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가 바라던 이상향이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공자가 꿈꾸던 인(仁)이 완성된 이상적 사회상에 대하여

by 발검무적
顔淵·季路侍, 子曰: “盍各言爾志?” 子路曰: “願車馬衣裘, 與朋友共, 敝之而無憾.” 顔淵曰: “願無伐善, 無施勞.” 子路曰: “願聞子之志.” 子曰: “老者安之, 朋友信之, 少者懷之.”

안연(顔淵)과 계로(季路)가 공자를 모시고 있었는데, 공자께서 “어찌 각기 너희들의 뜻을 말하지 않는가?”하셨다. 자로(子路)는 “수레와 말, 가벼운 갖옷을 입고 朋友와 함께 쓰다가 해지더라도 유감이 없고자 하옵니다.” 안연(顔淵)이 말하였다. “자신의 잘하는 것을 자랑함이 없으며, 공로를 과시함이 없고자 하옵니다.” 자로(子路)가 “선생님의 뜻을 듣고자 하옵니다.” 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늙은이를 편안하게 해 주고, 친구들에게는 미덥게 해 주고, 젊은이를 감싸주고자 한다.”

顔淵(안연)은 앞서 살펴본, 공자의 원픽 제자, 안회(顔回)를 말한다. 淵(연)은 그의 자(字)이다. 자로(子路)를 다시 ‘季路(계로)’라고 고쳐 부른 까닭은, 50세가 되면 백(伯)·중(仲)·숙(叔)·계(季)의 항렬과 자(字)를 사용하는 옛날의 예법에 따라 그렇게 부른 것이다.

가끔 공자는 어쭙잖게 권위만을 내세우는 임금들에 대한 완곡한 디스를 하듯, 제자들에게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눈치를 보지 말고 제자들이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이야기해보라고 하는 플라톤식 수업법을 운용하였다.


이 장은 <논어>에 가끔 보이는 그런 토론식 수업 중 하나이다. 공자가 굳이 두 제자의 의견에 대해 비평이나 평가를 하지 않고, 자로(子路)가 스승의 의견을 묻자, 스승인 공자가 대답하는 세 가지 의견이 나열되어 있다. 언뜻 보기에는 처음 이야기를 시작한 자로(子路)의 의견도, 안연(顔淵)의 의견도 나름 훌륭함을 자처할 만하고, 실제로 그래 보인다. 도대체 스승의 경지는 어떤 말이 나올까 싶어서 성격 급하고 배우기를 좋아하는 자로(子路)가 스승에게 묻는다. 스승의 대답은, 너무도 평범한 듯 하지만 늘 뭔지 모를 비범함이 숨겨져 있는 듯하다.


그런데, 여기서 근본적인 의문이 나온다. 과연 이 세 답변들이 어떤 차이를 갖는가 하는 점이다. 지금 당신의 눈에는 그 현격한 차이가 보이는가? 아직 <논어> 5장 공부 중인데 그게 벌써 보이면 하산해도 되지 무에 이리 열심히 공부하겠는가?


자아, 무슨 차이가 있는지 주자의 설명을 통해 먼저 접근해보도록 하자.

안연(顔淵)이 스스로 자처한 내용은, <주역> ‘계사전 상’에 ‘공로가 있어도 자랑하지 않는다’는 내용과 같은 말이다. 공자가 이야기한 세 부분에 대한 내용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늙은이를 편안하게 봉양하고, 朋友를 신의로써 대하며, 젊은이를 은혜로 감싸주는 것이다. 일설(一說)에 安之는 나를 편안하게 여기게 하는 것이요, 信之는 나를 믿게 하는 것이요, 懷之는 나를 사모하는 것이라 하니 역시 통한다.”

주자는 공자가 설명한 부분에 대해서만 풀어 설명했을 뿐, 명확하게 세 사람의 의견이 어떤 차이를 갖는지 명확하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공부하는 자들이 답답해할 것을 간파한 정자(伊川)가 이 부분의 궁금증을 한 번에 해소해준다.

