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결코 제물로 바칠 소의 출신을 가리지 않는다.

오직 바치는 사람들이 그렇게 없는 규정을 만들어 따질 뿐이다.

by 발검무적
子謂仲弓曰: “犁牛之子騂且角, 雖欲勿用, 山川其舍諸?”

공자께서 중궁(仲弓)을 논평하여 말씀하셨다. “얼룩소의 새끼가 색깔이 붉고 또 뿔이 제대로 났다면 비록 쓰지 않고자 하나 산천(山川)의 신이야 어찌 그것을 버리겠는가?”

중궁(仲弓)은, 이 옹야편의 첫 장에서 이미 임금 자리까지 앉힐만한 자라고 공자께서 칭찬을 한 바 있는 바로 인물이다. 얼룩소의 새끼는 비유를 하기 위해 든 것으로, 이 비유는 중궁 자신은 훌륭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버지가 천박하고 악행을 많이 저질렀기 때문에 당시의 관례에 의하여 인정받기 힘든 상황을 안타깝게 여겨 이야기하는 상황이다.


그 아버지가 미천하고 제대로 된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들어 그를 중용하지 않고 깎아내리며 비난하는 이들에 대한 일침이기도 하다. 이 편의 첫 장에서 다른 위치도 아니고 중궁이 임금 노릇을 하는 것에도 부족함이 없다고 극찬을 한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극단적인 반례(反例)에 다름 아닌 것을 이 장을 통해 알 수 있다.

더 명확하게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 주자의 해설을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주나라 사람은 적색을 숭상하여 희생(犧牲)을 붉은 것으로 썼다. 山川은 산천의 신이니, 사람이 비록 제사에 쓰지 않으려 하더라도 신은 반드시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한 것이다. 仲弓은 아버지가 미천하고 행실이 악하였으므로, 夫子께서 이것으로 비유하여 “아버지의 악함이 그 자식의 선함을 버릴 수 없으니, 중궁(仲弓)과 같이 어진 인물은 스스로 마땅히 세상에 쓰여져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중궁(仲弓)의 인물됨을 논평한 것일 뿐이요, 중궁(仲弓)에게 직접 말씀해주신 것은 아니다.

예로부터 공가(公家)에서는 제물로 쓰는 특별한 소를 길렀다. 그 소가 위 주석에서 말하는 붉은색이어야 하고, 뿔이 반듯하여야 하고 하는 등의 제물로 쓰이는 소의 기준이다.

그런데 제물이 무엇인가? 결국 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한 희생(犧牲)이다. 그런데 간혹 그렇게 처음부터 제물로 사용하는 기준에 맞춰 기르던 소가 없거나 병에 걸리면 불가피하게 다른 소를 구해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무 소나 쓰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결국 신이 내린 기준이나 원칙이 아닌 인간들이 만든 것이었다.


즉, 겉으로 보기 좋은 것들을 제물로 삼아야 한다는 기준으로 뽑는 것이다. 지금도 제사를 준비하는 종갓집의 며느리들은 제사 올릴 과일이나 생선들을 고를 때 흠집이 없어야 한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듯 이해될 수 있다.

순임금의 효도를 그린 그림

하지만 조금 다르다. 여기서 꼬집는 현실은, 그 소가 일반 민가에서 키운 소라 하더라도, 제대로 된 색깔에 뿔이 바르게 나서 그 기준에 맞는다면 사용할 수 있음에도 인간들이 그것이 처음부터 선택되어 길러진 소가 아니라고 하여 제사에 올릴 수 없다고 하는, 삐뚤어진 풍습을 꼬집으며 비유로 삼은 것이다. 즉, 출신이 어떤가를 따지는 당시 사회적 풍습을 꼬집은 것이다.


아버지가 미천한 신분에 악행을 저지른 인물이라는 이유로, 선하고 어진 품성을 갖춘 제자 중궁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한 것이다. 그런데 주자의 주석 마지막 문장에 주목해야 할 대목이 나온다. 이 말씀이 단순히, 제자 중궁을 위로하기 위해 직접 한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이 말이 제자에게 직접 해주는 위로였다면, 그것은 스승의 개인적인 위로에서 그칠 수 있는 제자만을 위한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그에게 말한 것이 아니라 그의 인품과 성품을 평가하는 것과 동시에 당시의 사회의 잘못된 인식을 지적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당연히 공론(公論)에 해당한다. 개인적인 전화에서 위로를 하는 것과 그것을 사례로 하여 일간지에 칼럼으로 써서 공론화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이 행간을 이해한 범씨(范祖禹)는 이 장을 이렇게 정리한다.

