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의 잘못을 깨닫는 것만도 어렵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갈수록 완고해져 가는 스스로를 독려하긴 더더욱 어렵다.

by 발검무적
子曰: “已矣乎! 吾未見能見其過而內自訟者也.”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어쩔 수 없구나! 나는 아직 자신의 허물을 보고서 內心으로 스스로 꾸짖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

문장의 맨 앞에 已矣乎(어쩔 수 없구나!)라고 한 부분은, 끝내 이런 사람을 만나보지 못하는구나 라고 탄식하는 말이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지적받거나 비난받기 전에 스스로 그것을 발견하고 스스로 그것을 꾸짖는 사람을 평생에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말은 그만큼 그런 수양이 완성된 이가 드물다는 말에 다름 아닐 것이다.

먼저 주자가 이 장에 대해서 어떻게 해설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사람이 허물이 있을 때에 스스로 아는 자가 드물며, 허물을 알고서 內心으로 자책하는 사람은 더더욱 드물다. 內心으로 스스로 꾸짖는다면 그 뉘우침과 깨달음이 깊고 간절하여 허물을 고칠 것임에 틀림없다. 夫子께서 스스로 끝내 만나보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탄식하셨으니, 배우는 자들을 깨우치심이 깊다.”

이 해설을 통해 주자는 공자가 이 장에서 말하는 것이 단계적 과정을 거침을 제시한다. 먼저 무언가 잘못되었을 때, 스스로에게서 무엇이 허물인지 아는 사람 자체가 드문 현실에 대해 지적한다. 앞서 공부했던 것처럼 잘못이 잘못인 줄조차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제 시작이다.

잘못을 알고서 자신의 허물에 대해서 스스로 꾸짖는 이는 더더욱 드물다고 한다. 잘못이 있음을 알아도 그것이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알기가 너무 어렵고, 아울러 그것을 알더라도 자신의 잘못이라고 인정하는 것까지 나가기는 어렵기 그지없는 과정이다.

그렇게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확실하고 분명하게 파악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그것을 인정하고 자신의 잘못을 꾸짖는 것까지 공자는 말하였다. 주자는 그다음에 공자가 감춰둔 가르침 하나를 조심스럽게 꺼내 제시해준다. 자신이 스스로의 허물에 대해서 꾸짖을 정도라면 당연히 그 허물을 고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말이다.


아는 것이 바로 실천으로 연결되어야만 한다는 공자의 가르침은, 굳이 원문에서 공자가 그러니 그것을 발견하고 고치도록 하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거기까지 가는 사람이라면 굳이 그 말을 하지 않아도 알 것이고, 거기까지 가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실천을 이야기해주더라도 실천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이래서 공자의 가르침이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똑같은 문장임에도 이해하는 수준에 따라 받아들이는 정도가 다르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이렇게 부러 설명하기도 어렵지 않나 싶다.

그래서 <논어>는 수천 년간 단 한 번도 책의 내용이 바뀌지 않았음에도 10대에 읽고 남는 것과, 20대에 읽고 남은 것, 30대 40대 그렇게 나이가 먹어가면서 읽고 남는 것이, 그 가르침의 깊이와 방향이 다르다고 하는 것이다.


진리는 변하지 않고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그것을 바라보는 자의 눈높이가 달라질 뿐이다.

지금도 어리긴 하지만, 그나마 나이를 먹기 전, 한창 젊음이 내게만 계속 머물러 있을 거라고 생각하던 그 시기에는, 왜 불과 예순을 넘긴 선생들이, 학자들이, 장로들이 갑자기 전성기의 자신의 수양과 업적을 다 뒤집어엎는 망령된 행동을 보이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것도, 그저 평범한 일반인들도 아니고 한때 학문을 업으로 삼았거나 그만큼 공부를 했다고 하는 석학 소리를 들었던 이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알츠하이머로밖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변절이나 말 그대로 망령된 언행들이 나를 혼란스럽게 했었다.