“공자는 仁을 편안하게(자연스레) 여겼고, 顔淵은 仁을 떠나지 않은 것이요, 子路는 仁을 구한 것이다.”

아! 仁을 기준으로 하여 세 사람의 언급이 어떤 차이를 갖는지 설명해준 내용이다. 이보다 더이 장의 세 사람이 보이는 레벨을 설명한 해설은 보지 못했다. 그렇게 많이 나오지만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었던 개념인 ‘仁’을 가지고 설명하였기에 이 해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왜냐하면 그 어려운 개념이 결국 그들이 목표로 삼고 지향하던 바이기 때문이다.


정자(伊川)의 이어진 해설에 의하면, “자로와 안연, 공자의 뜻은 모두 남과 함께하는 것인데, 다만 작고 큰 차이가 있을 뿐이다.”라는 말로 완곡하게 의미를 하나의 바구니에 담는다. ‘남과 함께’ 그것을 하려고 한다는 점은 같지만 대승적이냐 소승적이냐의 차이를 갖는다고 이해한다. 이 차이가 어디에서 발생했는지,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해설도 아주 상세하게 하고 있어 이해에 도움이 된다.

“자로(子路)는 의리에 용감한 사람이니, 그의 뜻을 살펴보면 어찌 세력이나 이익을 가지고 그를 구속할 수 있겠는가? ‘기수(沂水)에 목욕하겠다’는 한 증점(曾點)에 버금가는 자이다. 안자(顔子)는 자신을 사사로이 여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자신의 잘한 것을 자랑함이 없었고, 남과 내가 같음을 알았다. 그러므로 공로를 과시함이 없었으니, 그 뜻이 크다 할 만하다.

그러나 의식이 있음(이를 행해야겠다는 의식)을 면하지 못하였다.


夫子에 이르러서는 마치 天地의 化工(조물주)이 모든 사물에 맡겨주고 자신은 수고롭지 않은 것과 같으니, 이는 성인(聖人)의 행하시는 바이다. 지금 굴레와 고삐는 말을 어거하는 데 사용하고 소를 어거하는 데는 사용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모두 굴레와 고삐를 만든 것이 사람에게 있다는 것만 알고, 이 굴레와 고삐가 생겨난 것이 말에서 말미암은 줄은 알지 못한다. 성인의 조화도 이와 같다.


먼저 안연과 자로 두 사람의 말을 살펴보고, 뒤에 성인(공자)의 말씀을 살펴보면, 분명 천지의 기상이다. <논어>를 읽을 때에는 비단 글자의 뜻만 알려할 것이 아니라, 모름지기 성현의 기상을 알아야 한다.”

내용이 길어, 설명할 것들이 조금 많다. 먼저 자로(子路)를 평가하면서 ‘기수(沂水)에서 목욕하는 즐거움’이라는 언급된 고사는 ‘욕기지락浴沂之樂’으로 유명한 이야기로, 《논어》 〈선진(先進)〉편에 나오는 이야기로 이번 장처럼 공자와 여러 제자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상황으로 이 장보다 조금 더 확장된 이야기들이 나온다.

뒤에 나오면 다시 자세히 공부할 것이기 때문에 간단히 내용의 핵심만 이야기하자면, 네 제자의 대답 중에서 증점의 대답이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여 허여 하는 내용이다. 이 주석에서는 자로의 수준이 당시 최고점을 얻은 증점의 수준이었다고 높게 평가하는 내용이다. 이것이 앞서 정의 내린, ‘子路는 仁을 구한 것이다.’라는 내용의 평가이다.


