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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자 했던 미래를 위하여

by 한서밀 Dec 12.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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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식민지배의 피해자이자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한 후 일본군 전범으로서 재판을 받았던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일본이 세계 각지에 지어 둔 포로수용소에서 포로감시원으로 일했던 조선인들, 그러니까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이다. 조선인 포로감시원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충격에 빠졌다. 이런 삶들이 있었다고. 그런데 난 왜 하나도 몰랐지. 


충격과 함께 오는 의문은 씁쓸함, 무지에 대한 부끄러움 등 복잡한 심경을 가져온다. 여기서 그저 고개를 돌릴 것인가, 더 알아갈 기회가 있다면 적어도 주의 깊게 보고 들을 태도를 가질 것인가. 나는 조선인 포로감시원이 되었던 이들의 상황과 인생을 더 자세히 알고 싶어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를 보기로 했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관람 당일, 연극을 보기 전에 한 번도 겪은 적 없던 긴장감이 나를 시종일관 짓눌렀다. 조선인 포로감시원은 피해와 가해의 층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존재이고, 그 존재의 원인에는 청산되지 못한 채로 우리에게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일제강점기라는 과거사가 있다. 연극은 자료집이 아니라 가치판단과 주제의식이 들어 있는 서사 매체이다. 조선인 포로감시원에 대해 더 알아가고자 이 연극을 보러 온 것이 맞지만, 동시에 내가 가진 선지식이 적은 상태에서 연극의 서사가 지닌 미지의 시각에 큰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닌지 염려되었다. 그만큼 나는 이 소재가 지닌 무거움과 복잡함에 대해 약간의 두려움이라 해도 될 만한 긴장을 느끼고 있었다.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의 첫 장면은 잔뜩 긴장해 있던 나의 의표를 찌르는 ‘오늘날의 한 북토크 현장’ 장면이었다. 북토크를 여는 작가와 그 위에 걸린 채 작가의 얼굴을 클로즈업해 보여주는 스크린 때문에 실제 북토크 현장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실제로 이 연극은 본디 최양현 작가가 외할아버지의 육필원고를 발견한 후 그것을 기반으로 쓴 르포르타주가 원작이라 한다.(손주와 조부가 함께 지은이로 이름이 올라가 있는 이 르포르타주는 종이책으로도, 브런치북 전자책으로도 읽을 수 있다.) 이 배경은 연극에서 원래 요즘 시대의 청춘들에 대한 원고를 의뢰받았던 ‘이경현’ 작가가 우연히 발견한 외할아버지 육필원고의 내용에 골몰하여 그 기록을 바탕으로 책을 써나가기 시작했다는 설정으로 반영되었다.


무대 위에 걸린 스크린은 잠깐 쓰이고 마는 소도구가 아니라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에서 택한 ‘라이브필름 퍼포먼스’라는 연출 방식의 주요 장치였다. 손에 카메라를 든 카메라 감독들이 직접 무대 위로 올라가 배우들의 연기와 디오라마 등의 소품이 활용된 장면을 찍어 실시간으로 영상을 송출했다. 연극에서 무대란 객석의 관객들과 무대 위의 배우들 사이에서 암묵적으로 특정한 시공간을 의미하기로 약속되어 있는 제한된 공간이다. 그러나 라이브필름 퍼포먼스로 인해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의 무대는 현장이 되고 카메라 감독들의 등을 볼 수 있는 관객들 역시 현장의 일부가 되었다. 실시간 촬영의 특성은 후대 사람인 관객들이 이미 지나간 최영우의 삶을 보다 ‘진행되는 현재’의 느낌으로 겪어 보게 하는 기회를 마련했다.   


브런치 글 이미지 2


작가 이경현이 외할아버지의 삶을 읽어나가며 무대의 시공간이 일제강점 아래의 조선 남원으로 이동함에 따라 극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는 다정다감한 성격에 고등보통학교 졸업을 앞둔 꿈 많은 청년이다.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하고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는 마음을 아버지에게 알리지만 일본이 몰고 온 전운은 조선에도 감돌고 있었다. 영우의 본가인 남원에도 조선인 청년들 역시 일본군으로 징병될 것이고 가가호호 장정 한 명씩을 군에 내놓아야 한다는 소식이 돌았다. 장남은 집안을 지켜야 하고 남동생은 군대에 가기에는 너무 어렸다. 아버지는 차남인 영우 네가 가면 어떻겠냐는 말 끝에 포로감시원이라는 것이 있다며, 총칼 든 군인으로 끌려갈 바에 행정 업무를 하는 군무원으로 자원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며 영우를 타이른다. 가족을 위해서, 그리고 전장에 나가는 군인보다는 군무원이 더 안전하고 직접 사람을 해할 일이 없다는 생각에 영우는 포로감시원에 자원한다.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었기에 주인공 최영우를 비롯해 포로감시원의 실상을 모르고 자원했을 조선인 청년들의 영혼이 부서질 것이 예상되어 안타깝고 슬펐다.