물론, 이제 조금 나이 먹었다고 해서, 그 모든 의문이 해소될 정도로 이해된 것은 아니겠으나, 조금이나마 어렴풋하게 왜 그런 일들이 생기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장의 가르침을 이해하는데 앞서 왜 아무 상관없는 것 같은 허튼소리를 하나 싶을 것이다.

아니다. 오늘의 가르침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야기이다.


당신이 10대에 무언가를 잘못했다고 생각해보자. 이 장의 가르침처럼 당신이 먼저 스스로 잘못을 알아낼 수도 있다. 그리고 부모님에게 걸려서 혼날 수도 있고, 너무도 고맙게 나를 지켜봐 준 친구가 그 잘못을 바로 잡아줄 수 있다. 그렇게 잘못을 지적받으면 어떻게 했던가, 당신은?


반성하고 고치지 않았던가? 설사 젊은 혈기에 잠시 욱하고 대들 수도 있고, 당장은 아니라고 소리 지르고 우길 수 있을지언정, 그것이 정말 자신의 잘못이라는 판단이 이성적으로 들게 되면, 고치지 않았던가?

20대의 젊은 날도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30대가 되고 결혼을 하고 아이의 부모가 되고, 대학을 졸업하고 이제 한 분야에서 조금 지식과 경험이 쌓이기 시작하는 그즈음이 되면서는 아집이라는 것이 생기지 않던가? 이 정도 나이와 경력이면 내가 다 알만한 거 아는 것 같고, 나한테 뭐라고 하는 상사가 그다지 나보다 잘난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일과 관련된 분야는 고사하고 책이라고는 제대로 읽지도 않고, 수양은 고사하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기 위한 공부조차 손 놓고, 먹고 산다는 핑계로 자신의 생각에 단단한 껍질을 대기 시작하는 느낌을 받지 않던가?


그렇다고 머릿속에 넣은 것이 없으니 몇 권 끄적인 소설이나 몇 권 손을 스친 그 킬링타임용 책들 가지고 무슨 토론을 할 것이며, 무슨 사색을 하고, 자신을 위한 수양을 하겠는가?

앞서 말했던 것처럼 그나마 석학이라는 말을 들었던 이들조차 나이가 들면서 자신의 껍질을 공고히 하며 점차 주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되는 모습을 보았다. 분명히 더 많이 공부하고 벽을 허물고 지평을 확대하여 자신의 세계가 더 넓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대개 자신이 만들어놓은 세계에 갇혀 점점 자신의 이론과 자신의 알량한 지식만으로 모든 것에 자를 대며 자신의 주장과 자신의 이론이 훌륭하다는 것을 말하기 그지없었다.


책 한 줄 읽지 않는 일반인이나 공부하는 것이 직업이라는 석학이나 크던 작던 차이가 좀 있을 뿐이지, 절대적인 입장에서 나이를 먹어갈수록 완고해지고 잘못이나 실수를 더 인정하려 들지 않지,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쉽게 인정하고 그것을 자신의 탓이라고 스스로 꾸짖는 이들은 정말로 드물었다.


그러니 수천 년 전에 공자가 지적한 대로, 인정하지도 않는 것을, 스스로 찾아 꾸짖고 고치라고까지 진도를 뺄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스스로의 허물을 찾아 인정하는 것을 부인하려는 경향이, 인간의 본성이라고까지 설명하는 것이 영 내키지는 않지만, 그것이 본성이라면, 짐승에 가까운 것이 본성이고 인간에 가까운 것은 이성이고 합리이며,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능력이라고 바꿔 말해주고 싶다.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은, 대접을 받는 위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본보기가 되는 위치에 선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나이 차이가 나는 이가 싸움을 시작하면서 늘 내뱉는 소리가 있다.


“너 몇 살이야?”