다음으로 그 위의 레벨이라고 평가된 안연의 말한 부분의 평가는, 상당히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가지 때문에, 부족하다는 평가를 듣게 된다. 이것을 의도해서 노력해서 이르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 수준은, 일반인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경지에 속한다. 앞서 ‘仁’의 실체에 대해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왔던, 그렇게 하고자 하는 마음, 즉, ‘기욕(嗜慾)’이 있으면 최종 경지인 ‘仁’을 완성했다고 볼 수 없다는 부분이다.


사실 그렇게 하고자 하는 마음을 먹고 그 범주안에 드는 것조차도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바로 안연과 공자를 비교하지 않고 자로를 둔 것이다. 그리고 자로(子路)를 앞서 증점(曾點)의 수준이라고 칭찬한 것도 일반인에게 있어 그 수준까지 오르기도 얼마나 어려운가를 단계로 보여주기 위함이다.

자아, 그럼 공자가 그러한 ‘기욕(嗜慾)’조차 없는, ‘仁’을 완성하는 단계에 이르렀는가를 보자. 정자는 이것을 마치 조물주가 세상 모든 사물을 만들어 놓고, 자연스럽게 그다음을 돌아가게 만들 뿐, 자신이 뭔가를 더해서 하지 않았다는 서양철학의 형이상학적 세련된 설명을 훅~ 하고 집어넣는다.


바로 이 방식이 성인(聖人)의 방식이라고 설명하면서, 굴레와 고삐의 예를 든다. 당시 기준으로 원래는 말에게 굴레와 고삐를 사용했었는데, 이후에는 소에게만 사용하고 말에는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언뜻 보면 무슨 말인지 예가 더 이해가 안 갈 수 있다. 내가 풀어서 다시 설명한다. 말에 재갈을 물리는 것은 사람이 일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의 특성에 따라 말을 다루는 데 있어 가장 효과적인 방식으로 채택된 것이다. 소는 말과 같지 않기 때문에 재갈을 물리지 않고 굴레와 고삐를 사용한다. 즉, 도구도 적용되는 대상에 따라 가장 목적에 부합하도록 맞춤 적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루려고 하는 주체인 인간이 중심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존재가 자연스럽게 따르게 하는 것이 관건이다. 성인의 교화 역시 일방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교화의 대상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이다.


이렇게 설명해놓고 나니, 만약 자로와 안연의 단계가 없었으면 성인의 경지가, ‘仁’의 경지가 얼마나 이르기 어려운 것인지, 그리고 어떤 부분을 해소하고 수양해야만 완성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여기까지가 먼저 공부한 선배들의 해석이다.


이제 여기에 아주 조금 내 해석을 덧붙여본다. 내 해석이라고 해서 뭔가 특별하고 새로운 것은 아니다. 다만 공자가 말한 그 원문에 조금 더 집중하여 돋보기를 대본다는 것이다.

왜 공자는 특별한 기준도 없어 보이는 세 부분으로 구분하여 설명했을까?

이 의문은, 가운데 ‘친구(朋友)’라는 개념만 빼면 상반되는 의미라는 아주 간단한 해석이 된다. 그런데 늙은이와 젊은이의 사이에 ‘친구(朋友)’가 왜 들어갔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친구(朋友)’란 무엇인가? 나와 가까운 사람 아닌가? 맞다. 이 세 개념은 거리의 기준으로 이루어진 설명이다. 거리도 심리적 거리가 아닌, 시간적 거리를 상대화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즉, 늙은이는 과거요, 친구란 현재요, 젊은이란 미래를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자신을 기준으로 한 것이 아니기에, 존재의 역사성이라는 보편성에 기반한 발화(發話)인 것이다.

다소 어렵게 들릴 수도 있는 내용이지만, 요즘 하도 미디어에서 대선 후보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당신에게 익숙해진 지지층으로 말하면 이해가 쉽다. 친구는 나를 지지해주는 나와 함께하는 현재라면 콘크리트 보수 지지층이라는 노년층이 과거를, 2030 혹은 요즘 한창 화가 나 있는 ‘이대남’이 미래를 상징하는 것이 아닌, 팩트상 미래인 것이다.