포로를 관리하는 일만 하면 될 거라는 예상과 달리 무기를 들고 군사 교육을 받는 데서 영우는 의아함과 위화감을 느낀다. 영우의 의심은 현실로 나타난다. 영우와 병춘을 비롯한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은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모른 채 마치 물자처럼 여기저기로 태워져 이동한 끝에 지금의 자카르타에 이른다. 자카르타의 포로수용소에는 네덜란드 군인을 비롯한 서양인 포로들이 비인간적인 처우를 당하고 있었다. 연합군 포로들은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로 인도네시아의 열대성 기후 속에서 선로를 설치하는 고된 노역을 해야만 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포로들이 죽어나갔다. 연합군 포로 아드리안 하사는 일본도 제네바 협약을 맺었으니 포로들에게 정당한 대우를 해줘야 한다고 말한다. 영우는 상사인 기무라 소좌에게 제네바 협약에 대해 묻지만 기무라 소좌는 이에 대해 거짓 정보를 준다. 연합군 포로가 노역을 거부하거나 속도를 내지 않는 경우 어떻게 하냐는 병춘의 질문에 기무라는 폭력을 행사한다. 너도 이렇게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포로들을 폭행해서라도 선로 공사 성과를 내지 않으면 역으로 네가 당할 것이라는 뜻이다. 병춘은 점점 포로를 폭행하는 데에 익숙해지고, 영우 또한 아드리안 하사를 한 번 폭행한다.   


브런치 글 이미지 3


일본이 세계 2차 대전에서 패망했다는 소식에 환호성을 지르는 영우와 병춘의 영혼은 분명 조선인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일본군 군복을 입고 했던 행동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연합군의 승리로 해방된 조국,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예상과 달리 영우와 병춘은 일본군 포로로 수감되고 일본군 전범으로서 전범 재판을 받는다. 수많은 포로의 수, 그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판사의 수, 피고가 패전국의 포로라는 요소 등이 작용해 심리는 세 번이 아닌 단 한 번으로 치러진다. 영우와 병춘 같은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은 자신은 일본인이 아니라 항변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들은 창씨개명된 일본 이름으로 불리며 일본군의 일원으로 재판받는다. 다른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처럼 영우와 병춘 역시 사형 선고를 받는다.


병춘의 처형 장면은 참담했다. 목에 밧줄이 감기고 눈앞이 가려질 때, 병춘은 덜덜 떨면서 자기도 모르게 일본군의 선전을 기원하는 노래를 부른다. 식민지에서 수탈되고, 착취되고, 심지어 가해국의 전쟁에 동원되는 대상에는 녹여서 무기를 만들 수 있는 놋그릇 같은 사물, 식민지 땅에서 나는 곡물, 그 산천에 살던 동물들의 가죽과 기름 외에도 늘 사람이 있었다. 여기서 사람이라 함은 그에게서 뽑아낼 수 있는 노동력뿐만 아니라 육체와 정신까지를 더한 인간 한 명으로서의 총체를 말하는 것이다. 폭력이 난무하던 극한의 상황 속에서 병춘의 정신은 부서졌고 빈틈으로 제국주의자들의 폭력이 들어와 그를 물들였다. 병춘은 그렇게 자신에게 공포와 함께 각인되어 당장 떠오르는 노래를 부른 것이다. 그 일본어 가사를 얹은 노랫소리가 나는 얼마나 참담했던지. 


연극에서는 1923년생 최영우의 인생을 보여주는 중간중간 최영우의 외손자인 이경현 작가가 원고를 집필하는 ‘현재’의 장면들이 나옴. 작가와 연락하는 출판사 편집자는 조선인 포로감시원의 육필원고를 회사에서 출판할지에 대해 계속 고민 중이라고 전한다. 기록문학의로서의 가치는 충분해 보이는데 민감하고 복잡한 소재다 보니 쉽게 판단이 서지 않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원고의 다음이 궁금한 편집자도 작가에게 이렇게 묻는다. 


“그런데 작가님, 이 원고는  세상에 나와야 할까요?”


연극은 그 답을 사형 집행을 앞둔 영우의 행동에서 보여준다. 영우는 재판 과정에서 자신의 폭행으로 아드리안 하사에게 영구적인 청각 장애가 생겼음을 알게 되었다. 이에 영우는 그에게 진심을 담은 사죄의 편지를 적어내려 간다. 이 편지가 당신에게 전달될지는 모르겠지만… 포로수용소에서, 식민지 조선인이지만 일본군이었던 나보다 (포로였던) 당신은 더 약자였습니다. 나는 그런 당신을 존중했어야 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다행히 편지는 아드리안 하사에게 전해졌다. 피해자인 그는 최영우에 대한 고발을 철회한다. 진심을 담은 사과를 받은 점, 식민지인이자 말단 관리직이었던 최영우에게 가해진 압력을 이해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사형을 면한 영우는 형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포로감시원에 자원했을 때는 2년 뒤에 돌아올 수 있을 줄 알았던 고향. 시간은 그보다 훌쩍 지나 있었고, 어린 동생은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되어 있었다. 영우는 동생으로부터 이미 아버지가 돌아가셨음을 알게 된다. 돌아왔지만, 시간은 돌이킬 수는 없었다. 


