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전트가 주로 하는 것들
흘러가는 여름의 시간들
휴가를 갔다 오고 나서, 에이전트에게 부탁받은 일을 끝내고 짧은 휴식을 만끽하는 중이다. 늘 평일에 작업실에서 뭔가를 쓰거나 그리는 일에 익숙한 나로서는, 집에서 이렇게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은 참 어색하기만 하다. 프리랜서이기 때문일까? 가끔은 누군가가 나를 배에 태워서 어디론가로 인도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늘 내가 선택해서 하는 일이니 만큼, 흘러가버리는 모든 시간이 오롯이 나의 책임이라는 것이 참 무겁게 느껴진다.
저번 포스트에서 말했듯이, 작년 11월부터 운 좋게 너무나 좋은 에이전시 The Cat Agency를 만나서 같이 일을 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일러스트레이터들은 프리랜서라서, 혼자 일을 하고 혼자 작업 프로젝트를 따낸다. 나 역시 귀국한 후부터 에이전시를 만날 생각조차 안 하고 혼자 고군분투하면서 그림일들을 찾으려고 많은 노력을 해왔다. 사실, 출판사 관계자들을 잘 알고 있으면 굳이 에이전시를 거치지 않고 일을 해도 아무 지장이 없다. 오히려 더 좋다! 에이전시가 일감을 구해오는 만큼 작가에게 돌아가야 할 몫의 일부를 커미션으로 떼어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 입장에서도 과연 장기적으로 커미션을 주고도 에이전시와 같이 일해도 될지, 경제적으로 곰곰이 스스로 잘 따져보고 결정해야 한다. 계약이라는 건 한번 맺게 되면 쉽게 끊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 에이전시가 있으면 그림 작가에게 어떤 도움이 될까? 에이전시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한번 간략하게 살펴보자.
나의 창작 그림책을 큰 출판사에 대신 투고해 준다.
상당수의 많은 출판사들- 특히 Simon&Schuster 나 HarperCollins, Macmillan 같은 전 세계규모의 큰 출판사들은 아예 에이전시를 끼지 않은 글작품이나 그림 작품을 받지 않는다. 또한, 출판사의 이름도 설립자도 다르지만 알고 보면 이런 Big 5 출판사의 임프린트(자회사) 회사나 계열사인 경우가 정말! 정말 많다.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출자금의 상당수를 큰 출판사가 차지하며, 여러 방식으로 경영에 간섭을 하는 경우가 많다. 여하튼 이런 이유로 큰 출판사에 자신의 그림책을 투고한다는 건, 공인된 에이전시가 아니면 거의 불가능하다. (혹은, 아는 사람이나 친척이 해당 출판사에 다닌다면 모를까.)
창작책 투고에 에이전시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에이전시의 에이전트들은 전직 에디터나 아트 디렉터, 혹은 출판 관계자는 경우가 많아서 이쪽 소식에 정말 빠싹하다. 그리고 각 출판사에 현재 어떤 에디터나 아트 디렉터가 있는지, 그들의 취향이 무엇인지 그들의 문화적 배경이 무엇인지까지도 잘 알고 있다. 때문에, 내가 쓴 글이나 그림이 어느 출판사의 누구에게 가장 잘 어필할지 에이전트들은 잘 알고 있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 작품을 만들더라도, 그 작품이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취향을 가진 적합한 사람에게 보여줘야 가장 가치가 있다.
우리 같은 그림 작가들은 그림에 있어선 프로일지 모르지만, 이런 정보력 면에서는 역시 아마추어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에이전트가 필요하고, 에이전트는 우리 같은 작가를 필요한다. 서로에게 윈-윈인 것이다.
내 작품을 SNS 나 웹 사이트 등으로 홍보를 해준다.
에이전시들은 주로 인스타그램과 트위터를 이용해서 SNS에서 작가 홍보를 한다. 그들이 서로 팔로우하는 사람들은 주로 출판관계 종사자가 많다. 아트 디렉터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마케터, 에디터 등등… 그런 다년간 쌓인 다양한 인맥을 총 동원해서, 에이전시는 작가들을 홍보한다.
해당 작가의 새 그림책이 나오면 잘 편집해서 소개도 해주고, 프로젝트 계약이 성사가 되면 작가 사진과 함께 공식적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준다. 또한, 매달 혹은 각 시즌마다 “Promo” 이벤트를 만들어서 작가들에게 개인작품을 만들기를 독려한다. 예를 들어 크리스마스를 주제로 “Promo”를 하게 되면, 많은 작가들이 크리스마스를 테마로 작품을 만들게 된다. 그리고 그 작품들을 모아서 SNS에 몇 주간 업로딩을 하며 홍보를 한다. 돈이 들어오지 않으면 개인작을 거의 하지 않는 나로서는, 이런 기회가 내게는 정말 뜻깊다!