“고수(瞽叟)를 아버지로 두고도 순(舜) 임금이 되었고, 곤(鯀)을 아버지로 두고도 우(禹) 임금이 되었으니, 옛날의 성현께서 가문과 족류(族類)에 관계하지 않음이 오래되었다. 자식이 아버지의 허물을 고쳐 악을 변화시켜 아름답게 만든다면 효(孝)라고 할 만하다.”

여기서 언급된, 고수(瞽叟)는 선과 악을 구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었다고 전하고, 곤(鯀)은 이전에 다루었던 사흉(四凶) 중에 한 사람으로 처단되었던 대상이었음을 앞에서 다룬 바 있다.

순(舜)임금

우리 사회에는 아주 오래되어 뿌리까지 썩어 문드러진 ‘삼문(三門)’이라는 것이 있다. 가문(家門)이라 부르는 혈연과 이문(里門)이라 부르는 지연과 동문(同門)이라 부르는 학연이 그 정체이다. 이것을 ‘썩어 문드러졌다’라고 한 것은 그것이 사회를 발전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고사하고 사회를 좀먹고 썩게 만드는 핵심 역할을 착실하게(?)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그저 장사로 돈을 벌거나 가지고 있던 땅이 보상을 받거나 하여 벼락부자가 된 이들의 자식이 그 부모와 똑같은 짓을 하며 외제차를 타고 돈을 뿌리고 다니는 것은 그나마 애교스럽게 봐줄 수 있다. 이른바 졸부(猝富)라고 부르는 그들은 특별하게 내세울 전통이란 것도 없고, 그들이 노력하여 얻은 부가 아니고 그에 부응하는 명예랄 것도 없이 그저 말 그대로 돈이 차고 넘쳐 잠시 그 돈 때문에 대접을 받는 것이니 애교라고 한 것이다.

문제는 대대로 뭔가 이어지는 것을 전통이라 착각하는 것들에게서 심각하게 발생한다.

오로지 돈만을 바라보고 더 큰돈을 벌겠다고 했던 장사치 출신이 대통령이 되어 돈을 벌기 위한 사업체를 자신의 것이 아닌 냥 감추고 있다가 ‘도대체 그 회사는 누구의 것입니까?’라고 외치는 국민들에 의해 조용히 사회에서 격리되어 콩밥을 먹고 있다.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의 대타도 영부인 코스프레를 했던 철없는 아가씨가 자기 아버지를 그리는 늙고 노쇠하고 그 힘을 이용하겠다고 하는 것들에게 휘둘리며 대한민국의 수장에 대를 이어 올랐다가 역시 과정부터 잘못된 것이 와르르 무너져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콩밥으로 섭생을 하고 있다.

그런데 말이다. 그들에게 돈을 삥 뜯기 소위 대한민국에서 기업이라는 것을 운영하는 재벌이라는 자들과, 그들의 수족이 되어 칼을 휘두르고 다녔던 법비들이 이 장에서 이야기했던 수천 년 전의 중국의 제물을 고르던 무지한 이들과 크게 달라졌다는 것을 찾아볼 수 있겠는가?


나는 아무리 눈 씻고 찾아봐도 수천 년 전 중국에서 저따위 행실로 사회를 좀먹었던 이들과 현재 대한민국에서 사회 지도층이라는 이름을 달고 기사가 달린 차에서 버젓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거들먹거리는 이들의 차이를 찾지 못하겠다.

한때 사법고시는 개천용이 승천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 중 하나였다.


실제로 그렇게 개천용이 된 이들이 이제는 검찰총장 언저리 혹은 윗 기수가 되어버리는 것으로 개천용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개천용의 시대가 막을 내린 것은 사법고시가 폐지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개천용의 시대에 승천한 개천용들이 개천용이 올라오는 통로를 그 기회를 레미콘을 불러 시멘트로 콱 틀어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이른바 똥구멍이 찢어지도록 가난했던 집안에서 무지렁이 부모의 밑에서 오로지 공부만이 살길이라고 공부했던 개천용들은 경성제대로 들어가는 것만이 부모대의 저주의 가난과 무지를 벗어나는 길이라 믿었다. 그렇게 사법고시를 위시로 한 국가에서 공인된 세 종류의 ‘고시’라는 것을 통과한 이들은 일단 승천할 수 있는 번호표를 받았다. 그렇게 사법연수원에 들어가게 되면 2년간의 연수기간 중, 마담뚜라는 화장품인지 향수가 떡진 냄새를 만들어내는 아줌마들이(왜 아저씨는 한 명도 없었는지 그때도 도저히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모 여대의 졸업장을 들고 접근한다. 이른바 이제 동아줄을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기게 된 것이다.


