것을 慾이라 한다. 그러므로 항상 만물의 아래에 굽히게 된다. 예로부터 의지가 있는 자가 적고, 의지가 없는 자가 많으니, 夫子께서 剛한 자를 만나보지 못하심이 당연하다. 공자께서 아직 보지 못한 것은 마땅하다. 申棖의 慾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그 사람됨이 아마도 고집이 세고 자기 지조를 아끼는 자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이 때문에 혹자가 剛하다고 여긴 듯하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慾이 되는 것인 줄을 알지 못한 것이다.”

원문에 ‘물(物)’이라고 쓴 것을 해석에 ‘물건’이라고 썼는데, 고문(古文) 전문가들은 흔히 ‘외물(外物)’이라고 뜻을 새기는 의미이다.


사람의 의지와 반대되는 것으로 외적인 요소, 예컨대, 돈에 해당하는 부(富) 같은 것을 의미할 때 사용한다. 외물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하는 것이 剛이라는 설명은 충분히 이해를 하겠다. 그런데 물건에 가리워지는 것을 慾이라 하고, 그 설명을 이해하지 못할까 싶어, 본문에서 申棖을 剛하다고 보고 추천했던 혹자의 어리석음을 마지막 문장을 통해 공자 대신 일깨워준다. “이것(고집 세고 자기 지조를 아끼는 것)이 慾이 되는 것인 줄을 알지 못했다”는 이 문장이 이 장을 풀어줄 열쇠 되시겠다.

慾은 자신이 뭔가 그렇게 하고자 결정하고 밀고 나가는 것이다. 공자가 설명하고 있는 진정한 ‘剛’이란 겉으로 봤을 때 강직해 보이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밀어붙이는 1차적인 단계를 넘어, 내가 무언가 일을 벌여 그것을 바로잡고 그것을 통해 무언가를 얻고자 하는 것이 있는 자체를 慾이라고 본 것이다.


조금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을 듯하여, 이전에 공부했던 주(周) 나라 무왕의 예를 들어 공자의 형이상학적 목표가 얼마나 일반인의 생각을 상회하는지 설명해보도록 하겠다.


공자가 선위 과정에서 으뜸으로 보는 것은 특별히 이전 왕조가 문제가 있어 그것을 토벌(쿠데타)하고 새 왕조를 세우는 것이 아니다. 그 불가피한 행위에 대해 비난을 하지는 않지만 결코 칭찬을 하지 않는다. 특별한 문제가 없는 태평성세에서 그대로 왕위를 선양받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형태이며 백성들을 위해 무언가 작위적으로 하는 것에 대해 좋게 평가하지 않는다.

주나라 무왕의 초상

백성들이 원하는 것을 그대로 유지하고 특별히 자신이 무언가 업적을 남기기 위해서라도 사업을 벌이지 않는 것을 이상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이유로 주나라 무왕은 이전 왕의 폭정을 칠 수밖에 없는 정당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는 무력을 사용하여 정벌하였고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이 불가피한 것이고 정의를 위한 것이라고는 하나, 공자의 기준으로 보면, 그것 역시 무왕이 선택한 것이고 무왕이 그렇게 하고자 하는 ‘慾’이 작용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공자는 이제까지 진정한 ‘剛’을 갖춘 이를 본 적이 없다고 한 것이다.


즉, 권력이나 물질에 욕심이 조금이라도 있는 자라 하면 ‘剛’은 도저히 가질 수 없는 이라는 점에서 제자 신장(申棖)은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행동했기 때문에 공자의 기준에서는 ‘剛’을 갖춘 자라고 보지 않은 것이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자들이 국민들의 앞에서 너무도 당당히 자신은 강직하다고 강조한다. 이 장의 가르침대로라면 그들의 강직함은 혹자에 의해 추천되었던 申棖의 그것에 조차 미치지 못하는 강직함이다. 하물며 공자의 기준에서 말하는 강직함은 말해 무엇하랴?


공자의 기준이 터무니없이 높다고 성인(聖人)의 기준에 어떻게 범인(凡人)이 미칠 수 있겠느냐는 헛소리를 하며 이 장의 가르침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당신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공자의 기준이 막연히 높다고 생각하기 전에, 사람을 평가하는 데 있어 공자가 어떤 기준을 삼았는가에 대해 한번쯤 유심히 들여다본 적이 있었는가? 공자는 상대에 따라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가르침을 다양하게 적용하긴 하였으나 그 기준이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아니다. 확고하게 변함이 없는 진리에 해당하는 기준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이제까지 공부를 하며 생각해본 적이 있느냔 말이다.