SNS에서 뿐만이 아니라, 에이전시들은 각종 그림책 행사장이나 박람회에 참여해서 작가의 그림들이 실려있는 도록들을 소개하며 작가를 홍보한다. 혹은, 매 시즌마다 디지털 카탈로그를 만들어서 자신들이 아는 아트 디렉터들에게 메일을 보내기도 한다. 이렇게 에이전시는 다양하게 작가들이 더 돋보이고 더 잘 부각되도록 많은 신경을 쓴다. 이런 노력에 나도 스스로 좋은 작가가 되고자 노력을 하게 된다.
그림 일을 알선해 주고, 계약서를 수정&보완해 준다.
이렇게 백방으로 노력해서 작가의 그림이 아트 디렉터의 눈에 들게 되면, 여러 심사숙고를 거쳐 그림 일이 작가에게 의뢰된다. 이때에 에이전트는 작가가 혼자 해야 하는 지난한 과정- 예컨대 법률 용어 관련이나 흥정, 계약서 보완 등- 들을 대신 맡아서 해준다. 그림 작가, 특히 나 같은 해외 그림 작가에게 영어 계약서는 아직도 까다롭고 가끔은 참 무서운 존재이다. 특히 계약금에 관한 조율을 하는 건 정말 어렵다! 동네 시장에서 돈 백 원을 아끼려고 흥정하는 것도 어려운데, 더군다나 해외의 출판사와 흥정한다는 것은 참 마음이 지치고 버거운 일이다. 이런 까다로운 일들을 에이전트가 맡아서 해주기 때문에, 작가는 부수적인 일을 떠나서 좀 더 온전히 작품에 집중할 수 있다.
물론, 에이전트는 총금액에서 일정 퍼센트를 커미션을 떼간다. 그 퍼센트는 15% 에서 35%까지 정말 다양하다. 개인적으로 30%가 넘어가는 건 너무 비싸다는 생각이 들지만, 옥외 광고나 신문 광고같이 단가가 높은 큰 프로젝트의 경우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같이 에이전시에 있는 글작가와 그림 작가와 같이 콜라보레이션을 해준다.
그림 일을 알선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내 에이전시 The Cat 같은 문학 에이전시의 경우 해당 글작가와 콜라보레이션 작업을 진행하기도 한다. 나의 경우엔, 글 작가가 쓴 유명한 디자이너의 전기를 바탕으로 샘플 일러스트를 그려준 적이 있다. 출판사의 디렉터들은 언제나 신선하고 새로운 작품을 보고 싶어 한다. 이렇게 에이전시가 해당 글작가와 그림 작가와 콜라보를 시켜서 작품을 제출하면, 출판사 입장에선 좀 더 잘 다듬어지고 준비가 잘 된 투고작으로 여긴다. 더군다나 에이전시까지 있으니 좀 더 신뢰할 수 있고 믿을 수 있다는 느낌을 줄 것이다.
글 작가와 같이 콜라보레이션을 한건 처음이었는데, 정말 뜻깊고 재밌었다! 앞으로도 이런 다양한 글감을 바탕으로 그림을 많이 그려보고 싶다.
플러스, 그림 작가로서의 소속감
마지막으로, 에이전시가 있다는 건 어떤 느낌이냐면… 막막할 때에 도움을 청할 곳이 있다는 느낌? 혹여 내가 길을 헤멜 때에 조언을 해줄 누군가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느낌이다. 그림이든 글이든,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들은 사실 늘 혼자이기 때문이다.
프리랜서 작가로서 살면서 많은 사람들이 포기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고립감이다. 나 또한 혼자 모든 걸 꾸리고 헤쳐나간 터라, 매년 새해가 될 때마다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생각하면서 참 막막하곤 했다. 한국의 모든 작가들이 마찬가지 아닐까? 남의 손을 빌린 것이 아닌, 바로 “내”가 만들어야만 의미가 있는 것들. 그런 작품들을 늘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다 고독하다.
에이전시가 있음으로써, 에이전시에 소속된 다른 많은 작가들을 서로 알게 된다. 비록 휴대폰 액정 속의 SNS를 통해서지만, 그래도 각자 가는 고독한 창작의 길에 서로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다 같이 응원한다는 것. 나와 같은 결을 가진 사람들과 교류를 한다는 건 정말 뿌듯하다. 또 서로에게 큰 자극이 되고 큰 분발심을 갖게 되니, 역시 서로에게 윈-윈이다. 사는 곳도, 문화적 배경도, 그리는 그림 스타일도 다 각자 다르다. 그런 서로의 개성을 보면서 늘 무미건조하게 똑같은 스타일로만 그렸던 나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고, 그 개성으로부터 많이 배운다.
그래서일까, 예전보다 그림 그리는 일이 참 즐겁다! 앞으로도 다양한 사람들과, 좋은 기회로 많은 작품을 꾸준히 그려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