여기서 방점은, 그것이 시대 상징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를 다시 한번 보라.


원문에서는 ‘그렇게 해주고 싶다’라는 표현을 썼지만, 위에 힌트를 준 주자는 ‘그렇게 해 준다고 진심으로 느끼게 하고 싶다’라고 풀어 설명하였다.


이 차이는 크다.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는 이들이, ‘내가 대통령이 되면 어떻게 해주겠다.’라고 공약한다고 해서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실제로 국민들이, 그를 대통령으로 뽑아준 대중들이 정말로 그렇게 느껴야 그것이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공자는 그렇게 해주겠다고 하지 않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상징하는 그들 모두가 똑같이 그렇다고 느낄 수 있게 하고 싶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이 장에서 공자가 보여준 저 평범해 보이는 말은, 존재의 역사성을 담보하고 수천 년이 지난 지금에도 해결하지 못한 세대 간의 화합과 교감을 통한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세 가지 중에서도 젊은이들이 자신(공자)을 가슴에 품기를 바란다는 내용에 울컥하게 된다.

과연 수천 년 전의, 그리고 이 시대까지 오면서 젊은이들이 과연 공자를 품었던가? 그의 말씀을 제대로 이행하기는커녕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이 우매한 자가 브런치에 이런 부족하기 그지없는 해설까지 하는데도 그다지 읽고 공부하려는 자들은 눈에 띄지 않는다.

지난주 이 시리즈에서 꼰대에 대해 쓴 글에, 2000년에 태어난 20대 초반의 젊은이가 댓글을 달았다. 자기 딴에는 뭔가 불만의 한 마디를 남기고 싶었던가보다. 자신이 글쓰기를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조차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글쓰기였다. 다만 그저 넘기기엔 거슬리는 문구가 하나 있어 짚어주고야 말았다.


그의 댓글에 “운 좋게 좋은 시대에 태어나 하고자픈 것 다하고 산 기성세대는 본인이 어른이라는 착각과 환상에 빠져 기고만장한 태도를 보이고 있죠.”라고 적힌 내용 때문이었다. 혹여 그 젊은, 아니 어린 친구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것은 아닐까 싶어, 내 의견은 빼고 팩트만 써주기로 생각하고 이렇게 답글을 적었다.


“운 좋게 좋은 시대에 태어나 하고자픈 것을 다하고 산 기성세대는, 내 아직까지 본 기억이 없는 듯합니다.”


공자가 추구하려는 도(道)와 인(仁)이 거창하고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특별한 그 무엇이 아니라는 사실이, 이 장의 숨겨놓지 않았지만 놓치기 쉬운 방점이다. 처음 당신이 이 장의 공자 설명을 들었을 때 느꼈을, 그저 너무 뻔하고 너무도 당연한 어찌 보면 아주 소박한 그 아무렇지도 않게 자연스러운 바로 그것이, ‘인(仁)’이라는 것이다.

잘못된 유튜브의 정보를 재미 삼아 보다가 가짜 뉴스에 판단력을 잃어버린 부모님 세대와 자신들은 경제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시대에 버림받았다는 식의 미디어 선동에 휘둘리는 자식 세대, 그리고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혹은 자신의 이익을 지켜줄 이를 위해 ‘깐부’를 들먹이며 가식적인 사귐과 지지를 표명하는 친구들이 모두 제대로 눈을 떠, 현실을 바르게 직시하고, 잘못된 것에 대해 엄중한 사회적 처벌이 따르는 옳은 것이 옳다고 판단됨이 어색하지 않은 사회가 되기를 소망해본다.

수천 년 전 공자가 가르침을 주며 꿈꾸었던 세상이 수천 년이 지난 최첨단을 달리는 메타버스 시대에도 이루어지지 못하고 더 참혹해졌다면, 우리가 세상을 넘겨줄 후세들에게 너무 부끄럽지 않겠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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