세세히 그 과정을 묘사하는 것은 구토를 유발할 수 있기에 생략하기로 한다.


그렇게 대단한 처가에 팔려가는 장가를 가면서 개천용은 승천을 한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일본에만 아직 있고, 한국에는 없다고 사전적 정의가 내려진 ‘데릴사위’ 제도를 그는 완벽하게 구현한다. 데릴사위의 가장 근본은, '고시라는 형태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자리의 자식을 갖추지 못한 자들이 그 능력을 갖춘 자를 자식으로 사는 제도를 완곡하게 이르는 말이다.

그들은 이제 처가의 종이고, 충견 역할을 해야 한다. 장인이 운영하는(아주 드문 경우 장인이 일찍 죽어 대장부 역할을 하는 장모인 경우도 제법 있었다.) 기업에서 발생하는 지저분한 문제들을 합법적이라는 미명하게 뒤처리를 하기 위해 그의 칼이 동원된다. 그가 초고속 승진을 하거나 조직에서 나름 실세에 해당하는 콘체른에 몸을 넣을 수 있는 것도 당연히 처가의 재력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좋은 사료들로 튼실하게 자란 충견은 처가와 윈윈 한다는 미명하게 자신은 권력과 명예를 얻고 처가에서는 날카롭고 위용이 넘치는 어금니를 가진 충견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혹 가다가 법을 휘두르는 칼잡이가 아닌 사람의 몸을 고치는 또 다른 칼잡이를 충견으로 삼는 집안도 있었다.


그러다가 아예 더 돈이 쌓인 집안들은 어차피 법비들은 돈으로 충분히 부릴 수 있으니, 대대로 돈을 쌓아온 ‘재벌’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면서 일본의 데릴사위 제도가 아닌 유럽식 정략결혼을 선택하게 된다. 그래서 사위들의 직업이 칼잡이들이 아닌, 옆 가게 아들인 경우나 더 무서운 경우, 정치인의 자식인 경우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그들만의 리그라고 불리는 이 층들은 결혼은 사람들끼리만 해야 한다며 칼잡이는 돈으로 사서 굴리는 것이라고 칼잡이들을 개+무시한다.


또 다른 웃픈 케이스도 있다.

집안이 가난한데 공부도 그닥 잘하지 못해서 경성제대는 꿈도 꾸지 못하고 그 시절 그나마 괜찮았던 상고 출신들이 그나마 우수한 성적으로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금융권이나 기타 공공기관 등에 취업을 한 뒤, 경력을 쌓아 선배들이 했던 것처럼 야간대학을 들어가 학력을 세탁한 후, 그 안에서 세탁기술을 익혀 윗선에 꼭 필요한 부품으로 인정을 받은 후에, 공부머리가 아닌 타고난 생존본능이자 출세가능성을 계산기로 두들기는 수준의 어마어마한 눈치 내공과 배짱을 바탕으로 금융계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위까지 올라가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이 개천용의 1세대들의 역사이고 민낯이었다.

이 장에서 지적했던 문제는 이제 그 개천용들이 자식을 어떻게 키웠고 왜 승천하는 길을 레미콘까지 불러서 시멘트를 몽창 들이부어 틀어막아버렸는가 하는 것이다.


그들은 생존본능에 해당하는 눈치가 있었고, 무엇보다 그 자리에 간택된 나름 공부 머리가 있었다. 문제는 자식은 참으로 공평하게 부모를 닮는다는 것이었다. 자식들이 그들의 유전자만으로 완성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배우자는 처가의 배경 말고 자신이 가지고 오리지널리티라고 할만한 두뇌와 관련된 유전자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정말 운이 좋게 부계 유전자만을 받아 모 판사, 모 검사의 자식이 대를 이어 사법고시에 패스를 했다는 사실이 일간지에 뉴스로 나오는 경우가 있었다. 일간지에 뉴스로 나온다는 것은 두 가지를 의미했다. 그런 케이스가 워낙 없었다는 점 하나, 그리고 외가에서 이 자랑스러운 유전자 간택의 성공을 주변의 이들에게 자랑하기 위해 기자에게 용돈을 주었다는 점이다.


