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께서 말씀하셨다. “10 戶쯤 되는 조그만 읍에도 반드시 나처럼 충신(忠信)한 자는 있지만, 나처럼 학문을 좋아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이 장은, 자칫 공자가 자기 잘난 척을 하는 내용을 말한 것이 아니냐고 처음 공부하는 이들의 오해를 사기 쉬운 내용이다. 눈치챘겠지만, 미리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당연히 그런 내용 아니다.
공자가 굳이 자신의 입으로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를 말할 정도로 가벼운 사람도 아니며, 무엇보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그 모든 것들이 날아간다고 그렇게 제자들에게 호통을 쳤던 분이 그런 짓을 하면, 그 밑으로 똑똑하고 눈치 빠르기로 귀신같았던 날고기는 제자들이 그를 존경하는 선생님으로 계속 모실 이유가 없다.
대학원 중심대학을 표방한다며 대학원생들을 교수의 노예로 만들 수 있는 합법적인 도제 시스템을 갖춘 경성제대의 대학원생이라, 학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논문을 받고 그 바닥에서 살아남아야 하니까, 인격은 거지 같고 학문적 수준이 턱없이 부족한 것이 빤히 보여도 교수니까 참고 그냥 굽신굽신 거릴 하등의 이유가, 공자의 제자들에게는 없었다는 말이다.
군자의 덕목 여섯가지
忠과 信은, 공자가 학이편과 위정편을 통해 꾸준히 군자가 되기 위한 덕목으로 제시되었던 개념들이다. 굳이 군자의 덕목이라고 따로 지칭하지 않더라도 충성스럽고 신의가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그것을 갖춘 사람이 되는 것만으로도 그 평가만으로도 훌륭한 것이다.
그런데, 다시 원문을 자세히 보라. 아무리 작은 마을에도 나와 비슷한 충신을 갖춘 사람은 있겠지만? 이 말인즉은, 忠과 信이 훌륭한 덕목이라고 가리키고 있지 않다. 그렇게 훌륭한 덕목이라면, 그렇게 작은 마을마다 그런 자들이 있는데, 세상이 그리 혼탁하다고 말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맞다. 방점은 뒤에 있다. 好學(학문을 좋아한다.)하는 이는 자기만한 이가 없다고 말한다. 여기서 好學을 정말로 단순하게 말 그대로, ‘배우는 것을 좋아한다’로만 새기면 정말로 특별할 것 없는 말이 되고, 앞에서 말한 忠이나 信이 왜 나와 비교의 덕목이 되었는지를 알 도리가 없다. 먼저 이 장에 대해 주자는 어떻게 해설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충신(忠信)이 성인과 같다면 타고난 자질이 아름다운 자이다. 夫子께서는 태어나면서부터 아신 분인데도, 일찍이 학문을 좋아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것을 말씀하여 사람들을 힘쓰게 하신 것이다. 아름다운 자질을 얻기 쉬우나 지극한 도는 듣기 어렵다고 말씀하신 것이니, 배움을 지극히 하면 성인이 될 수 있고, 배우지 않으면 시골 사람이 됨을 면치 못할 것이니, 노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공자는 태어나서부터 아는 이인데도 학문을, 배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배우는 것을 힘쓰게 하고자 했다는 설명이다. 주자의 해설이 가끔 공부하는 이들을 평가절상하여 상급 해설로 뛰어 올라가는 경우가 있는데, 이 장의 해설이 그러하다. 상급 해설이란, 초심자가 들으면 원문의 공자의 말씀보다 분명히 아래인데도 이해하기가 만만치 않은 수준의 해설을 말한다.
차분히 다시 단계별로 보자.
忠과 信 같은 덕목은 얻기 쉽지만, 지극한 도는 듣기 어렵다고 말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거기에 배우지 않으면 시골 사람이 되고 만다고 한다. 시골 사람을 무시하는 것인가?
참고로 공자가 말하는 시골 사람은 서울이 아닌 지방에 사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배우지 못한 이들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최근 몇 년까지만 해도 한국이 그러했듯이 대처(大處)에 나오지 않으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는데, 수천 년 전의 중국에서는 그 큰 땅덩어리에서 시골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없었기에 그렇게 예를 든 것이니 발끈할 것 없다.
이 내용은 뒤에 선진편에 다시 보인다.
앞서 공부하면서 여러 번 공자의 가르침에 있어 배운다는 행위와 그 개념에 대해 설명한 바 있다. 충직하고 신의가 있는 마음가짐을 의미하는 덕목은, 물론 배워서 깨우칠 수도 있지만, 배우지 않더라도 그런 성향을 가진 사람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타고난 성향만으로는 군자(君子)로서의 완성을 결코 이루지 못한다. 지식이 부족하다거나 가방끈이 짧기 때문이 아니다. 본래 가지고 있는 덕성이라 함은 자신이 갈고닦아 수양을 통해 얻은 것이 아닌 경우, 그 성향이 갖는 본래의 성질을 이해하거나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더 나아가야 하는지, 어떤 부분이 부족한지 어떤 부분을 더 수양해야 하는지를 알 수가 없다. 그런데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일단 자신이 가지고 있는 덕목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즉, 공부하고 무언가를 알아야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를 알 수 있다는 모순되지만 배움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전제가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의 가르침에서 호학(好學)은 무지(無知)에서 출발한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는 호기심이라는 인간의 본성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다음 호기심에 의해 뭔가 배우고 공부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호기심이 아닌 진정한 의문(疑問)이라는 것이 생긴다.