장면은 다시 현재, 이경현 작가의 책 낭독과 북토크가 종료된 후 편집자는 육필원고의 일부를 건네며 원고지와 최영우가 수감 중 썼던 수통 등에 에 쓰여 있던 알 수 없는 숫자들에 대한 답을 찾았노라고 말한다. 원고의 뒷면에는 할아버지가 그린 고향 기차역 그림이 있었고 종이 한편에는 남원행 열차 시간표가 적혀 있었다. 의문의 숫자는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표였다. 


남원행 시간표 옆에는 서울행 열차 시간표가 빈칸으로 남아 있다. 그 빈칸을 보는 순간, 최영우의 육필원고가, 최양현 작가의 르포르타주가, 그리고 이경현 작가의 책과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라는 연극이 세상에 나와야 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뇌리에 다음의 문구가 퍼뜩 떠올랐다. 가고자 했던 미래를 위하여. 


최영우는 써야만 했다. 자신의 피해자인 아드리안 하사에게 사죄의 말을. 과거는 되돌릴 수 없고 어쩌면 이는 피해자가 더욱 실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조선인 포로감시원 최영우는 자신의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사죄하고 용서를 구해야 했다. 피해자가 과거에 침해당했던 인격의 존엄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도리를 다해야 했다. 그리고 최영우 자신으로서도 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진심 어린 뉘우침이 필요했다.   


최영우는 전부 써야만 했다. 자신에게 있었던 모든 일을. 비록 그가 이 세상에 원고를 내놓으려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이 겪고 행했던 모든 일들의 특수성과 보편성을 돌아볼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대의 격랑에 많은 자유를 빼앗긴 상태에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운신의 폭은 오늘날에 비해 매우 좁았으므로, 자신의 삶이 파도에 그대로 쓸려 가 사라지는 일 자체를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공개되지 않더라도, 그는 자기 자신에게라도 증언해야 했을 것이다.


전시 같은 거대한 폭력의 현장 속에서 상식과 신념을 지키는 일은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상황으로 돌아올 수 있다. 폭력의 위압감에 짓눌린 순간 정의를 실현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폭력은 결국 낮은 곳으로,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로 향하기에 우리는 매 순간 상대의 인격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일깨우며 살아가야 한다. 또한, 최영우의 성찰처럼 그 순간에서의 강자와 약자를 인지해야 한다. 가해국 일본에게 조선인 최영우는 식민지배의 피해자였고, 폭력을 일삼은 일본군 기무라 소좌에게 말단 관리직인 야마모토 에이우(최영우의 창씨개명된 이름)는 항거불능 상태의 피해자였지만, 포로수용소 안에서는 연합군 포로보다 우위에 있었다. 최영우는 그 사실을 인정했으며, 아드리안 하사는 최영우의 사죄를 받은 후 역으로 그의 처지를 헤아려 주었다.(어찌 보면 네덜란드 군인이라는 점에서 그도 인도네시아 사람들에게는 가해자였을 테니...) 


이경현 작가는 북토크의 말미에서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 그의 인생은 거친 파도 위의 작은 조각배였을까요. 그의 인생은 닻도 없고 바람을 이용할 돛도 크지 않은 무력한 조각배였을까? 분명 그의 청춘은 선택지도, 정보도 적었다. 식민지 조선의 청년이 아니었다면, 징병의 위협이 없었다면, 포로감시원의 실상을 알았더라면 그는 포로감시원에 자원했을까? 당연히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통렬한 반성을 통해 스스로 닻을 내리고 주변을 살폈다. 괴롭지만, 과오를 뉘우치지 않고는 같은 길만 반복할 뿐 원하던 미래로 나아갈 수 없으니까.   


브런치 글 이미지 4


연극을 보고 난 후, 우연히 위의 전시 벽보를 보았다. 연극 후기의 제목으로 삼고자 했던 문구와 비슷한 문구가 적혀 있었다. 전시 내용은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와 그분들이 바랐던 미래를 담은 것으로 보였다.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으로 대한민국의 지금을 누리고 있는 후손으로서는 독립운동가들이 꿈꾼 미래가 오는 데에 한 조각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한편으로는 우리의 선조에는 조선인 포로감시원처럼 피해자성과 가해자성이 공존하는 이들도 있기에, 최영우가 한 성찰을 나 또한 염두에 두며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한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민주시민의 교육을 받고 자란 내 상식이 무너지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추운 밤에 뛰어나가 우리의 상식과 신념을 지켜 준 영웅들 또한 보았다. 어둠을 밝히는 촛불과 응원봉의 불빛들을 보았다. 불안하고 슬프지만 희망은 있다.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한 자리로만 정해두지 않고 순간순간 성찰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을 가진 채로 살아가길 희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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