그 외에 엄마 쪽을 닮아 그저 돈으로 외가의 대를 이으면 되는 쭉정이들은 그렇게 외국의 대학을 버젓이 돈을 찔러 넣고 들어갔다. 그런데, 모두가 외가의 대를 잇겠다고 하면 골육상잔의 전쟁이 벌어진다. 후계자는 여럿일 수 없었다. 그래서 정통 후계자(처가에 버젓이 손위 처남이 있는 경우)가 있는 경우에는, 언감생심 그것도 안되었다.


그래서 그 공부도 못해서 사시를 패스하지도 못하고 이미 경성제대는 고사하고 서울권의 대학도 제대로 못 들어갈 지경의 자식들을 구제하기 위해 제도를 바꾸기로 마음먹는다. 시대의 흐름이라는 미명하게 만들어진 의전원, 치전원, 로스쿨이 바로 그 시멘트의 정체이다.


굳이 내가 <논어>를 강독하다 말고, 개천용의 역사를 언급한 것은 다름이 아니다. 수천 년 전의 중국에서 있었던 풍습이 별나라에 가서 사는 기술을 개발한다는 이 시대에 아직도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이 작태가 한심해서이다.

멀쩡한 여당 후보 저격하겠다고 들췄던 ‘대장동’이라는 장판 아래, 10년간 정권으로 썩어 있던 야당의 벌레들이 우르르 나오기 시작했다. 언론에서는 슬쩍 언급하고 나갔지만, 아들의 퇴직금으로 50억을 받아 자신은 모르겠다고 헛소리를 퍼붓는 법비의 출신 대학의 학연으로 이어진 이들이 이 막장 드라마의 주연들이었다. 그가 대학을 갈 당시 그 대학은 지금 세대는 잘 알지도 못하는 ‘후기대’의 1위 대학이었다. SKY를 동시에 지원할 수 있는 지금의 제도와 달리, 당시는 경성제대를 지원하면서 신촌과 안암의 2류 대학을 동시에 지망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경성제대에 낙방하게 되면 집에 돈이 많아 재수를 할 수 있는 특수한 사람들만 빼고는 모두 그 대학을 갔다.

그 대학은 유학을 가르쳤던 모습이 남아 있다.

그래서 당시 그 대학을 후기로 간 이들은, 전기로 온 아이들과 선을 그었고, 심지어 신촌과 안암의 애들이 고등학교 다닐 때 자신들의 밑에 수준이었다는 것을 언제나 명심하라고 으름장 놓기까지 했다. 이후 사시에 통과하여 연수원에서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나더라도 그들이 2류라고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런 사연이 있는 학연이 이번 사건의 주역들이 엮인 곳이다.


지저분한 설명은 여기까지만 하자. 이 장에서 사실 중요한 듯하지 않지만 뼈 때리는 공자의 말씀은 ‘신은 한 번도 그렇게 하라고 하지 않았다.’라는 것이다. 신은 붉은 기가 있고 번듯하게 뿔이 자라 있는 소라면 충분히 희생으로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지들의 기준으로 지들 멋대로 그렇게 출신을 만들고 되고 안되고를 정했다는 것이다. 이는 신을 빙자하여, 제사를 빙자하여,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삼문을 만들어 사회를 좀먹게 한 현재의 대한민국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당신들은 예외라고 생각하는가?

재벌이라고는 뉴스에서밖에 못 봤고, 법비라고는 신문에서밖에 못 봤다고 하고 싶은가?


아니다. 당신도 은연중에, 아니 대놓고, 동향(同鄕)인지 아닌지를 물어 심리적 거리와 당신이 도와줘야 하는지 아닌지를 구분했고, 동문(同門)이라면 왠지 챙겨줘야 할 것 같다는 끌림을 가졌으며, 무엇보다 사돈의 팔촌이라도 당신의 친지를 챙겼지, 능력 있는 후배나 동기를 먼저 끌어당기지 않았다.


당신이 그러면서 당신의 작은 도둑질은 생계를 위한 것이고, 그들의 큰 도둑질은 나라의 들보를 흔드는 것이라고 욕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는 안된다. 사회를 위한다는 거창한 대의명분 따위 필요 없다. 그들이 개천용을 막으며 요즘 20대 젊은이들이 말하는 고질적인 사회 불평등이 일어났고, 아무 상관없는 것 같지만 당신들의 자식들이 그 불똥을 온몸으로 받아내어 몸이 곳곳에 불이 붙어 불타는 고통을 겪어야 한단 말이다. 당신은 당신의 세대를 발전까지는 아니더라도 썩어 문드러지게 하여 전할 것인가?


곰곰이 당신이 그들에게 동조한 삶을 산 것에 대한 반성과 그에 따른 변화를 고민해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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