글을 읽고 글자를 하나하나 새기고, 그 전체 문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공부하는 것도 공부는 공부다. 하지만 좀 더 깊이 있는 공부를 하게 되면 눈은 더 높아지고 높은 곳에서 내 공부의 전체를 조망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제대로 공부한 것이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발전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가끔은 전체 내 공부를 조망하며 전체적으로 공자가 전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에 대해 그간의 공부를 가지고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들이 필요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공자는 철저한 자신에 대한 냉정한 판단과 다른 사람의 냉철한 비판적 사고에 맞춰 거스르지 않는 자연적인, 하지만 그것이 절대적인 선과 정의에 맞는 것을 기준으로 삼았다. 이 장에서 강조하고 있는 강의 가르침 역시 그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나만 강하고 곧고 바르고 꼬장꼬장한 것은, 결코 절대적인 기준에 부합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외물에 영향을 받거나 그것에 굽히지 않으려면 유연하게 오히려 외물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특히, 자신이 지조랍시고 그것을 강조하는 것이 어떠한 목적을 가진 행동인가에 대해 철저한 자기반성을 할 필요가 있다는 메시지가 공자의 말씀 행간에는 숨어있다. 독야청청했던 그들의 지조 있는 행동이 자신의 만족을 위한, 혹은 자신이 그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보이기 위한’ 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상대적으로 보이기 위한 것인지 스스로 반성하라는 것이다.


벼슬자리에 있으면서 옳은 일을 하고, 그 옳은 일에 대해 높은 평가를 받고 싶어서 자신이 일을 만들고 기획해서 많은 이들을 돕게 된다면 그것이 어찌 나쁘다고 비판을 받겠는가마는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것이 자신의 출세를 위한 것이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라면 칭찬을 받을 일은 아니라는 것이 이 장의 핵심이다.


이 장의 가르침은 최종단계만 제시한다. 물속에서 자유롭게 호흡하는 방법을 배우지 않고 단숨에 접영 선수로 올림픽에 나갈 수는 없다. 이 장에서 공자가 말한 기준은 올림픽 선수 기준이다. 아무도 올림픽 선수가 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것은 직업일 때이고 그것을 선택할 수 있을 때의 일이다. 사람이고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고 그것의 최종 목표가 있을 경우에는 당연히 최종 목표가 나아갈 길이라고 가르치는 것이 스승의 본분이다.


호흡하는 법에 해당하는 기초는, 옳은 일을 하는 이에게 그것을 어떻게 하는지 배워가며 그것을 이해하고 따라 하기 시작하는 것부터이다. 물론 이 장에서 순서대로 그것을 하나하나 공자가 일러주지는 않았다. 그렇게 말하기 시작하면 단계별 교본은 너무 두꺼워 책을 보기도 전에 지쳐버릴 수도 있고, 단계별로 알아서 찾아봐야 하는 것은 배우고자 하는 자가 할 것이지 스승이 일일이 할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렇게 수천 년 후에 그 가르침을 풀어주는 나 같은 가이드가 있는 것이다. 공자가 가이드를 할 위치는 아니지 않은가?


당신이, 당신이 있는 자리에서 당신의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에서 모든 배움과 올바름으로의 회귀는 시작한다. 잘 모르는 경우에는 그 의미를 모두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이해할 때까지 따라 하고 그것을 반복하며 몸과 마음에 익힌다. 운동도 학문도 매한가지이며, 생활에 있어서 수양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렇다.


단 한번 우연히 선을 행하였다고 해서 그 선이 원래 몸에 밴 사람이 하는 것과 같다고 우길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반복되면서 그리고 왜 그렇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부지불식간에 깨닫게 되면, 어느 사이엔가 그 행동과 사상은 당신에게 딱 맞는 옷이 되어 빌린 옷이 아닌 당신만의 맞춤옷으로 변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굳이 강직하려고 하지 않더라도 외물에 의해 당신의 의지가 쉽게 흔들리거나 그것 때문에 힘들 일이 결코 생기지 않을 것이다.


한참 어린 친구가 아버지의 위명으로 50억 퇴직금으로 받은 상황을 보고 들으며, 당신도 그런 부모를 두고 싶다던가 기회만 있다면 나도 잘 받을 수 있는데, 하는 한심한 생각을 했다면 당신은 호흡하는 연습은 고사하고 물 근처에도 가서는 안된다. 그 물에 빠져 죽을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이 장에서 욕을 기욕(嗜慾)이라 해석하고 그저 욕심이라 해석하지 않은 것은, 그나마 신장(申棖)이 기본 이상은 했던, 다시 말해, 그래도 수영은 할 줄 알았던 단계에 해당했기에 그렇게 해석한 것이다.


지금, 부정한 돈이든뭐든 일확천금을 챙길 기회만 있다면 어떻게 서든 한몫을 잡겠다며 다른 사람의 비리를 행운으로 여기며 부러워하는 자에게는, <논어>의 가르침이 그저 도덕책에 나오는 바르게 살라는 가르침 정도로 들릴지 모르겠다.


아니, 그렇게 들리니 저리 행동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을 주는 것이지 대단한 정치인이 되거나 위정자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죽기 전에는 깨닫기 바란다.


자신만이 강직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표를 달라고 뻔뻔하게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강직함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아주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그것을 갖추지 못하고 있어, 그 좋은 것을 갖추고 있다고 거짓말을 하면 뭇사람들이 자신을 한 번쯤 돌아보고 속아줄지도 모른다는 감언이설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강직하다고 여기는가?

그 답은, 굳이 누굴 찾아서 들을 필요가 없다.

그 답은 이미 당신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