몇 살인지를 묻고 강조하고 싶다면, 그런 새파란 자와 주먹다짐을 하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임을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니 스스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리 떠드는 것이다.

물론, 윗사람에게 공경은 고사하고 버르장머리 없음으로 대하는 무지한 이도 있다. 하지만, 그가 정말로 무언가를 알기 때문에 그럴 확률은 나이를 묻는, 더 연배가 위인 사람보다 현저히 떨어진다.

그것이 어른이 갖는 무게이다.

정치인들이 삐뚤어진 것을 모를 리 없는 추기경께서 단 한번도 정치에 대해 쓴소리를 하지 않으신 것은 그러셨던 이유가 다 있다.

이렇게 설명해 놓고 나니, 왜 성인으로 가는 길이, 도를 깨우치는 것이, 인에 다다르는 것이 어려운 것인지를 충분히 설명한 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세계를 작게 누르며 껍질을 단단하게 하고 더 완고해져 자신의 잘못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고, 고치려 들지 않는다.

그런데 정작, 나이가 더 먹은 ‘어른’이라는 존재는 공부를 통해 확실하고 분명하게 아는 것을 기반으로 하여 수양하여 그것을 인정하고 고치려고 노력하는 존재여야 한다는 것이니, 상반되고 모순된 이 상황을 극복해 보여야 하는 것이다. 이 어찌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공자가 살아생전 그런 사람을 볼 수 없음이 안타까워 저리 탄식하신 것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공자 스스로가 평생을 그렇게 해왔으니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바라고 또 바란 것 아닌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지를 알려면 일단 알아야 한다. 알려면 배워야 한다. 배우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읽고 쓰고 경험하며 먼저 간 이에게 가르침을 구해야 한다.

그것은 기본 중에 기본이다. 이 기본에 대해 강조하는 내용이 내일의 가르침이니 이 부분은 내일로 미루고 다시 이 장으로 돌아와 보자.

시비를 분명히 알게 되면, 삶이 힘들다. 사실이 그렇다. 잘못되었는데, 그게 괜찮다고 말하고 넘어갈 수가 없다. 그렇다고 매번 사소한 것부터 심각한 일에까지 모두 와이셔츠를 찢고 ‘S’ 자를 보이며 쫄쫄이 타이즈를 입고 날아다닐 수 없는 바에야 현실과의 조절이라는 것을 해야 한다.


그리고 우선순위라는 것을 잡아야 한다. 무엇을 고치고 어디까지 고칠 것인지,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의 수위조절을 해야 하고, 내 몸이 두세 개가 아니므로 선택과 집중을 해야만 한다.


공자와 내가 선택한 것은 ‘교육’이다.

가르침은 피라미드 마케팅의 기본이다. 한 사람이 제자들을 일깨우고 다시 그 제자들이 주변인들과 제자를 더 기하급수적으로 늘려나가며 깨닫게 하고 움직이게 하면 된다.

이론상으로는 최적인데, 이 가르침이라는 것이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또 상당한 인내를 요하는 장기간의 시간이 필요한 작업이다.

그래서 공자가 평생을 가르치고 보여주고 일깨워주었음에도 자신의 수명에는 한계가 있고, 사람들이 성장하고 움직임을 갖는 것에서 그것이 사회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것까지를 조바심 내며 재촉할 수 없으니 저리 탄식하신 것이다.

나이 먹어서까지 정권을 차지하기 위해 자신을 부르려면 자신에게 전권을 달라는 둥, 권력을 탐내고, 부귀영화를 탐내며 어른 노릇 못하는 이들이 사회의 장로 행세를 하면 그 사회는 결코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다. 그 잘못됨을 끊고 바름으로 되돌릴 수 있는 것은 결국 자신밖에 없다.

당신이 바뀌는 것 하나만으로 나비의 날갯짓이 되어 태평양 한가운데 태풍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당신이 너무 늦지 않게 깨닫고 실천에 옮길 수 있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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