다시 말해, 내가 이것까지 알고 나니, 그렇다면 내가 알지 못하는 저것과는 이것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그리고 저것까지 알고 난 단계와 무엇이 다른지 등의 다양한 의문이 생기고, '보편적 안목'이라는 것을 획득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확고한 ‘자기 기준’이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는 개념이다.
누군가에게 물어보거나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그른지에 대해서 일일이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는 눈이 생기는 것이다. 이 보편적 안목으로 이제 공부하는 자는 자신을 가두고 있던 틀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준비'를 마치게 된다.
여기서 배움을 통해 이제 ‘준비’를 마쳤다는 것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단계임을 의미한다.
공자의 가르침에서 가장 중요한 ‘실천’이 그 마지막 종착점이다. 종착점이라 하지만 그곳에 도달하지 못하여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곳에 도달하지 못하면 준비과정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이 끊임없는 배움의 방법을 거쳐 실천하기까지 '사색'의 과정을 거친다. 앞서 공부했던 공부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음이 없다는 가르침이 바로 사색의 중요성을 의미한다.
그 장에서의 가르침처럼 굳이 순서를 따지자면 기본은 공부이다. 그다음이 공부한 것을 가지고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할 것을 머리에 채우지도 않았는데 생각만 하는 것은 그래서 위태로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 헤드(Alfred North Whitehead)
아마도 <논어>를 제대로 읽었을 것 같은, (읽었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이상할 것이 없는) 영국의 철학자이자 사상가,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 헤드(Alfred North Whitehead)가 배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내용은 이제까지 내가 설명한 과정을 서양철학적으로 정리해준다.
“책을 버리고, 필기를 불태우고, 시험을 위해 외운 것을 모두 잊어라. 그래야 배운 것이 진정으로 쓸모가 있다.”
책이 필요 없고, 교육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책을 모두 읽었고, 필기를 했으며, 시험을 위해 그것을 달달 외워 지식을 채웠으니 이제 그 배운 것들을 사색을 통해 완성하고 실천하라는 내용을 행간에 담은 것이다.
대개 자신이 무언가를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알지 못하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이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도 모르는 무지(無知)의 단계는 결코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자신이 살아온 시간들로 그 대답을 모두 얻었다고 스스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공자의 가르침에서 ‘아는 것’은 그래서 그 총체적인 과정을 하나로 묶어 ‘사는 것’과 이어진다. 모름은 자신의 무지(無知)를 인정할 수 있는 자에게만 발견되는 ‘덕목’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결국엔 더 많은 것을 알고 싶고, 알 준비가 되었다고 하는 지평의 확대 이전 단계에 대한 겸허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고지식으로 굳어지지 않은 사고의 유연성도 그런 무지의 성찰로부터 가능한 ‘차이’이다.
또한 그 열린 체계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 '호학(好學)'이라고 간단하게 두 글자로 쓰인 개념의 심오한 의미인 것이다.
그래서, <논어>를 백날 읽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살지 못하는 이들은 끝내 그것을 안다고 혹은 알았다고 감히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유명한 유행어가 여기에 적용된다.
“그걸 아는 사람이 그래?”
입동이 지나고, 어제 한국에 눈발이 날린 곳이 많아 첫눈을 접했다는 소식이 들리더군요.
우연인지는 몰라도 이곳에서도 어제 잠시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진눈깨비 같은 것이 날리더군요.
자아, 이 장을 끝으로 <논어>의 5편 ‘公冶長篇’이 끝이 났습니다.
하루에 한 장씩 공부한다고는 하지만, 어렵고 한번 봐서는 쉽게 이해도 안 되는 것 같고, 약간의 매너리즘에 빠지기 쉬운 단계입니다.
특히나, 공자의 가르침을 안내한다고 하는 글쓴이가 워낙 과격한 언사로 일관하여 멈칫멈칫하게 한 것은 아닌가 우려도 되긴 합니다... 만, 그래도 20편 중에서 벌써 4분의 1이나 마쳤다는 것은 장족(長足)의 발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루에 한 장이라도 <논어>의 가르침을 내 것으로 만들어 꼭꼭 씹어 체하지 않으면서 내 삶에 실행에 넣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값진 배움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내일부터 공부할 ‘雍也篇’은 14장까지가 오늘 끝내는 ‘公冶長篇’과 대의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조금 어려운 공부일 수는 있겠으나, 그리고 조금 천천히 갈 수는 있겠으나, 그럼에도 멈추지 말아야 하고 건너뛰지 말아야 하는 것은 굳이 재삼 강조하지 않겠습니다.
이 공부를 통해, 여러분들의 마음가짐이 변하고, 옳고 그른 것이 무엇인지 가릴 수 있는 보편적 안목이 생겨 사색을 통해 우리 사회가 조금이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다면, 그것만 한 보람이 없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